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막간 그녀가 잠든 사이
* * *
…그렇게, 그들은 장엄한 전투를 끝내기 위해 마왕성에 도달했다.
[다음 편 보기]
"오… 오오…!"
침대에 누워 자그마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소녀가 흥분으로 몸을 떤다.
드디어 도달한 소설의 클라이맥스!!
신념과 정의를 위해 마왕의 골통을 부수는 영웅담의 절정!!!
그녀는 손가락을 떨며 소설의 다음 편을 보기 위해 화면을 눌렀다.
시대천재입니다…
'수능 9등급, 천재 마법사가 되다'는 오늘 부로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꺄아아아아아악!!!!!!!"
소녀가 괴성을 지르며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심상으로 이루어진 휴대폰이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이 깨져 나갔다.
셀레스티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침대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왜!!! 왜애애!!!!! 또 연중이야아아아아!!!!!"
핑크색으로 꾸며진 방, 수많은 서책.
빨간 침대 위에서 서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아이.
이곳은, 셀레스티의 심상세계다.
무릇 영혼을 가진 존재라면 각자의 심상세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심상세계는 대체로 영혼이 휴식을 취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내며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산만하게 나타나 혼의 기저에 깔린 무의식을 표현하기도 한다.
다페르헤이드의 지성체인 인간은 심상을 다루는 법을 몰라 꿈을 꿀 때에나 심상세계가 발현되지만, 아인델로제의 천사나 로엠의 악마라면 잠을 자면서 쉽게 심상세계를 끌어낼 수 있다.
즉, 원한다면 깨기 전까진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실컷 놀 수 있다는 말이다.
셀레스티는 연재가 중단된 소설을 읽고 말았지만.
"어째서어어어!!!! 읽을 만하다 싶으면 죄다 연중이야아!!!!!!! 작가 나쁜 놈들아아아아!!!!!!!!"
그녀의 분노에 아담한 방이 마구 흔들린다.
강력한 진동으로 이윽고 벽에 금이 갈 정도가 되자 셀레스티는 그제야 감정을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했다.
영웅담을 읽다가 심상을 무너트리는 영웅담의 악마라니,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다.
"으아아 후우, 후우 이 작가 거 다시는 보나 봐라"
그렇게 읊조린 셀레스티는 환기를 위해 커튼을 걷고 창문을 벌컥 열었다.
시원한 초원의 공기가 그녀의 머리칼을 스친다.
셀레스티의 심상세계는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넓고 푸른 들판, 곳곳에 수줍게 솟아오른 야트막한 언덕, 노란 햇빛 아래 우뚝 선 예쁜 성새
그녀는 마치 동화 속 공주님처럼 성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우 흐아 죽는다"
그녀가 내뱉는 말은 평화로운 분위기와 영 딴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창틀에 한참을 늘어져 있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그녀의 심상세계를 뭔가가 옅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트막한 초록빛 언덕 위로 짙은 보랏빛 안개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음."
영웅님이 또 악몽을 꾸나보다, 그리 생각한 그녀는 창틀에 손가락을 대고 슥 문질렀다.
그러자 초원을 좀먹던 보랏빛 안개는 티슈에 닦인 케첩마냥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악몽은 계속 지평선 너머에서 넘치듯이 흘러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셀레스티가 혀를 찼다.
"치. 쓸데 없이 영혼만 깊어가지고"
일단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셀레스티의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정시현의 영혼이 이상하리만치 깊다곤 해도 악몽 따위로 악마인 그녀의 심상세계를 더럽힐 수 있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악몽이 흘러나온다는 건 어지간히도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다는 뜻.
그래서, 보다 못한 그녀는 소설 읽기를 때려치우고 성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지간하면 놔두는데 저 정도면 중간에 깨시겠지. 악몽 따위가 영웅님의 휴식을 방해하다니!'
셀레스티의 등에 걸린 큰 망토가 펄럭인다.
영웅담의 악마답게, 그녀는 미국의 슈퍼히어로처럼 양팔을 내밀고 허공을 슝 날아 지평선의 끝에 다다랐다.
그녀의 심상세계 너머에는 정시현의 무의식이 빚어낸 악몽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볼을 부풀린 채 단호한 팔짱을 낀 셀레스티는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다 천천히 심상세계를 걷어냈다.
그러자 세계의 벽이 벌어지며 정시현의 심상세계가 나타났다.
그 안을 본 셀레스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울의 하늘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달군 쇠처럼 녹아내린다.
그와 대조되게 땅에서는 녹색 넝쿨이 마천루를 뒤덮으며 사람들을 붙들어 으스러트린다.
처절하게 저항하던 헌터가 잿빛 해골의 파도에 빨간 육편으로 찢어지고, 신경이 죽지 않아 근육이 아직 꿈틀대는 뼈는 아귀처럼 달려든 언데드의 몸에 마구잡이로 쑤셔박힌다.
저 멀리서는, 제 다리 대신 인간의 팔다리를 단 거대 바퀴벌레가 민간인의 머리만 쏙쏙 골라 씹어 삼킨다.
그리고
"욱 우욱!"
셀레스티가 입을 틀어막으며 틈을 닫았다.
망토에 깃들어 소화기관이 없는 보낸 시간이 근 수십년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짙은 구토감을 느꼈다.
"욱 으, 하아 무슨!"
있지도 않은 토사물을 뱉어내는 행동을 취하던 셀레스티가 고개를 들어 퍼져나가는 보랏빛 안개를 본다.
영웅님은 대체 어디서 저런 것들을 본 걸까.
아니, 애초에 대체 왜 그런 꿈을 꾸는 걸까.
그녀가 알기론 정시현은 아직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하다.
이마에 손을 대고 거친 숨을 뱉던 그녀가 다시 손을 뻗어 세계의 틈을 잡는다.
두렵긴 하지만, 영웅님이 저런 꿈을 더 꾸게할 수는 없다.
아무리 끔찍하고 절망이 가득해도 결국 인간의 꿈이니, 고위 악마의 힘이면 손쉽게 없앨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 셀레스티가 각오를 다지고 틈새를 열었다.
이번엔, 겁먹지 않고 그 안으로 돌입했다.
여전히 희망 없는 세상이다.
그녀는 용의 화염으로 벌겋게 타오르는 하늘을 날아 심상세계의 가장 위로 향했다.
세계의 정점에서 영웅담을 울리려던 셀레스티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와 함께, 세계의 끝이 쩍 갈라진다.
그 틈새로 짙고, 짙고, 짙은 어둠이 내려온다.
무한히 어두운, 그러나 두렵지는 않은.
그럼에도 경외스럽고, 때문에 잠겨들고 싶은.
짙은 어둠이 손아귀를 이루며 악몽을 꽉 쥐어 뜯는다.
그렇게 악몽이 부서졌다.
"."
셀레스티는 칠흑의 손아귀에 잠시나마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것에 옅은 동요를 느꼈다.
비록 지금은 어둠을 등졌지만, 고위 악마 중에서도 거의 정점에 다다랐던 그녀에게 경외감을 심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셀레스티 당신이군요."
굳어버린 영웅담의 뒤로 어둠이 천천히 나앉는다.
곧 어둠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이루며 셀레스티의 어깨를 살포시 감쌌다.
어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칠흑여제, 라이나였다.
"흐익 힉"
"너무 두려워하실 것까진 없지 않나요?"
"까, 깜짝 놀랐잖아!!!"
셀레스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팔을 쳐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펴서 겁도 없이 삿대질을 했다.
"너 뭐야!!! 내가 하려고 했거든!!! 왜 갑자기 끼어든 건데!??"
"왜 그러시나요?"
라이나가 편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셀레스티는 잠시나마 풀죽음을 느낀 것에 성을 내듯이 허공에서 방방 뛰었다.
"넌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거야!! 분명히 나보다 훨씬 먼저 알아챘을 텐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 연인이 슬퍼하는 건 저도 가슴이 아팠지만요."
"여, 연인!? 누구 맘대로!! 영웅님이 누구 맘대로 네 연인이야!!!"
"매일 저의 상냥하고 격렬한 포옹을 받고 계시니 틀린 말은 아니죠."
그리 말한 라이나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볼을 감쌌다.
영락 없이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야, 야!! 감히 우리 영웅님을 동성애자로 만들 셈이야!??"
"글쎄요. 파토스적 사랑도 괜찮지만 연인께서 원하신다면 에로스적 사랑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아니!!! 그, 그딴 소리하지 말고!!!! 이게 미쳤나!!!! 영웅님은 내 파트너야!!!!"
"누가 아니라고 했나요? 당신은 파트너일 뿐이고 저는 적법한 연인이죠."
"야!!!!"
듣다 못한 셀레스티가 망토를 붙잡고 영웅담을 울리려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둠을 등진 악마에 불과한 자신이 대악마에 근접한 힘을 가진 년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안 들었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자고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후우, 알겠어. 난 절대 인정 못하지만! 일단 그건 제껴두고 날 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죠."
"경고? 네가? 나한테!?"
셀레스티는 억눌러 놓았던 흥분이 팍 터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친 년이 대체 뭐라 하는 거지?
그녀가 어이 없어하든 말든, 라이나는 눈을 엷게 뜨고 셀레스티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히 연인의 파트너라고 자처하며 파렴치하게 등에 붙어다니는 악마라니 당신이 생각해도 수상하지 않나요?"
"수사앙!? 영웅님이 직접 같이 가자고 하는 걸 분명히 봤을 텐데!!!"
"글쎄요. 모종의 수로 순진한 연인을 속여먹은 비열한 사기꾼일지도 모르죠."
라이나가 천천히 손을 뻗어 셀레스티에게 향했다.
셀레스티는 서둘러 몸을 빼려 했지만 뻗쳐오는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셀레스티를 무용하듯이 양 팔로 꽉 껴안은 라이나가 느지막히 말했다.
"당신 분명히 경고할게요."
"놔, 놔아!!"
"제 연인에게 수상한 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꽈악, 하고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순간 허리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셀레스티가 급히 영웅담을 울리며 그녀를 거칠게 밀어 떨쳐냈다.
"미 미친 년이!"
"후후.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이상한 짓만 안 하시면 그럴 일은 없으니까."
"."
셀레스티는 말 없이 공간을 감싼 칠흑에 주먹질을 가했다.
그러자, 끝도 없어보이던 어둠이 깨져나가며 셀레스티의 심상세계를 드러냈다.
그녀는 망토를 휘날리며 천천히 심상세계의 벽으로 다가갔다.
"잘 가요, 셀레스티."
"나도 분명히 경고하는데."
"무슨 경고인가요?"
어느새 예의 옅은 미소로 돌아간 라이나가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셀레스티는 그 모습에 짜증을 느끼며 툭 내뱉었다.
"영웅님한테 다 이를 거야."
"네?"
"나한테 질투한다고 다 이를 거야!!!!"
셀레스티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심상세계로 도망쳤다.
그 선언을 들은 라이나는 잠시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얼굴을 붉혔다.
질투라는 말이 머리를 뎅하고 울렸기 때문이다.
"질투?"
자신이 셀레스티에게 질투라니.
그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쵸. 저랑 상대가 안 되는데요."
암만 그래도 자신이 겨우 질투 때문에 그녀를 위협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겨우 그딴 걸로 그 요망하고 천박한 꼬맹이를
"아니에요. 질투."
자신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녀였다.
***
"으 흐아암 잘잤다"
진짜요? 잘 잤어요?
"으응? 무슨 소리야, 그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셀레스티가 이상한 소리를 해온다.
내가 잘 잤다면 잘 잔 거지, 진짜 잘 잤냐고 묻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진짜 잘 잤어요? 진짜로??
"잘 잤지 왜?"
악몽 같은 건?
"악몽? 우음 몰라. 듣고보니 무슨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몽롱한 정신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뭔가 있던 것 같기는 한데
"아 기억 났다. 뭔가 날 안고 자장자장해주는 그런 거였는데."
네에!? 이, 이 요사스러운 게!
"?"
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암만 물어도 삐진 체를 하며 알려주지 않길래 그냥 관두기로 했다.
자기가 급하면 알려주겠지, 뭐
"자아, 오늘도 하루를 시작해볼까"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