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절대강자 (2)
* * *
대련장 한가운데 걸린 전광판이 슬롯을 굴리며 철컥댄다.
한참을 철컥이던 전광판은 곧 화면 한구석에 어떤 글귀를 만들어냈다.
예상대로, 나와 천의린의 매칭이 성사된 것이다.
할당된 싸움터는 D409번 무대.
수고해, 라고 하며 샬롯의 어깨를 툭 쳐주고 무대로 향했다.
일전에는 어찌어찌 천의린을 이겼다지만, 그 때는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기본적인 장비의 차부터 상황의 유불리까지
샬롯에게는 자신있게 이길 수 있다고 말하긴 했으나 나로서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 때처럼 연막탄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회성 도구를 쓰면 퇴장이니까.'
나는 허리춤의 태도를 의식하며 D409 무대에 올랐다.
그러자 전광판은 내가 서있는 D409 무대의 영상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천의린은 아직 오지 않아 무대엔 나 밖에 없었다.
멀거니 서있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동그란 영상기록구가 부산히 날아다니며 날 찍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분홍색 기록구 하나가 내게 가까이 오자 담담하게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내보였다.
'기호 2번 샬롯 시현 뽑아주세요♡' 라 적힌 정성스런 디자인의 종이였다.
교실에서 들고 서있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적인 광고겠지.
"정시현 파이팅."
기록구에 대고 자기 응원을 한 뒤, 종이를 다시 집어넣었다.
내 주변을 빙빙 돌던 기록구는 내 주변을 몇 바퀴 마저 돌더니 공중으로 떠올라 가버렸다.
그쪽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자 곧 천의린이 무대에 올랐다.
곧고 바른 걸음걸이로 나타난 그녀는 제 나름대로 인상을 쓰며 계단을 올라왔다.
복수심에 불타는 눈길로 날 위아래로 훑어 보던 천의린은 미처 땅 밑을 보지 못했는지 계단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다 이내 자세를 잡고는 날 마저 노려봤다.
솔직히 하나도 안 무섭다
아무 일도 없던 척 하며 무대에 올라선 천의린이 이빨을 까득 씹었다.
그러더니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내게 말했다.
"안녕, 시현아."
"안녕."
"오늘은 옷이 바뀌었네. 이번엔 또 어떤 비겁한 수를 준비하셨을까?"
"비겁한 수? 에이, 이런 거에 비겁한 게 어딨어. 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지."
"상대를 속이고 기습하는 게 비겁한 수가 아니라고? 어떻게 그리 당당할 수가 있어?"
천의린이 미간을 찌푸린다.
아무래도 그때 이후로 가슴에 앙금이 많이 쌓인 것 같다.
평소라면 적당히 흘려 듣고 랭크전을 시작했겠으나, 오늘은 조금 말싸움을 하기로 했다.
다름 아닌 반장 선거 때문이다.
무릇 선거란 상대를 깎아내리는 흑색선전이 알파이자 오메가!
기록구가 이곳의 상황을 전광판에 다 방송하면서 기록하고 있으니 여기서 말재간으로 우위에 서는 게 중요하다.
나는 바닥을 톡톡 치다가 천의린에게 물었다.
"넌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뭐가 되고 싶어?"
"당연히 인퀴지터지. 나쁜 범죄자 새끼들을 때려죽이는 멋진 직업."
인퀴지터는 범죄를 저지른 헌터를 체포하는 헌병 같은 직업이다.
시나리오 상에선 무척이나 무능하게 나오는 집단이지만, 설정상으론 검거율 98%를 자랑하는 한국 공권력의 상징이다.
천의린이 인퀴지터를 지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 인퀴지터는 좋은 직업이지. 혹시 궁금할까봐 말해주는 건데, 난 헌터를 지망하고 있어."
"그래서? 그걸 물어본 이유가 뭔데?"
"헌터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알아? 설마 그런 영단어도 모르는 건 아니지?"
"."
그 말에 천의린이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별 생각 없이 찔러 본 건데 진짜 몰랐던 모양이다.
아무리 영어가 쓸모 없는 시대가 왔다곤 해도 헌터라는 단어를 모를 줄이야
"저기, 혹시 인퀴지터Inquisitor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
"그, 그 정도는 조사했어! 날 뭘로 보고! 조사관이란 뜻이잖아!"
"그치. 헌터Hunter는 사냥꾼이란 뜻이야. 괴물을 잡아 죽이는 사냥꾼."
나는 무대 밖에 둥둥 뜬 기록구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사냥꾼은 그저 사냥감을 잡는 사람일 뿐이야. 사냥감이랑 정정당당한 결투를 벌이는 직업이 아니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큰 피해 없이 사냥감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 되는 게 헌터라고. 그건 헌터를 상대하는 인퀴지터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다 해도 정정당당의 가치는 변하지 않아. 이건 사람끼리의 대련 아냐? 그렇다면 상호간의 공평함과 정의, 윤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걸 못 지키면 사람도 아니지."
"아니, 애초에 이런 곳에서 스포츠맨십을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배틀로얄에서 했던 싸움이 상호간의 정정당당을 논할 범주가 아닌 건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앞으로 정정당당한 싸움만 하고 살 수는 없어. 아카데미의 의의가 뭐라고 생각해? 정정당당한 경기를 펼치는 페어플레이어 양성소? 아니지. 그냥 필요에 따라 손쉽게 적을 죽일 수 있는 강자들을 양성하는 곳이야. 그런 곳에서 정정당당을 외치는 건 애초에 너 밖에 없는 거 몰라?"
"."
잘 부각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극정 아카데미는 백도白?가 아니다.
애초에 이 랭킹전부터가 단순한 대련이 아닌 목숨을 건 생사결로 이루어지니까.
순간불사장치와 사제들 덕분에 진짜로 죽지 않는 것 뿐이다.
나는 천의린에게 고개를 휘휘 저어 보였다.
"솔직히 네가 비열하니, 뭐니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 그럴 거면 차라리 콜로세움에나 들어가는 건 어때? 죽을 때까지 정정당당한 싸움을 할 수는 있겠네."
"뭐?"
콜로세움 결투라는 말에 천의린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지하에 숨어든 천박한 쓰레기들의 투기장을 들먹인 것에 크게 분노한 것 같다.
"나한테, 콜로세움이나, 가라고?"
"이런 세상에서 정정당당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콜로세움 밖에 없어. 가위바위보마저도 동체시력으로 이겨 먹는 판국에."
"이!!"
천의린이 주먹을 꽈득 쥐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호르몬이 돌기 시작했는지 눈에 핏발이 돋는 게 보인다.
'이만하면 됐겠지 얘가 말싸움을 못해서 참 다행이야.'
사실 그녀가 말한 스포츠맨십, 정정당당을 비하할 생각은 없다.
그냥 사실이 그렇다고 말했을 뿐.
하다보니 인신공격을 해버렸지만 전투흥분이 가라앉으면 열심히 사과해야지.
전신에 신성력을 피워 올리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천의린에게 맞서, 짐짓 태연하게 검병을 꽉잡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저 기세가 많이 무섭긴 하다.
진심으로 피떡이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둘 모두 전투태세를 취하자 무대에서 카운트다운이 울려퍼진다.
이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피할 수 없는 격전이 펼쳐질 터다.
'검무는 아직 안 되고, 신성투사니 장송곡도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자제해야 해. 발도술은 어쩔 수 없다면 쓰겠지만 가능하면 숨겨야 할 테니 믿을 건 부적술과 숨긴 암기 뿐!'
대?천의린 전략을 상기하며 빈 손을 허벅지로 향했다.
저 신성투사는 내 부적을 크게 의식하고 있을 테니, 그걸 이용해야 한다.
카운트가 심장박동과 함께 치닫는다.
두근대는 난타전의 시작이다.
'내가 대련을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건 좀 흥분되네.'
3.
2.
1.
전투 시작.
시작신호와 함께, 환상으로 확장된 감각이 천의린의 돌진을 잡아낸다.
칼을 놓고 긴장시켰던 다리 근육을 한껏 터트리며 왼쪽으로 뛰어들어 피해냈다.
땅에 닿기 전에 허벅지를 향했던 손을 움직여 외투에서 칼날을 꺼낸다.
그리고 힘껏 던졌다.
"어딜!!"
까앙!
나름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칼날이 천의린의 손등에 닿으며 처참하게 우그러진다.
부적을 의식하느라 예상치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닿기엔 너무 느렸나보다.
칼날을 쳐낸 천의린은 바로 덤벼오는 대신, 기합을 넣으며 왼손에 신성력을 모았다.
새벽울림 별부수기.
'저 무식한 게!'
초장부터 저런 강력한 일격을 준비할 줄은 몰랐다.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바람제치기 등으로 빠르게 공격해올 거라 생각했건만.
'이건 차라리 맞아야 해!'
피하기도 여의치 않다.
자세를 수습하자마자 빠르게 천의린에게 달려나가며 칠흑여제의 사랑을 켰다.
충격량이 큰 만큼 온전히 받아내지는 못할 터이지만, 차라리 위력이 더 커지기 전에 맞는 게 낫다.
"하아아아!!!!"
빛을 머금은 주먹이 내게 다가온다.
별부수기가 온전한 가속력을 얻기 전에, 부적을 뽑으며 앞으로 달려나가 빛으로 뛰어들었다.
"으윽!!"
팔뚝으로 받아낸 공격이 몸을 뒤로 날려보낸다.
대련장 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착지한 나는 급히 손가락을 놀렸다.
부적이 보랏빛 스피릿을 받아내며 하나의 글씨를 빚어낸다.
물론, 천의린이 그걸 보고만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어디이이일!!!!"
새벽울림 바람제치기.
지난 번에 봤던 칠흑갑주의 방어력을 기억하는지, 바람제치기는 정확하게 얼굴을 노려왔다.
꽤 빨랐지만, 내 부적의 완성이 더 빨랐다.
부적에 쓰인 글씨는, 막을 거?.
"칫!"
부적과 함께 급히 내지른 손이 바람제치기를 주먹째로 잡아낸다.
위력이 엄청 뛰어난 공격은 아니다보니 거?와 칠흑갑주로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천의린이 반대쪽 손으로 어퍼컷을 날렸다.
예측과 하르미아 시스템의 감지로 피해내고 잡은 손을 뒤로 확 빼버린다.
갑작스레 가해진 힘에 굳이 저항하지 않고 넘어가던 그녀는 돌연 무릎차기를 날려 내 복부를 차버렸다.
충격은 막아내도 밀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몸이 기울어진 사이 천의린의 공격이 들어온다.
얼굴로 들어오는 빠른 주먹에 기함해 급히 손을 놓고 견갑을 올려 주먹을 빗겨낸 뒤, 오른손으로 손도끼를 뽑았다.
손도끼를 그녀의 옆구리로 휘두르자 그녀는 왼손바닥으로 도끼를 찍어눌러 공격을 무효화했다.
그 틈에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자유로워진 양손을 품에 집어 넣었다.
던지는 것은 차륜형 수리검.
마구 던져도 잘 박히는 성질을 가진 수리검이다.
"흥!!"
천의린이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리검을 튕겨냈다.
빛에 둘러싸인 글러브가 예리한 칼날을 손쉽게 걷어낸다.
하지만 양팔을 빠르게 놀리며 계속 수리검을 던지자 그녀는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안정적인 거리를 확보했다는 확신이 들자 나 또한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며 바닥에 떨어진 송곳니 학살자를 차올려 검집에 수납했다.
물러선 천의린은 암기투척이 멎자 다시 도약자세를 취하며 빛을 발산했다.
나는 그에 대항해 품 속에서 마름쇠를 한움큼 쥐어 주변 바닥에 뿌려버렸다.
어떻게 던져도 송곳 하나가 위를 향하게 되는 마름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천의린에게 쥐약인 암기였다.
천의린은 잠시 주춤하더니 기세를 회복하곤 바닥을 박찼다.
기합을 크게 지르는 게, 내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이 비열한 게에에에!!!!!!"
높이 뛰어오른 천의린의 두 팔이 높게 올라가더니, 곧 밝은 신성력을 내뿜으며 아래로 휘둘러진다.
그녀는 내가 있는 위치로 정확히 떨어지며 몸을 붉게 달궜다.
새벽울림 땅꺼트리기.
마름쇠가 뿌려진 땅을 아예 뒤집어 엎을 생각이다.
천의린의 검푸른 머리칼이 휘날리며 거대한 신성력이 천천히 내가 선 땅을 향한다.
마치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모양새지만, 나는 굳이 피하지 않고 칼을 뽑았다.
몸을 기울여 쓰러질 듯 하다가, 땅을 딛고 돌아서며 검날을 강력하게 쳐올렸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양귀비의 꽃잎이 가득한 개화?花.
빛의 파도 앞에서 피어나는 꽃이 그 향내를 퍼트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