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45화 (45/119)

〈 45화 〉 무검희, 가소희 (2)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가소희와의 만남이 다가왔다.

그 장소는 친구들과 들른 적이 있던 아카데미 근처의 카페였는데, 우리는 약속시간보다 상당히 일찍 도착해버린 터라 간단한 간식을 주문하고 시간을 적당히 보내는 중이었다.

녹차 무스케이크를 포크로 푹 떠먹은 수연이가 턱을 괴더니 무척이나 피곤해보이는 표정으로 하품을 내뱉었다.

"흐, 으아아암 졸려어"

"어젯 밤에 뭘 했길래 그렇게 졸려하는 거야? 밤 샜어?"

"으응 기대돼서 한숨도 못 잤어어 어떻게든 잤어야 했는데"

"후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숨도 안 자면 어떡해, 빨간 검사님."

곁에서 내 초콜릿 티라미수를 뺏어먹던 하르미아가 작게 웃었다.

초콜릿이 묻은 입술을 느직하게 굴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티라미수의 맛이 마음에 든 듯 했다.

그냥 뺏어먹는 게 좋은 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티라미수를 하르미아에게 다 빼앗길세라 양껏 떠서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누텔라를 방에 박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생으로 퍼먹을 정도로 단맛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비통한 일이었지만.

내가 하르미아를 가소희와의 만남에 불러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내가 가소희를 완전히 믿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이다.

가소희는 미완성이었던 설정의 틈에서 등장한 정상급 헌터인 만큼,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필히 주의해야할 인물이다.

편지와 하르미아의 태도를 보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가소희가 악인에 가까운 성격이라면 수연이와 나를 겁박하고 죽음의 무도만 쌩하니 가져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꼭 저런 과격한 상황이 아니라더라도 천이백억 상당의 물건을 주고받는 이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너무 조심스러운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내가 모르는 요소는 일단 잠재적 위협으로 생각하는 게 옳을 테니까.'

또한, 하르미아와 나의 관계를 부각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뜯어낼 수도 있을 테니 그녀를 부르지 않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근데 그 마법사 친구는 어디 갔어? 너희랑 항상 붙어다니던 애 있잖아."

"아, 편지에 당사자끼리만 모였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어서"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혀로 할짝인 하르미아가 눈가를 휘었다.

"그럼 나는 왜 불렀을까? 나도 외부인인데?"

"이모님이 외부인은 아니죠. 애초에 하르미아 님이 없었으면 이 자리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흐응, 그래? 그럼 그렇게 치지, 뭐. 혹시 기대할까봐 말하는데, 딱히 누구 편을 들어주진 않을 거야. 대충 중재자 위치라고 생각해줘."

그리 말한 하르미아가 수연이의 디저트에 포크를 향했다가, 접시에 놓인 메뉴를 확인하고 멈칫거렸다.

자고로 음식이란 뺏어 먹는 게 천하제일미味라지만 녹차 케이크 따위의 괴식은 예외라는 걸까.

포크를 들고 머뭇거리는 하르미아를 본 수연이가 그녀에게 접시를 밀며 호의가 듬뿍 담긴 웃음을 띄웠다.

"한 입 드실래요? 여기가 녹차메뉴를 엄청 잘 만들더라구요!"

"아니야. 난 녹차는 별로라서."

"네에!? 하르미아 님이 녹차를 싫어하는 어린이 입맛이었다니!"

"수연아. 넌 밥에서 콩이나 골라내지 마."

"응? 그게 뭐가 문제야? 쌀밥에서 콩이란 이물질을 골라내는 게 뭐 어때서! 난 임오군란 시절 군인이 아니라구!!"

남은 티라미수를 먹던 하르미아는 수연이의 되도 않는 비유를 듣더니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테이블 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쯤, 누군가가 조심스레 카페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모자와 마스크로 무장한 여성은 까만 머리칼을 이리저리 흔들며 누군가를 찾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어, 혹시 수연 학생이랑 시현 학생?"

"아, 네! 그쪽은 가소희 헌터님 맞으시죠?"

"네에 반가워요."

캡모자의 챙을 살짝 들어 아름다운 눈매를 드러낸 가소희가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진 밖에 못 본 나로서는 딱히 와닿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수연이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아아아아!!!! 무검희다!!!!!!"

"자, 잠깐,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면"

"헌터니이이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외친 수연이가 가소희에게 덮치듯이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수연이를 껴안게 된 가소희는 울상을 지으며 황망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한국 칠성이 등장했다는 소식에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어느새 환상으로 결계를 쳐 공간을 분리한 하르미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휴, 이 빨간 친구가 일을 벌릴 줄 이미 알고 있었지."

"누, 누구 선배님!?"

"오랜만이네. 이게 며칠만이야."

"진짜로 며칠 밖에 안 됐거든요. 그보다 여긴 어쩐 일로?"

"우리 조카님이 같이 와달라고 했거든.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자리를 비켜줄까?"

"아니에요. 선배님한테 숨길 의도도 없었고요."

가소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아티팩트로 위장되었던 검은 머리칼이 연분홍빛으로 변하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다.

두루마기와 검은 없었지만 이전과 달리 가소희라는 걸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꺄아아아!!!! 예뻐요!!!!"

"저기, 잠깐 떨어져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 불편한데"

"맞아, 수연아. 당황하셨잖아! 빨리 이리 와."

가소희의 허리에 안겨든 수연이를 억지로 떼어냈다.

얘는 왜 이리 앞뒤 안 재고 행동하는지 원.

내가 눈짓으로 사과하자, 가소희는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불쾌한 티도 내지 않는 걸 보면 성격은 꽤 좋은 듯 싶었다.

"소희는 은근히 내숭스러워. 친해지면 위아래도 없다니까."

"위아래도 없다니요! 애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얼굴에서 환상을 지운 하르미아의 짓궂은 말에 가소희가 손을 내저었다.

수연이는 그 행동마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 봤지만.

"헤에 언니이 멋있어"

"정신차려, 수연아! 팬미팅 온 거 아니거든?"

"천이백억 짜리 정성을 담은 사인 하나만 부탁해요!!"

"절대 안 돼!"

얘가 졸려서 그런가.

아주 정신이 혼미해보인다.

자리에 앉은 가소희는 벗은 모자를 쓰다듬으며 눌린 머리카락을 슥슥 정리했다.

"저는 괜찮아요. 머리 색이 워낙 특징적이라서 이런 상황은 꽤 많이 겪었거든요. 이 모자를 얻기 전까지는."

"잠깐. 그거 머리카락 색을 바꿔주는 건가요?"

"맞아요. 범죄조직을 소탕하면서 놈들이 키우던 큰 카멜레온 괴물을 잡은 적이 있는데, 그 녀석의 가죽으로 만든 거에요."

그 말에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범죄조직이 키우던 카멜레온 괴물과 그 가죽으로 만든 색을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장비.

그런 건 두 번째 재앙이 지나가고 나서 발생하는 시나리오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 시나리오란, 카타스트로피의 준동.

무정부주의 테러단체인 카타스트로피가 자연역습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사회혼란을 노려 공공기관 등지에 테러를 일으키는 시나리오다.

제대로 막지 못하면 단숨에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라 그 전에 카타스트로피를 무너트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걸 가소희가 미연에 막아버린 것이다.

나는 가소희에게 큰 호감을 느끼며 수연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머, 멋있어"

"네? 범죄조직 소탕이야 다른 헌터들도 하는 건데요, 뭘. 그렇게 감탄하실 것까지야"

"맞아. 특히 얘는 공무원이라서 보수도 제대로 못 받거든. 그렇게 선망의 눈길을 보낼만한 일은 아니지."

"그, 그래도 철밥통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철밥통이라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인데!"

"한국 칠성이란 애가 공무원 따위나 하면서 철밥통이라 자부심 가지는 게 말이나 되니? 그냥 너도 헌터협회 때려치고 프리랜서로 뛰라니까"

하르미아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가소희를 바라봤다.

가소희는 애써 그녀를 무시하고 우리에게 눈을 돌렸다.

"흠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 좀 보여줄래요?"

"앗, 네에!"

수연이가 바닥에 놓여 있던 상자를 들어 탁자에 올려놨다.

상자 안에는 새빨간 죽음의 무도가 번쩍이며 귀기를 흘리고 있었다.

가소희는 짐짓 감격한 눈으로 죽음의 무도를 손으로 훑었다.

"세상에 이걸 이제서야 만나보는구나 완전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천이백억 짜리 사인만 있으면 족하죠!!"

"아하하, 그런가요 이런 분들한테 신세를 지게 되다니."

죽음의 무도를 확인한 가소희가 품 속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그녀는 우리에게 그 봉투를 내밀며 머리를 숙였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말 감사해요. 다른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 주세요!"

흰 봉투는 적당히 두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과연 얼마가 들어 있을 것인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돈이 아니긴 했지만,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연이가 손을 스윽 뻗어 봉투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봉투 안을 힐끔 봤다.

얼핏 비친 봉투 안은 흰 수표로 가득했다.

"이건!"

수연이가 손을 뻗어 수표를 꺼냈다.

0이 하나, 둘, 셋, 넷

여덟.

"어, 억!!"

"잠깐만! 이거"

수표는 총 10장.

무려, 10억이 들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10억이다아아아아!!!!!!"

수연이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아주 테이블에 올라가서 춤이라도 출 기세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나도 이제 부자다아아아아!!!!!"

"넌 쪼잔하게 10억이 뭐니? 나였으면 50억은 줬을 텐데."

"이것도 꽤 무리한 거거든요? 저는 선배님과 다르게 공무원이라서 돈이 없네요!"

하르미아의 기준에는 꽤 못 미치는 듯 했지만, 수연이는 생전 처음 보는 금액에 열심히 춤을 추었다.

그렇게 양손에 5억을 부채꼴로 쥐고 흔들던 그녀는 내게 수표 다섯 장을 척 내밀며 헤헤 웃었다.

"자!!"

"나, 나도 주는 거야?"

"응? 내가 준다고 했잖아! 너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도 반이나 떼줄 줄은 몰랐는데"

"반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네 덕분인 걸!"

나는 엉겹결에 수표 다섯 장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경제관념 따위 없는 수연이였지만, 아무튼 그 덕에 5억을 벌었으니 뭐라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소희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멋쩍게 웃다가 죽음의 무도를 챙겼다.

수표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직 원하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혹시 다른 것도 들어주실 수 있나요?"

"아, 네! 뭐든 말만 하세요."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레 부탁했다.

"헌터님의 검무요, 혹시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가소희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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