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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49화 (49/119)

〈 49화 〉 절대강자 (1)

* * *

사살을 위해 셋에서 넷 정도의 S급 헌터가 필요한 괴물을 재앙이라 부른다.

차원충돌 초기에는 하나하나의 재앙이 말 그대로 자연재해나 다름 없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고, 한 번 지나갔다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하지만 추후 인간에게서도 강자가 속속들이 나타나며 재앙이라 불리는 괴물들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 힘을 잘 활용한 다섯 나라만이 세상에 남은 지금의 시대가 만들어졌다.

다만, 다페르헤이드의 시나리오에서 재앙이란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앞서 설명한 그것보다 훨씬 무겁다.

단순히 강력한 재앙을 칭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닥치는 멸망의 위기를 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니.

그 중 하나라도 막지 못하면 인류는 즉각 무너지고 만다.

때문에, 주인공은 열심히 구르며 인류를 위협하는 재앙을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게 다페르헤이드의 목표다

"."

부질 없는 과거회상을 하던 여성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주변은, 무언가 타고 남은 잿더미로 가득했다.

이따금씩 보이는 콘크리트 기둥과 녹아내린 철골만이 이곳이 큰 도시였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생기 없는 대지 위를 하염없이 걷던 여성이 공허한 눈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세기의 헌터들을 육성하던 극정 아카데미도,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던 헌터협회도.

무너져서 잿더미가 된 그 위를 앉는다.

­ ──────!!!!

품 속에서 버너를 꺼내던 여성의 귀로 포효가 들려온다.

저 멀리서, 붉은 하늘 너머에서, 용이 맹렬하게 운다.

여성은 무시하고 냄비를 마저 꺼냈다.

"."

부적을 적어 버너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물을 채운다.

물이 끓으면 라면스프와 면을 넣고, 만드라고라를 뿌리채로 푹 담근다.

닥쳐오는 재앙에게서 모든 인연을 잃은 주술소녀는 가끔 이런 식으로 무검희를 기리곤 했다.

익어가는 라면을 보며 정시현은 생각했다.

이 부서진 세상에도 엔딩은 오는가, 이런 세계에서 홀로 배드엔딩을 마주한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 오는가.

글쎄. 그녀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딴 건 몇 년을 고민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고민이 중요할까.'

이제 그녀는, 그 모습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 막바지에 다다라 있다.

팔을 휘감은 붉은 망토에는 더이상 귀여운 악마가 살지 않고, 그녀의 가슴에는 칠흑의 사랑이 조각조각 부서진지 오래지만.

홀로 남은 정시현은 당당하게 끝을 마주할 수 있었다.

­ ──────!!!!!!

칠흑색 비늘의 고귀한 자태.

한국의 네번째 재앙이자 세상에 종언을 고하는 메시아.

마지막 재앙, 먼더베인이 붉은 멸겁으로 하늘을 녹이며 날아온다.

위대한 파괴자 앞에서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올리던 정시현은 묘한 후련함을 느끼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용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먼더베인이 세상을 침범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중한 이들이 검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던 장면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미숙했던 주술소녀는 용을 안다고 생각했고,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와 한참 달랐기에.

그렇게 그녀는 누구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아 비로소 이 자리에 선 것이다.

대악마를 죽이고, 정령왕을 없애고, 대천사를 찢으며.

때늦은 권토중래????로.

아름다운 비늘이 자세하게 보일 때쯤, 어느새 라면을 깔끔하게 비운 주술사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왼손은 푸른 번개를 품었고, 오른손은 용살의 검을 들었다.

마지막 영웅을 위한 광시곡이 울리고, 피어오른 일곱 날개가 용의 신위에 대적한다.

주술소녀가 무너진 세상의 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최종장이야, 셀레스티."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문자의 파도와 함께, 최후의 인간이 벼락을 내던졌다.

***

­ 창을 주우러 가겠다구요? 웬 창을 주워요? 무슨 창이길래?

"그냥 창은 아니고, 번개 뿜는 투창이야. 이번 방학에 주우러 가야지."

가소희와 헤어진 후, 암살부를 들렀다.

시간이 늦어서 나 밖에 없긴 했지만, 그런대로 지하 연습장에서 열심히 투창을 연습하고 있었다.

몸을 회전시키며 창에 관성을 싣고 힘껏 집어던진다.

손을 떠난 투창은 날아다니는 과녁에 정확히 박혀들었다.

"아, 좋아. 쉽네. 이걸 왜 못하게 한담."

­ 자고로 투창은 창 쓰는 애들이 필살기로 쓰는 거라 배웠는데

"창수가 창을 던져? 그거 맞출 수는 있나?"

창수가 창을 던진다라, 자기 무기를 집어던지는 것 만큼 미련한 게 또 있을까.

차라리 창을 다섯 개씩 메고 다니는 거라면 몰라도.

셀레스티가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제 품 속에서 접이식 투창을 꺼내 손에 쥐여줬다.

얇은 쇠막대의 단추를 눌러 긴 투창으로 변형시킨 뒤, 대충 돌리다가 발을 딛고 한 바퀴 돈 뒤 창을 내던졌다.

이번에도 과녁의 중심을 깔끔하게 꿰뚫었다.

­ 오! 이거 진짜 따로 연습할 게 없겠는데요?

"아직 근육이 약해서 파괴력은 세지 않네. 엄청 멀리 날아가지도 않고."

­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근육이야 키우면 되죠!

셀레스티가 낙관적으로 말하며 천을 휘둘렀다.

그 말에 씁쓸히 웃으며 손목을 매만졌다.

손목이 다 시큰한 걸 보니 어지간히도 많이 던졌나보다.

시큰대는 손목을 부여잡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평소라면 반대쪽 손으로 던져보거나 했겠지만 오늘은 이만 일찍 자야 했으니.

"가자."

­ 평소랑 다르시네요? 그렇게 던져대시더니. 벌써 질린 건 아니겠죠?

"아니, 내일은 랭킹전을 좀 돌릴 셈이라."

­ 랭킹전을 돌려요!? 이럴 수가!! 연패행진하고 다시는 안 하시는 줄 알았는데!!!

"연패행진이라니 겨우 3연패거든."

언제부턴가 매칭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일명 닷지 행위가 금지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고 매칭을 돌렸던 나는 재수도 없이 최우수 학생을 세 번 연속으로 만나 내리 세 번을 지고 도망치듯 나온 적이 있다.

아무리 랭크대전이 빌보드와 관련이 없다지만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웠으므로.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살짝은 다르다.

내 전투스타일이 크게 바뀜에 따라 타 학생들이 나에 대해 분석했던 게 전부 쓸모 없어져버렸으니.

나는 그저 꽃을 꺾듯이 방심하는 놈들의 머리를 취하면 될 뿐!

"그리고 내 전투는 모니터에 방송될 거야."

­ 방송돼요? 영웅님 최상위권 아니라서 안 되지 않아요? 최상위권이랑 매칭되는 거라면 또 몰라

"최상위권을 저격해서 돌리면 되지."

­ 네에!? 대체 무슨 배짱이에요!? 암만 그래도 최상위권은 리스크가 클 텐데!

물론이다.

내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해도 패배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으니 리스크가 크긴 하지만, 이기기만 한다면 많은 점수를 챙겨올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노리는 '선전'의 효과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테니.

'내일이 기대되는 걸.'

기대해도 좋아, 샬롯.

***

랭킹전은 입학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개인무구를 허용한다.

상대를 단번에 죽일 각오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한데, 무대에 순간불사장치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고 아가페의 사제가 항시 대기 중이라 크게 위험하지는 않은 까닭이다.

나는 5억이라는 거금이 생기긴 했지만 새로운 장비를 바로 마련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근처 상권에서 사는 건 과도하게 비싸기도 하고, 크게 질이 좋다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 번 제대로 써보겠네.'

일전에 샀던 검은 외투를 몸에 걸쳤다.

안에서 암기들이 쩔그럭 대는 소리가 무겁다.

"진짜로 이기실 수 있는 겁니까?"

"왜 못하겠어. 날 뭘로 보고. 그리고 쟤 한 번 이겼던 애야."

"그건 환상세계 안에서의 얘기 아닙니까. 무대 위에선 어떨지 모르는데. 그리고 졌다가는"

나름 현대적인 디자인의 활을 든 샬롯이 수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될까봐 걱정한다기보다는 자기 선거운동에 대한 우려가 앞서는 거겠지.

"됐어. 내가 쟤한테 지더라도 우리 평판이 내려갈 일은 없거든. 기본 순위 차이가 나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선거철이 아닙니까. 당연한 패배라도 유권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샬롯이 소심하게 컴파운드 보우의 도르래를 만지다가 포옥 한숨을 쉬었다.

일개 반장선거에 선거철이니, 유권자니 하는 것도 웃겼지만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야. 나 뿐만 아니라 너도 이겨야 되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샬롯의 자신감 없는 대답에 어깨를 두드려주곤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련장 벽 근처에 마련된 벤치에서 천의린이 신발끈을 매고 있었다.

나는, 이번 랭킹전에서 천의린을 저격할 거다.

Z반 반장의 유력한 후보인 천의린을 모두가 보는 랭킹전에서 쳐부순다면 그만큼 샬롯과 내가 뽑힐 확률은 올라간다.

아무리 반장선거가 인기투표라지만, 이곳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의 무력 양성기관인 극정 아카데미.

임팩트 있고 강력한 후보를 선호하는 심리는 당연히 있을 터다.

저 무대를 빌려 뽑아달라는 광고도 한껏 할 테고.

'다 제쳐놓고서라도 솔직히 내 인기가 천의린에게 꿀리는 것도 아니니까. 유하랑 수연이한테 대대적으로 로비를 하고 있으니 이번 대련만 잘하면 바로 당선이야. 반장후보가 샬롯이라는 게 걸리지만 내가 잘하면 되는 거지, 뭐.'

마침내 신발끈을 꽉 조여맨 천의린이 밋밋한 스포츠 브라를 한번 고쳐입더니 흰 반팔을 걸쳤다.

목이 다 늘어진 반팔은 저래 봬도 꽤 강력한 거미형 괴물의 소재로 만들었을 테니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반팔을 걸친 천의린은 제자리에서 몇 번 뛰며 몸을 달군 뒤 손에 가죽 글러브를 꼈다.

권투 선수처럼 허공에 원투펀치를 갈긴 그녀는 벤치에서 단말을 들었다.

드디어 매칭을 시작하는 것이다.

'자아, 한 판 붙어볼까.'

나 또한, 단말의 매칭 시작 버튼을 꾹 눌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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