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무검희, 가소희 (3)
* * *
"검무를 가르쳐 달라고요? 으음…"
가소희는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 허리춤에 걸린 태도를 보며 볼을 긁적이다 물었다.
"검무라…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냥, 더 강해지고 싶어서요."
"이건 배우고 싶다고 무턱대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닌데요…"
가소희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꺼냈다.
그것은 웬 황동빛의 양날검이었는데, 작은 소매 안에서 나왔다고는 힘들만큼 길게 뽑혀나왔다.
"와아아!!! 그거 월왕구천이에요??"
"네. 월왕구천이에요. 그냥 날 좀 잘 드는 칼에 불과하지만."
[월왕구천(S)]
월왕구천?王?? 자작용검????. 수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칼날은 패왕의 위엄과 같을지니.
다른 부가효과는 없지만 기본 스펙이 손에 꼽힐 정도로 좋은 검이다.
원래는 어디 부잣집에 장식용으로 박혀 있어야 했지만, 이번엔 그녀가 가져간 듯 했다.
가소희는 검을 몇 번 고쳐잡더니 칼날에 검기를 씌웠다.
다름아닌 스피릿으로 만들어진 검기를.
"검기…?"
"네, 검기에요. 검기 치고는 상당히 여성적이지 않나요?"
그녀의 말대로, 가소희의 검기는 짙은 복숭앗빛이었다.
검성의 핏줄 같은 예외적 경우를 제하면, 검기는 그 어떤 빛깔의 마력을 쓰더라도 항상 푸른색으로 나타난다.
적마력을 써도 검기는 푸르고, 녹마력을 써도 검기는 푸르다.
마치 하늘이 푸른색인게 당연한 것처럼.
검기를 압축시켜 검강으로 나아가면 푸른색은 자신만의 색으로 변화한다.
그 색은 정류되었던 스피릿의 흔적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검강엔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힘과 특성이 깃들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릿으로 직접 검기를 만들면 어떨까.
스피릿은 마력에 비해 무척이나 거친 힘인지라 응축시켜 검기를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그 난이도는 마력으로 검강을 빚는 것에 필적할 터.
하지만, 가소희는 당당하게 스피릿으로 검기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가 눈 앞에 있다.
스피릿으로 만든 검기는 검강과 비슷하게 혼의 특성을 담아낼 수 있다.
그 강도는 검강에 한참 못 미치기야 하겠지만.
"시현 학생은 스피릿으로 검기를 피울 수 있나요?"
"…아뇨."
"그럼 화편검무花???를 제대로 배울 수 없어요. 무속적 의식이 강한 검무에 공격성을 추가하려면 검기가 필수적이었거든요."
그녀의 검에서 짙은 복사꽃의 향이 퍼진다.
매력적인 도향??이 공간에 퍼지며 마음을 움직인다.
이래서 그녀의 별호가 엔슬레이버enslaver였던가.
조용히 그녀의 검기가 풍기는 향을 맡고 있자 가소희는 무안한 헛기침을 하며 검기를 꺼버렸다.
어찌 보면 혼의 향기를 직접 맡은 것이나 다름 없으니 부끄러울만도 한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제 검무는 배우기 힘들 거에요. 죄송해요…"
나는 그저 허무하게 웃고 말았다.
가뜩이나 검에 재능도 없는데 스피릿으로 검기를 피워야 한다니.
이번 생에 그녀의 검무를 익히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가소희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신 역으로 제안을 해왔다.
"대신이라고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검기를 피울 수 있게 도와주는 거라면 가능해요. 어떤가요?"
"그건… 제가 검술에 재능이 없어서요. 스피릿으로 검기를 피울 재간이 안 돼요."
허탈한 어투로 내뱉은 말에 가소희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더니 복숭앗빛 스피릿을 천천히 흘려넣었다.
깊은 바다에 긴 닻이 내리듯이 천천히, 묵직하게 내려가는 스피릿이 혼의 크기를 가늠한다.
"음, 으음… 꽤 괜찮네요. 끈적하면서도 조금은 정적인게… 늪 같기도 하고요."
"…늪이요?"
"네. 꽃으로 나타내면 양귀비? 그것도 자줏빛 양귀비겠네요. 난잡하게 흐르는 스피릿이 아닌 이상은 검기를 익히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스피릿의 형태가 검기의 발현이랑 무슨 상관이라는 걸까?
그런 것들은 일단 검기가 피어야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의뭉스러운 눈길로 가소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손목에서 스피릿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기를 피우는데에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음… 무기를 휘두르는 숙련도랑 의지의 응집, 그리고 마력의 양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죠. 셋 중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검기가 발현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죠. 교과서에는."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알려진 극정 아카데미의 교과서를 까버린 가소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검기란 마력을 뭉쳐서 압착시킨 것에 불과해요. 무기의 숙련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기를 휘두를 때 검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고, 의지의 응집은 말하자면 노하우가 없어서 필요한 것에 불과해요. 자전거나 자동차를 처음 몰 때는 엄청 긴장하면서 타잖아요? 무언가 실수라도 할까봐. 실제로 그 때는 긴장을 안 하면 큰일 나기도 하지만요. 검기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처음 발현할 때는 긴장과 집중이 필요하다, 이 정도지."
그리 말한 가소희는 침을 삼키더니 계속 말했다.
"스피릿으로 피우는 검기는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마력보다 거칠어서 검기로 뭉치기 힘들긴 하지만, 일단 발현시키면 정교한 검술 따위는 필요 없어요. 저희들끼리 얽혀서 흩어지지 않거든요. 비유하자면 레고로 쌓은 성과 쇠사슬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레고로 쌓은 성은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쉽사리 무너지지만, 쇠사슬은 만들기 힘들어도 웬만해선 부서지지 않죠. 노하우야 알아가면 되는 거고."
그녀는 접시 위의 포크를 들어 검기를 피워올렸다.
그런 뒤,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월왕구천으로 힘껏 내리쳤다.
월왕구천의 예기를 견디지 못한 포크가 반으로 잘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분홍빛으로 빛나는 검기가 흐트러짐 없이 월왕구천의 예기를 받아내고 만 것이다.
"이건…!"
"이건 제 경지가 뛰어나서인 것도 있지만, 보시듯이 스피릿으로 틔운 검기는 서로서로가 사슬처럼 꽉 아물려서 쉽사리 흩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검기를 흐트리지 않으려는 검술 따위는 필요 없죠. 중요한 건 검기를 피울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한 스피릿을 가졌느냐, 이거지."
그녀는 임무를 마친 월왕구천을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월왕구천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소매 속에 용케 모습을 감췄다.
"어때요? 배울 마음이 드셨어요?"
"…진짜로 가능한 거죠?"
"네. 그 정도도 못할까요. 이래봬도 한국 칠성인데요. 그리고… 세계 유일의 혼검기 사용자이기도 하고요."
이에 대해 자세한 설정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걸 혼검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영혼으로 빚은 검기라… 잘 어울리기는 한다.
"검기를 배우는데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시현 학생이 스피릿을 얼마나 잘 제어하는지에 달렸죠?"
"혹시 다 익히면 검무도 가르쳐주시나요?"
"네? 그건… 글쎄요? 조금 힘들 수도…"
"흠흠."
가소희가 머뭇거리자 하르미아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 이제 슬슬 후계 생각도 해야지. 그거 초야에 묻히게 둘 순 없잖아?"
"무, 무슨 벌써 후계에요! 저 아직 스물여섯이거든요!? 그리고 제자와는 운명적인 만남을 가져야…!"
"이것만 해도 운명적인 만남이지. 이게 운명적인 만남이 아니면 너 그거 돈 주고 사야 돼. 천이백억."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하르미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휴, 답답이. 혹시 그게 네 밥줄이라서 단단히 잡고 있는 건 아니지? 소희는 마법소녀 대장하고 다를 거라 믿었는데."
"아니에요! 제가 그럴 사람이면 공무원을 안 했지! 퓨어하트랑 비교하지 마요!"
"그럼 가르쳐 줘. 닳는 것도 아닌데."
주하연을 들먹이면서 하르미아가 강짜 비슷한 것을 부리자, 가소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소희는 얼떨결에 돈과 검기와 검무를 다 퍼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모임이 끝나고, 나는 검기와 검무의 기본을 배우기 위해 가소희와 함께 헌터협회의 차를 타고 작은 던전에 도착했다.
난이도는 B급 헌터가 무난히 처리할 정도의 던전이었는데 다른 말단 직원이 처리할 걸 그녀의 지위와 권위로 뺏어 왔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니 경계하자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녀가 딱히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휴우… 힐 찾으러 왔다가 제자까지 붙이고 가는 신세라니…"
"그런데 혼검기를 가르쳐주겠다는 시점에서부터 제자 확정인 거 아니에요? 세상에서 자기 밖에 못 쓸거라면서요."
"그렇다고 혼검기가 제 거라곤 생각 안 해요. 혼검기를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스피릿을 꽉꽉 눌러다 담은 것에 불과한데요, 뭘. 학계 쪽에서는 이미 발견된 현상이기도 하고요."
헌터협회의 직원에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서울 외각의 슬럼가.
최근 이 근방의 하수도에 바다에 사는 괴물 무리가 유입되면서 완전히 난리가 났다고 한다.
강력한 괴물은 아니고 식용으로 사용되는 약한 괴물이라 다행이지, 만일 스몰 크라켄 따위의 강력한 괴물이었으면 S급 헌터가 움직여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끔 여기서 그런 것들을 길러보겠다고 들고 오는 애들이 있어요. 양식을 안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가소희는 약간 짜증스럽게 내뱉으면서 죽음의 무도의 굽으로 맨홀 뚜껑을 치우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어둠이 우글대는 하수도로 뛰어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