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41화 (41/119)

〈 41화 〉 무기여 잘있거라 (1)

* * *

환상세계가 깨져나가며 저변에 숨겨진 세계가 드러난다.

빠르게 추락하던 내 몸은 삽시간에 속력이 멎었고, 어둠 속으로 나앉던 시야는 어느새 텅 빈 대련장을 비추고 있었다.

"조카님!!! 우승 축하해!!!"

빰빠밤ㅡ!

난데 없이 울리는 팡파레와 함께 뒤에서 하르미아가 나타나 색종이 조각을 막 뿌렸다.

순간 화들짝 놀랐지만 모두 환상이었던지라 조각들은 내게 닿자마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르미아 님?"

"꽤 허무하게 우승해주셨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하하… 시스템을 잘 이용했다고 해주세요."

"으응, 뭐, 그렇지. 네게 뭐라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그래도 다음부터는 시스템을 좀 고쳐야 쓰겠네."

하르미아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정말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우승한 게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동안 네가 벌이고 다닌 짓은 내가 다 봤어! 작년 선배한테 여러가지 많이 주워들은 모양이지? 험지의 배회자를 노리다니 말야!"

"그랬죠. 그래서 그렇게 전략을 짠 거고."

"아하하, 가끔 보면 정말 책사답다니까."

사실 선배에게 주워들은 게 아니라 원래 알고 있던 지식이긴 했지만, 이러나 저러나 내가 전략을 잘 짠 건 맞지 않은가.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라니!

"뭐, 아무튼. 다른 애들은 이미 다 나갔어. 밖에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빨리 가봐. 아, 맞다! 소희가 이것 좀 전해달라던데."

"소희요?"

"가소희. 무검희 말야."

"네, 네에!?"

"으음, 무슨 내용인지는 안 봤어. 걔가 꽤 간절한 표정이었거든."

하르미아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가소희가 내게 남긴 편지인 것 같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편지를 받아들자 하르미아가 몸을 돌리고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나중에 봐! 맘 같아선 조카님이랑 놀고 싶은데, 지금은 수행평가 보고하러 가야 돼서 좀 바쁘거든. 심심하면 언제든 찾아오고!"

"앗, 네, 네에! 안녕히가세요!"

하르미아가 사라지자, 주변을 확인하곤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봤다.

그 안에는 예스러운 필치로 쓰인 장문의 편지가 있었다.

찬찬히 그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니까, 그, 빨간 하이힐이요,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엥?"

편지의 내용은, 꽤 황당했다.

***

오늘 일정은 시험 후 완전히 자유시간이었기에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러 카페를 들렀다.

여전히 페널티가 풀리지 않아 등 뒤에 망토를 휘날리는 채였지만 이미 어지간히 익숙해진 터라 얼굴을 살짝 붉히는 수준으로 수치심을 견딜 수 있었다.

"시현아."

"으, 응?"

"정말 미워."

내 앞에 앉은 유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빨간 딸기 프라페를 빨대로 휘휘 젓던 그녀는 내 카페 모카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1등 하고 싶었는데… 시현이한테 농락 당했어…"

"그, 으음… 미안…"

"나빴어, 정말."

유하가 으아ㅡ하는 소리를 내며 탁자에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이가 축 늘어진 초록머리를 마구 헝클어버리며 히히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 번 실패는 병모가지? 그렇다잖아!"

"병가지상사겠지, 수연아… 그보다 머리 만지는 거 그만두지 않을래…?"

"않을래!"

이내 수연이의 손길에 의해 단정한 녹빛 단발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유하는 해맑게 웃는 수연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러 쫒아내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꽤 진중한 표정으로 내게 요청했다.

"빗어줘."

"응…?"

"안 해줄 시 삐짐."

유하가 눈을 반개하고 나를 바라봤다.

안 해주면 정말로 토라질 기세다.

평소라면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겠지만, 나는 결국 그녀의 의지에 굴복하고 조용히 빗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투박하기 그지 없는 내 빗질이 뭐가 좋다는 걸까.

스읏, 스읏…

"으음… 헤헤."

"…너 되게 정령 같다."

"정령? 으음, 나도 정령 만져보고 싶은데 샬롯한테 부탁해볼까. 그나저나 걔 말야, 혹시 시험 끝나고

만나봤어?"

"샬롯? 아니? 보지도 못했는데."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 화나지 않았을까? 네가 정말 죽어라 쫒아다녀서 죽은 거잖아, 결국."

…그런가?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니, 나였어도 화가 많이 날 것 같았다.

버티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한 명이 날 죽이려고 이 악물고 달려든다고 생각하면…

"으음… 이따가 한 번 가봐야겠네."

"그치? 참 어이 없게 우승하긴 했어. 열심히 달리기만 하다가 우승을 해버리다니.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기나 하니?"

"아하하…"

그치만 이겼으면 된 거 아닌가?

승부의 세계란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것을!

"시현아아."

"응?"

"나도 빗어볼래."

열심히 녹차라떼를 빨아먹던 수연이가 곁으로 다가와 빗을 건네받았다.

유하는 그 모습을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그냥 네가 계속 빗어주면…!"

투두둑.

"아야!!"

"앗, 미안! 빗이 너무 촘촘해서."

수연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계속 빗질을 해나갔다.

유하는 빗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연신 으아, 으아, 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 억척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이다.

"으아, 으아아… 이, 이만하면 됐어, 수연아!!"

"어? 벌써 다 빗었나? 역시 난 뭐든 잘하는 것 같아!"

"…너는 검 말고 다른 걸 들면 안 되겠다."

"너도 유하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내가 그만큼 칼을 잘 쓰긴 하지!"

녹색 머리카락이 한가득 엉킨 빗을 들고 잘난 체를 해보이는 수연이.

머리카락을 만지며 울상을 짓는 유하와는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으우… 이러다 탈모 오는 거 아냐…? 어휴. 아무튼, 이따 샬롯한테 한 번 가봐. 사실 너 아니면 챙겨줄 애도 없으니까. 그나저나 고민이 있다고?"

"응? 고민? 뭔데뭔데? 남친 생겼어?? 이럴 수가아!!!"

"아니, 그딴 거 아니거든. 일단 빗은 나 줘."

수연이에게 참빗을 돌려받고 푹 한숨을 쉬었다.

그 고민이란, 다름 아닌 무기에 대한 고민이었다.

개인무장이 제한되는 아카데미 내에서야 그렇다 치지만, 밖으로 나가면 내 무기는 아카데미제 태도가 아니라 송곳니학살자와 천린이 된다.

둘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발도술 때문에 큰 고민 않고 태도를 주무장으로 골랐지만, 이제 보니 그건 이리보나 저리보나 잘못된 선택임이 자명했다.

발도술을 사용하려면 우선 태도가 천린에 꽂혀 있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런데 평소에 태도를 뽑고 싸운다면 빠르게 발도술을 펼치는 게 곤란할 뿐더러, 납도를 하는 동안 완전 무장해제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큰 허점이 있다.

검술이라도 수련하는 만큼 팍팍 오르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서 심히 고민스러운 바이다.

"나, 태도 말고 다른 무기도 써볼까 싶어."

"무기를 바꾸려는 거야?"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태도는 부무장으로 돌릴 셈이야."

"하긴, 시현이 칼질은 진짜 구리긴 하지."

"수연아. 말 조심."

수연이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계속 말했다.

"아니이, 솔직히 그렇잖아. 얘 칼질 하는 거 보면 혼자 할 때는 깔끔하고 괜찮은데 막상 대련할 때는 검이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게 다 보인다니까? 너무 생각이 많아서 움직임이 이도저도 아니라고 해야 하나? 으움, 얘 부적술 쓰는 거 보면 판단력의 문제는 아닌데 말야."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과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것은 일종의 수싸움.

착수시간이 총 3분 정도 되는 불릿체스를 생각하면 편하다.

한 턴에 약 1초만을 소비해야하는 불릿체스를 플레이할 때는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빠르게 손을 놀려 기물을 움직이면서도 다음 수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상대의 수를 신경써야 하며, 자신이 두려던 수가 막혔을 때 어떻게 할 지도 모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 긴박감 넘치는 짧은 순간에 서로의 수를 주고 받으며 결정적인 한 수를 상대의 목에 꽂아 넣은 자가 승리하니.

정말 근접계열끼리의 대련과 똑 닮아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칼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그런 수싸움에 약하다.

습관적으로 칼을 주저하며 귀한 시간을 들여 더 좋은 길을 찾아내려 하고, 그 때문에 닥쳐오는 공격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해 수세에 몰리기 일쑤다.

그 때문에 무리해서 반격을 넣다가 공격을 허용하고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냥 칼싸움은 상대보다 좋은 수를 많이 두기만 하면 이기는 거야! 넌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까 시간이 없는 거고. 지도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

"그게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내 푸념에 수연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직관으로 신속한 수를 몰아치는 타입의 검수인 그녀로서는 내가 답답할 따름이겠지.

칼만 맞대면 그렇게 되는 걸 어떡해…

"그럼 시현아. 차라리 원거리는 어때?"

"원거리…?"

"왜, 활이라든지, 석궁이라든지. 멀리서 상대하는 거라면 괜찮지 않겠어? 아, 활은 가슴 때문에 안 되겠구나."

"…나도 활 쏠 수 있어. 왜 이래."

"이하하, 정말? 가로쏘기가 한계일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아무튼, 근접전이 어려우면 그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어때?"

"활이나 석궁… 으음… 일리 있긴 한데."

그렇지만 석궁은 위력과 사정거리가 클수록 장전이 오래 걸리는데다 요즘 석궁은 정교한 기계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나오기에 험하게 굴리면 망가지기도 쉽다.

때문에 석궁을 주무기로 쓰는 헌터는 흔치 않고, 대부분이 보조무기 정도로 생각하는 무기다.

…배우지도 못하는 활은 예외로 하자.

'그렇지만 사정거리가 긴 무기가 좋을 수도 있겠다는 건 나도 동의해. 근접전이 약해지더라도 부적술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을 테고, 여의치 않으면 태도를 뽑거나 발도술을 갈기면 되겠지. 그럼 무기로 뭘 쓰냐, 이게 문제인데…'

달디 단 초콜릿 향이 가득한 카페 모카를 마시면서 한껏 고심했다.

대체 무슨 무기를 써야 효율적인 거지?

고민에 빠진 내 모습을 본 수연이가 내게 제안했다.

"그럼 다 경험해보는 건 어때?"

"다 경험해봐?"

"궁도부나, 이런 데를 돌면서 아무거나 막 써보는 거야! 열심히 해보다 잘 맞으면 그대로 쓰는 거고. 어때?"

"오, 재밌겠는데? 시현아, 가자!"

"그래도 되나…? 민폐 아닐까?"

"에이, 1학년 빌보드 9위께서 하겠다는데, 그런 게 어딨어. 오히려 앞다퉈서 해보라고 권유할 걸? 빼지 말고 가보자!"

수연이와 유하가 주저하는 날 붙잡고 즐겁게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나의 동아리 순회가 시작됐다.

***

제일 먼저 도달한 동아리는 검술부.

내가 속한 동아리였지만, 샬롯과 정령부에서 열심하 노느라고 자주 들르지 못한 그곳이었다.

검도부실은 극정 아카데미 최대의 동아리답게 넓디 넓은 부실에 샤워실과 탈의실까지 딸려 있었고, 움직이는 목각인형과 절삭력 측정기 등의 성능 좋은 기구들까지 수두룩하게 배치된 공간이었다.

부원들은 그 공간에서 제각기 땀 흘리며 대련을 하거나 칼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검법을 펼치는 등의 훈련을 하며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여기를 열심히 다녔어도… 검술에 발전이 있진 않았을 테지만.'

"오, 이게 누구야! 수연이잖아! 오늘도 17대1 하러 왔나?"

"아하하! 17대1이라뇨, 애들이 오해하잖아요! 그냥 목각인형 상대하는 걸."

긴 칼을 든 검도부 부장이 수연이를 맞이했다.

내게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검도부라는 걸 까먹은 것 같다.

"시현아, 너 검도부 아니었어?"

"맞… 아니야. 난 검도부 아니거든."

여기서 "나 검도부요" 하기에는 부끄러웠기에 그냥 아니라고 하고 말았다.

친구에게 검을 맛보여주고 싶다는 수연이의 요청에 검도부장이 흔연히 허락하자, 수연이가 우리를 이끌고 테스트실에 들어갔다.

그곳엔 수많은 종류의 검들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자, 맘에 드는 거 하나씩 해봐! 검이 아니라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나도 해봐도 돼?"

"물론이지!"

대답을 들은 유하가 망설임 없이 흉악한 언월도를 골랐다.

마법진을 굴리던 그 손놀림으로 거대한 언월도를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조금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와아! 이거 맘에 든다. 근데 조금 무겁긴 하네."

"그거 갖고 장난치는 거 아냐! 검병도 무슨 연필처럼 쥐지 말고! 자, 이렇게 잡는 거야!"

평소와는 다르게 역전된 둘의 위치가 꽤 볼만했다.

나는 열심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맘에 드는 무기를 좀체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고심 끝에 평범한 글라디우스를 든 나는 몇 번 무기를 휘두르다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으… 역시 칼은 아닌 것 같아, 수연아."

"그래도 지금까지 휘둘러온 게 있는데… 아, 레이피어는 어때?"

레이피어라.

나는 수연이에게서 길고 얇은 검신을 지닌 레이피어를 건네받았다.

살짝 휘둘러보았음에도 검신이 낭창낭창 휘는 게 뭔가 묘하다.

"그건 휘둘러 베는 게 아니구, 이렇게 찌르는 거야!"

수연이가 내 손을 잡고 파지법을 고쳐준 뒤 기본 찌르기 동작을 가르쳐줬다.

찌르기라, 이건 또 재밌는 검술이다.

"으음… 이렇게 찌르기만 해야 되는 거야? 레이피어가 그렇게 약했나?"

"베는 것도 하자면 할 수 있기는 한데, 웬만해선 찌르기로 싸우는 게 좋을 걸? 아무래도 잘 부러지지 않을까?"

수연이의 설명을 들으며 허수아비에 레이피어를 찌른다.

꽤 큰 흠집이 생겼지만, 이것도 제대로 쓰기는 힘들 것 같다.

"어때? 레이피어는 맘에 들어?"

"아니… 그나저나 유하가 더 신난 것 같은데."

언월도를 고른 유하는 신나게 칼을 휘두르며 짚단을 베어내고 있었다.

아니, 짚단을 벤다기보다는 차라리 신나게 춤추다가 칼에 짚단이 걸린 거라고 하는 게 옳았다.

…나중에 싸구려 언월도라도 선물해줄까.

"아아~ 검은 재미 없네… 이제 다음 동아리로 갈까?"

"네가 제일 신나게 즐겼어, 유하야."

"후후, 들켰나?"

우여곡절 끝에 칼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우리는 다음 동아리로 향했다.

***

이번엔 궁도부.

놀랍게도, 그곳엔 이수아가 있었다.

"아앗!! 시현이잖아!! 나 죽이고 몇 등 했어?"

"나, 나? 덕분에 1등 했지."

"뭐? 정말로!? 그럼 나 1등한테 죽은 거네?"

수아는 그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꺄아, 축하해! 이게 무슨 일이야!! 솔직히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고, 고마워. 근데 넌 왜 기뻐하는 거야…?"

"응? 친구가 잘되면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그 말에 유하가 왠지 모를 샐쭉한 표정을 짓고 활 거치대로 다가갔다.

활을 들 줄 모르는 건지 연거푸 활을 위아래로 뒤집어 잡던 그녀는 마침내 엉성한 자세를 잡고 과녁에 화살을 쐈다.

투우웅… 툭.

화살은 멀리 날지 못하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궁도부원이 한달음에 달려와 유하를 질책했다.

"앗, 그거 그렇게 쏘시면 안 돼요! 옆쪽 라인으로 튀잖아요! 처음 오시면 안내를 불렀어야죠!"

"아, 죄송합니다…"

나와 수연이는 흔히 볼 수 없는 유하의 모습을 보며 쿡쿡 웃었다.

나는 수아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고 사격라인에 섰다.

전에도 심심파적 삼아 궁도부에서 활을 쏴본 적이 있었기에 익숙하게 활을 들어 과녁에 조준했다.

물론, 활은 가로쏘기 형태로 들었다.

"가슴이 커서 압박패드도 소용이 없는 애는 네가 처음이야…"

"나, 나도 억울하거든."

나는 그렇게 툴툴대고는 시위를 한껏 당겼다.

하르미아 시스템의 보정률을 올리고 과녁에 정신을 집중했다.

검술은 몰라도 집중력은 좋은 축이었기에 조준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활쏘기를 한 이유가 있다니까.'

한껏 당긴 시위를 놨다.

흔들림 없는 활대에서 사출된 화살이 9점을 꿰뚫는다.

첫 화살 치고는 무척 깔끔한 명중이었다.

"오, 잘 쏘네? 너도 나랑 궁수나 하는 게 어때?"

"…이거 제일 짧은 라인이잖아."

"아냐, 이 정도면 더 긴 라인에서도 8점은 맞출 수 있을 걸? 한 번 가볼래?"

나는 여기서 만족하고 계속 쏘려고 했지만, 수아의 재촉에 따라 조금 더 긴 라인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가로쏘기인지라 긴 거리에 있는 것을 맞추기는 상당히 어렵다.

"…5점이네! 잘 쐈어!"

"역시 멀리 안 날아가네. 이 놈의 지방덩어리만 아니었어도…"

"멀리 안 날아가는게 문제라면 장력을 더 센 걸로 바꾸는 게 어때?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인데…"

"그러기엔 지금 활도 당기기 벅찬 걸. 활을 많이 쏴본 것도 아니라서…"

결국, 활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창을 쓰는 창술부부터 철퇴 등의 둔기를 쓰는 타격부, 심지어 맨주먹을 쓰는 권투부까지…

단 한 곳도 이렇다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아, 이를 어쩐다…"

"즐거웠으니까 된 거 아닐까? 무기야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생각해보지, 뭐!"

"으음… 그런가?"

공원 벤치에 앉아 붉게 지는 석양을 올려다봤다.

1200원짜리 초코맛 아이스크림이 내 이빨에 부서지며 살살 녹아내린다.

역시 아이스크림은 초코가 최고지…!

"으움, 왜 다들 녹차를 안 먹지? 맛있는데."

"녹차는 차로 우려내서 마시는 거지 라떼나 아이스크림으로 먹는 게 아니니까."

"뭐? 그렇게 치면 김치도 생으로만 먹고 김치찜 같은 건 먹으면 안 되겠네?"

"그런가? 아무튼 녹차는 맛없어."

"힝…"

수연이가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씹으며 남은 막대를 휙 던졌다.

던져진 나무막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에 예술적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궤적이다.

'그러고보니 뭔가를 던지면서 많이 놀았는데… 멋모르고 버스카드를 던지다가 고장낸 적도 있었지.'

던진다, 던진다라…

잠깐, 던져?

"…어?"

"응? 왜 그래?"

"잠깐, 한 곳만 더 가자."

"어디 가게? 들를 곳은 다 들른 거 아니었어?"

"아니, 생각해보니 하나가 더 남았어."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동아리를 떠올렸다.

꽤 특이한 군상이 많은 그곳이라면, 해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암살부."

어쩐지 쓸데 없이 멋있는 이름을 가진 동아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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