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39화 (39/119)

〈 39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9)

* * *

"좋아, 여기면 되겠지."

­ 그러네요.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망토가 기분 좋게 펄럭였다.

아무래도 새 아지트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폭포 뒤에 숨은 동굴이라니, 뭔가 절세비급이 있을 것 같은 곳이에요! 게다가 야광석? 꺄아아!! 낭만 있어!!

"그러게. 원래 뭔가 있어야 할 곳은 맞긴 한데."

­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 공간은 원래 북쪽 전선, 한탄강의 히든피스가 있어야 할 맵이었다.

북쪽 전선에 다른 히든피스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 계획은 취소되고 맵이 이런 곳에 박히긴 했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큰 탁자처럼 생긴 바위에 앉아 칼을 매만졌다.

제법 날카롭게 선 날이 섬짓한 예기를 풍겼다.

새삼 나는 왜 이런 도구를 들고도 부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 그런 한탄이 새어나왔다.

'…뭔가 선택이 필요하겠어.'

내 전투력은 부적이 없으면 이 할 미만으로 급락한다.

차라리 부적 없이 본래 전투력의 사 할만이라도 나오면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터.

허나 내 전투 스타일은 부적술에 크게 의존하는 기형적 형태이다.

이는 문자의 기적이 무척이나 만능한 이유도 있지만, 내 검술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 수련시간의 칠 할을 검술을 수련하는데 쓰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걸 수련하는데 쓴다.

그럼에도, 내 검술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정도에서 살짝 나아졌을 뿐.

도저히 그 이상으로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무기를 바꿔볼까. 태도를 고른 건 발도술 때문인데, 발도술이 딱히 검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차라리 다루기 쉬운 둔기라던지, 그게 나으려나…'

차라리 무기보다는 부적술에 치중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이위화?火를 사용했다는 건 건위천??이나 진위뢰?雪 같은 강력한 부적술도 쓸 수 있다는 뜻이니.

또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는 검술과는 다르게 꾸준히 경지를 올리다보면 던질 수 있는 금속부적을 사용할 수 있을 테고, 거기서 더 올라가면 부적 같은 매개체가 없어도 부적술을 쓸 수 있을 거다.

'아니, 그러면 부적술의 의존도가 더 올라가잖아. 으음, 모르겠네.'

이번 시험이 끝나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 그래서요, 영웅님!

"응?"

­ 이제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요? 기다리기만 하면 끝 아니에요?

"음… 아직 고비가 하나 남았어."

­ 네에에!? 여기가 마지막 안전지대일 거라면서요! 가만히 있어도 되잖아요, 그럼!

나는 씁쓸히 웃으며 망토를 돌돌 말아 머리맡에 베고 누웠다.

화룡의 비늘로 만든 물건답게 따뜻하기 짝이 없다.

"금지구역이… 이제 세 개지. 남쪽 화산, 동쪽 수몰도시, 중앙 험지."

­ 그렇죠? 영웅님 말 대로라면 세 시간 뒤에 화산이랑 수몰도시가 닫힐 테고. 그 뒤에 30분 더 버텨서 험지까지 금지구역이 되면 이기는 거 아닌가요?

"그치. 5분 30초만 버티면 되니까."

하지만,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여기가 마지막 안전지대가 되면, 지도에 실시간으로 모든 생존자의 위치가 나타난다.

개중엔 나처럼 싸움을 피하는 이도 있을 테고,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러 다니는 이도 있을 터.

내가 그 마지막 아비규환에서 무사하리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 그럼 여기에 꽁꽁 숨어 있다고 해도 하등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저 같아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노릴 것 같은데…?

"지도는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지 못해. 내가 땅 위에 있는지, 협곡 밑바닥에 있는지 구분해줄 정도로 친절한 지도는 아니거든. 그것만 보고 폭포 뒤에 있는 동굴을 찾기는 힘들겠지."

물론, 들킨다면 구조상 도망치기도 여의치 않으니 맞서 싸워야 할 터다.

재수 없으면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생존자가 '하이에나'하러 올지도 모르고.

"음… 그러니까 나는 그때를 대비해 열심히 쉬어둬야겠어. 위험하면 깨워줘."

­ 저도 졸린데…

"봉인지에서 많이 잤으면서…"

정자세로 망토를 베고 눈을 감았다.

회복력을 올리는 데는 수면만한 게 없으니까.

전투 중에 쪽잠을 자며 지속력을 늘리는 것도 헌터의 덕목이다.

'세 시간 동안 자면 스피릿은 다 차겠지… 다리는 자고 일어나서 지뢰복?雪?으로 치료하자…'

나는 셀레스티에게 경계를 맡기고 잠에 빠져들었다.

***

"야, 얘 진짜 괜찮다. 어때보여?"

"괜찮네."

"그래? 그럼 얘는? 이 방패 쓰는 애 말야."

"괜찮은 것 같다."

"…쟤는?"

"괜찮아 보이네."

"……."

흰 두루마기를 입은 여성이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둘렀다.

빠악!!!

"끄헉!"

대책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험한 인상의 남성은 뒤통수를 얻어맏고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야!!! 네 길드원 고르는 거잖아!!! 좀 성의 있게 임하라고!!!"

"윽, 으으… 그, 그치만 네 안목이 더 좋잖아… 난 잘 모른다고…"

"제발, 이 화상아!!! 내가 어디까지 해줘야 되는데!!!"

빠악!!!

"끄아악!!"

"언제 사람될래, 언제!!"

"소희야."

하르미아가 느지막히 여성을 말렸다.

여성은 그녀의 목소리에 찔끔하더니 한숨을 쉬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으, 으윽…"

"…괜찮아?"

"너, 너무 진심을 담지 않았냐…"

가소희가 고개를 처박은 김동규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김동규는 험상궂은 인상과는 다르게 한껏 풀죽은 표정이었다.

"…난 아직도 너희가 한국칠성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저희도 그렇습니다, 누님."

"죄, 죄송해요…"

무검희 가소희, 애시드라 티어즈 김동규.

다페르헤이드에 없던 새로운 한국 칠성이었다.

"대뜸 찾아와서는 수행평가하는 것 좀 보여달라니… 우리 조카님 보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말야."

"으, 그치만… 곧 재앙이 들이닥친다는 정보가 있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길드에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정말 고양이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냥 이 참에 소수정예로 바꿔. 아님 약한 애들을 좀 받던가. 왜 굳이 아카데미 출신을 고집하는 건데?"

"누님. 누님은 길드를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김동규가 착잡하게 이마를 짚었다.

한국은 비상사태 발발시 전국의 길드에 '동원령'을 내릴 수 있다.

동원령이 떨어지면 전국의 길드는 일정한 의무를 부과받는데, 그 의무는 길드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소길드는 의무 없음, 일반길드는 일정한 금전적 지원, 대길드는 인원차출과 금전적 지원… 이런 식이다.

4대 길드에 들어가는 김동규의 산성비는 거대길드로, 동원령이 떨어지면 국가에 무조건적 협력을 강요받는다.

국가에서 길드의 금고를 싹 털어가도, 죽을 게 분명한 최전선에 모든 길드원을 몰아넣어도 찍소리도 못한다는 뜻이다.

과거에 한 거대길드가 그런 노예계약이나 다름 없는 동원령에 '의문'을 제기했다가 온 국민에게 매국노란 뭇매를 맞고 산산이 찢어져버린 전력이 있으니, 부당하다고 반발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김동규는 재앙이 침입해 동원령이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산성비의 인원을 채워넣어야만 했다.

인원이 부족한 지금 상태로 동원령이 떨어지면 길드가 막중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날 게 뻔하니까.

"인원을 줄여서 소수정예가 된다고 해도 정부가 거대길드란 범주에서 산성비를 빼줄 리가 없죠. 그렇다고 아무나 받으면 당장의 위기는 넘기겠지만 그 후가 문제입니다. 동원령이 끝나고 신입들에게 보상이란 이름의 투자를 해줘야 할 텐데, 질 떨어지는 신입들은 투자해봤자 전력이 안 될 게 뻔하니까요. 결국 자금은 텅텅 비고, 길드의 가치는 수직으로 하락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상황이 끝나고 다 자르면 안 돼?"

"그럼 부당계약이니, 갑의 횡포니, 거대길드의 비리니 하면서 여론에게 처맞겠죠! 그럼 길드가 그대로 쫑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럴 거면 차라리 용병을 쓰죠!"

이런 연유로, 질좋은 신입이 아주 많이 필요하게 된 김동규는 가소희를 데리고 극정 아카데미에 오게 된 것이다.

김동규가 화면을 쳐다보며 비통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를 유심히 쳐다보던 가소희가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빠악!!!

"끄아악!!"

"그렇게 간절한 놈이 그렇게 대충대충 임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 그치만… 나 진짜 보는 눈 없는 거 알잖아… 진짜 모르겠는 걸 어떡하냐고…"

가소희가 미간을 짚었다.

이 미련한 친구는 언제쯤 홀로 설 수 있을 지 걱정이 된 까닭이다.

'멍청이…'

그렇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가소희가 다시금 화면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눈에 하나 걸리는 학생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정시현이었다.

"…스피릿 각성자?"

"우리 조카님이야. 어때? 예쁘지?"

"선배님이 조카도 있었어요? 처음 듣는데… 어? 잠깐…"

가소희가 눈을 크게 떴다.

화면 속의 학생이 다리에 부적을 붙이고 스피릿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스피릿의 색은… 완연한 보라색이었다.

"…어어!?"

***

세 시간 후, 셀레스티가 나를 깨웠다.

나는 예정대로 부적술을 이용해 다리의 상처를 치료했다.

"아, 씁, 아파라…"

­ 으, 아파보이긴 하네요.

가부좌를 풀고 여기로 오면서 회수한 부적은 총 12개.

그 중 하나를 소모해 다리의 상처를 재생하고 있으니 남은 건 총 11개였다.

유하에게 꿰뚫린 무릎이 부글부글 끓으며 재생한다.

우혜나 선배를 위해 연습한 지뢰복?雪?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으아, 으, 아파라아…"

­ 연골이 만들어지는 게 다 보이네요… 연골이 없는데 그동안 어떻게 걸어 온 거에요!?

"근성이지, 근성…"

마침내 다리의 상처가 다 나았다.

기껏 회복한 스피릿은 무려 사 할이나 털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제 다시 뛸 수 있게 됐으니 남는 장사다.

자리에서 가뿐히 일어서서 지도를 켰다.

이제 남은 사람은 약 30명 남짓.

이제 어떻게든 30분만 버티면 나의 승리다.

'아직 홀로 있는 사람이 나까지 6명. 연합을 이룬 무리는 5개. 4명과 5명의 무리가 부딪히네…? 좋아, 이러면 시간을 더 벌지. 또 나는 험지의 중심에 있으니까 우선적인 타겟은 아닐 거야. 계산해보면… 30분은 족히 벌겠어.'

이쯤 되면 승리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투태세는 다 갖춰 놓았다.

양쪽 치마 주머니에 각각 부적이 4개, 가슴골에 끼워놓은 게 3개.

크로스백을 버려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가슴에서 부적을 꺼낸다고요… 너무 음란해요!!

"…주머니에 더 자리가 없는데 어떡해, 그럼."

­ 차라리 제가 쥐고 있을게요! 가슴골은 진짜 아닌 것 같아요!

"그럴까? 너 생각보다 머리가…"

그때, 난데 없이 알림이 떠올랐다.

<설원의 큐브가="" 발동됐어!="" 5초="" 동안="" 모든="" 생존자의="" 킬수를="" 공개할게!=""/>

­ 1위: 샬롯 스털링, 30킬

­ 2위: 이원, 18킬

­ 3위: 채유하, 17킬

­ 29위: 하성철, 0킬

"…이런 미친!?"

­ 왜, 왜요? 또 부적 잃어버렸어요?

"30킬이라고!??"

나는 감람빛 큐브를 돌리고 망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 이렇게 되면 29킬을 한 생존자가 있지 않는 한 무조건 이긴다…!

"말도 안 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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