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절대강자 (3)
* * *
천의린의 성광이 땅으로 내려 앉는다.
검에서 고고하게 피어오른 꽃은 보랏빛 향내를 마구 퍼트리며 빛을 비껴낸다.
두 힘이 부딪히며 큰 충격파가 무대 위로 퍼진다.
무대를 덮고 있던 마름쇠가 여기저기 비산하며 밖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에 대신 꽃잎이 내려 앉는다.
권사와 주술사의 싸움 치고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땅꺼트리기와 개화?花의 충돌은 무승부로 끝났다.
아니, 상처로만 보면 내가 더 큰 이득을 가져갔다.
오른손에 힘이 빠지며 격통이 밀려온다.
화편검무가 강력한 주술이라곤 하지만 내 손목 힘으론 저 힘을 완전히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감히 한 손으로 땅부수기에 대적한 대가로 칼을 쥐고 있던 손목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팔을 떨어트리듯 내려놓으며 앞을 바라봤다.
저쪽은 개화?花가 땅꺼트리기를 미끄러트리며 손등부터 어깨죽지까지 깊게 베인듯 했다.
혈류량이 대폭 증가한 상태로 당한 상처라 그런지, 환부에선 피가 펌프로 퍼내듯이 울컥울컥 솟고 있었다.
이빨을 꽉 깨문 그녀는 신성력을 품은 반대쪽 손으로 상처를 지지듯이 훑고 지나갔다.
출혈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
당장은 팔에 새긴 상처가 한쪽 팔을 봉인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굳건한 신성력을 다루는데다 호르몬까지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저 정도 상처는 정말 몇 분 정도면 낫는 수준.
반면에 나는 오른쪽 손목이 작살난 이상은 계속 품고 싸워야 하는 불리함을 안고 있다.
"윽."
땡그랑.
힘이 빠진 손에서 검병이 미끄러졌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애써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인대가 제대로 씹창난 건지 큰 격통이 몰려왔다.
이래서야 부적을 적기도 크게 곤란하다.
시간은 이미 천의린의 편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이미 출혈 억제를 위해 혈류를 낮추고 수세로 돌입했다.
지금부터, 공격하는 건 내 쪽이 되었다.
품 속에서 손을 넣어 택티컬 토마호크를 쥔다.
허리를 한껏 비틀었다가 허릿심을 넣어 팔을 크게 휘두른다.
사이드암으로 던진 토마호크는 땅과 수평 방향으로 돌며 매섭게 적의 발목을 향했다.
천의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차고 도약해서 피했다.
그 틈에 큰 링처럼 생긴 차크람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고 있던 나는 그녀가 착지할 곳으로 차크람을 힘껏 던졌다.
공중에 뛰어올랐던 천의린은 반사신경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매섭게 돌던 차크람의 링 안으로 발을 넣으며 가볍게 착치했다.
차크람이 그녀의 왼발목을 타고 빙글빙글 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차크람을 꺼내 오른팔에 걸고, 왼손에는 침형 수리검을 들었다.
오른팔도 부서진건 팔목 뿐인지라 팔뚝에 걸고 돌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왼손에 든 암기는 젓가락보다 조금 더 두꺼운 수준인 수리검이지만, 제대로 맞으면 그 위력은 화살에 비견한다.
팔에 신성력을 두르고 쳐낼 준비를 하는 천의린의 움직임을 보며 침형 수리검을 낮게, 그러나 힘있게 던졌다.
쐐애애액ㅡ!!
무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수리검이 투사의 흰 종아리에 스친다.
천의린은 투척을 피해내기 무섭게 이쪽으로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나는 투척 후의 불안정한 자세 그대로 오른팔을 확 내질렀다.
공기를 찢고 날아가는 칼날 너머로, 신성투사의 짧은 기합이 울려퍼진다.
새벽울림 연잎흘리기.
그녀의 팔이 칼날 밑에 닿으며 부드럽게 올라간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차크람은 맹렬한 기세 그대로 그녀에게서 비껴 지나갔다.
천의린의 볼에 작은 자상 하나 남기고 날아가버린 차크람은 그대로 방호벽에 꽂혀 들어갔다.
"하아아아!!!!"
차크람을 피해낸 천의린이 내게 뛰어들며 허리를 비튼다.
전투흥분이 살짝 가라앉은지라 전과 비교하면 꽤 느렸지만, 내게는 여전히 빠른 속도였다.
'내가 피할 거라 생각하고 있지!'
적당히 위협을 줘서 떨쳐내며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다.
하지만, 무방비한 것처럼 보여도 내게는 한 가지 숨긴 수가 있다.
왼손의 망토를 꽈악 붙들며 크게 외쳤다.
"셀레스티!!!!"
이얍!!!
팔을 감싸고 있던 망토가 한순간에 부풀어 오른다.
나는 지르기 자세를 취한 천의린에게 망토를 휘둘러버렸다.
빨간 천이 시야를 어지럽히며 속에 숨기고 있던 작은 암기가 마구 날아간다.
천의린의 반응을 볼 새도 없이, 천을 한 번 더 그녀에게 휘둘렀다.
허공에 천을 꼿꼿하게 고정한 퍼베이시브 에픽이 천의린의 얼굴을 덮는다.
팔뚝을 세워 암기들을 막은 건지 팔에 상처가 가득한 그녀는 갑작스레 가려진 시야에 당황해 순간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 틈에 그녀의 품 속으로 뛰어든 나는 단검을 뽑아 그녀의 목에 찌르려고 했다.
땡그랑!
"앗!"
하지만, 그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내 오른손이 박살났음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목을 찌르긴 커녕 제대로 단검을 쥐지도 못하는 손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정시혀어어언!!!!"
망토를 얼굴에서 뜯어낸 천의린이 날 어깨로 받아버렸다.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나는 겨우 균형을 잡았지만, 그녀의 후속타는 피할 수 없었다.
어느새 몸에서 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천의린이 전신에 신성력을 두르고 있었으니.
새벽울림 별부수기.
"하아아아아아아!!!!!!"
거룩한 힘을 품은 주먹이 턱으로 쇄도한다.
눈을 찌르는 빛이 매섭게 찔러온다
'실수!'
퍼엉───!!!!!!
어퍼컷을 맞았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터져나온 충격파가 턱부터 정수리까지 타고 오르며 촘촘한 균열을 만들어 낸다.
공중에 붕 떠버린 몸은 꼴사납게 부르르 떨려온다.
그 모든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뒤늦게 시야가 흐려진다.
'잠, 깐 죽는'
영웅니이이이임!!!!!!
아득해지는 셀레스티의 비명과 함께,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내던진 뇌창이 검은 비늘을 뚫고 몸뚱이에 꽂혀든다.
그 거체에 비하면 이쑤시개나 다름 없는 크기였지만, 용은 고통에 가득찬 울음을 내질렀다.
하지만 용의 돌진은 조금도 멎지 않았다.
정시현은 개의치 않고 진각을 밟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천십속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꽃잎을 퍼트린다.
문자들로 가득 차는 공간 속에 한 떨기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다.
화편검무花???, 제사식?四?.
침염??.
반경 20m에 불과했던 그녀의 영역이 스물다섯 배로 늘어난다.
세계 자체에 스며든 양귀비향은, 어딘가 고혹적이면서도 무척이나 쓰라렸다.
멸망의 용이 겁없이 날아 그녀의 공간을 침노한다.
공간을 적시고 있던 향기와 꽃잎이 침입에 맞서 거칠게 날아 들었으나, 용의 비늘은 생채기 하나 없이 그를 받아냈다.
무기질하게 눈동자를 옮긴 정시현은 빈 손을 들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화천대유火?大?.
화뢰서합火雪??.
뇌천대장雪?大?.
뇌화풍雪火?.
풍뢰익風雪?.
천뢰무망?雪?.
건위천??.
숨 두 번 쉴 시간에, 그 모든 육십사괘??四?가 완성됐다.
정시현은 손가락을 들어 고고하게 마지막 한 글자를 허공에 마저 새겨넣었다.
입?.
그러자, 그 모든 글자들이 그녀의 공간에 스며들어갔다.
보랏빛 꽃잎과 향내가 점점 강력해지며 용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혼이 연주하는 광시곡 또한 강력한 박자로 치달으며 용을 압도했고, 짝이 맞지 않는 일곱 날개는 점점 붉게 타오르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지막 재앙을 압도하는 위세를 뻗치던 정시현은 뒤를 힐끔 돌아보곤 답지 않게 살풋 웃었다.
자신의 과거, 그러나 조금은 다른 과거가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정면을 돌아본 절대자가 천십속검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꽃잎 폭풍에 돌진이 멎은 먼더베인에게 칼을 겨누고 한껏 비웃었다.
"한 판 붙어볼까. 애송이."
그녀는, 절대강자다.
***
의식이 흐리다.
움푹 꺼진 의식 속에서 무언가를 봤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언가, 무언가 엄청 강한 사람이었는데.
님, 영, 신려봐
익숙한 목소리가 날 부른다.
웅웅 울리는 청각이 목소리를 막는다.
웅님, 영님!!!! 영웅니이이이임!!!!!
눈을 번쩍 떴다.
부연 시야 너머로 하르미아 시스템의 메시지가 보인다.
뭔지 모를 메시지를 치우자, 비로소 바깥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이 흐리긴 하지만, 높고 높은 천장이 보인다.
회복된 청각 속으로 와글와글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 익숙한 공기는 아직 대련장이다.
대자로 눕혀진 몸을 덜덜 떨며 일으켰다.
전신에 힘이 없고, 머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완파되었을 머리뼈는 얼기설기 붙어 있다.
아직도 금이 쩍쩍 가 있는 것 같지만.
영웅님!!!! 영웅님!!!! 괜찮아요!???
"밖에선 소리 지르지 말라 했잖아."
지, 지금 안 그러게 생겼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비로소 전신의 감각이 돌아왔다.
턱에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별부수기의 파동이 전신으로 퍼진 모양인지 전신이 완전히 아려온다.
설마 그런 식으로 져버릴 줄이야
"정신이 드세요?"
내 뒤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다름 아닌 아가페의 사제다.
"머리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었는데, 지금은 대충 붙여 놨어요. 아, 얼굴은 걱정 마세요! 예쁜 얼굴은 최우선적으로 고쳐드렸으니까."
"아 네."
사제가 웃으며 머리에 손을 얹고 마저 신성력을 부었다.
금 가있던 두개골이 마저 깔끔하게 붙었다.
"휴, 다 됐네요. 다른 부상 부위 있나요?"
"아뇨 없어요."
"네, 그럼 조심하세요!"
사제가 폴짝폴짝 뛰어서 무대를 내려갔다.
언제 부서졌냐는듯 말짱하게 돌아온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정면에는 천의린이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괜찮아?"
"아파"
"그러게 누가 함부로 입을 놀리랬나. 아무리 도발이라지만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천의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발을 툭툭댄다.
전투흥분이 가라 앉은 뒤인지라, 그녀는 방금과 다르게 꽤나 이성적인 모습이었다.
'졌네'
멀쩡해진 오른손을 봤다.
이것만 멀쩡해도 이겼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털었다.
한 방, 딱 한 방이 부족해서 진 걸 이제 와서 뭐 어쩌란 말인가.
땀에 젖은 검푸른 머리카락을 넘겨대던 천의린이 내게 다가와선 딱밤을 때린다.
멀쩡해진 오른손을 들어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고 있자, 그녀는 내게 일어나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리 아파."
"뭐? 너 방금 괜찮다며?"
"허리도 아파 분명히 턱만 맞았는데."
천의린은 그 말을 듣더니 혀를 찼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손가락을 연거푸 까딱이더니 이내 내 허리를 잡고 억지로 일으키며 신성력을 주입했다.
나는 뭔가 무안해서 짐짓 괜찮은 척하며 곧게 섰다.
"으.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시현아."
"응?"
"고마워."
내 허리를 붙잡은 그녀가 돌연 그렇게 말해왔다.
"왜?"
"그냥, 이제와서 생각해보니까 네가 한 말이 맞기도 한 것 같아서. 아무도 나한테 그런 얘길 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말야."
그렇게 말한 천의린이 손을 떼고 멋쩍게 웃었다.
날 잠시 묘한 눈으로 보다가 몸을 홱 돌린 그녀는 손을 흔들며 무대를 내려갔다.
무언가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지.
"아, 힘들다."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괜찮은데 샬롯한텐 뭐라고 하지."
입으론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샬롯과 반장선거보다는 의식을 잃고 봤던 그 광경이 더 마음에 걸린다.
먹물처럼 퍼져나가는 글씨들 사이에서 찬연히 춤추던 일곱 날개의 여성.
절대강자란 말에 걸맞는 그녀의 무위는, 한국 칠성 전부를 손끝으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날 돌아봤을 때 그 눈은 왠지 모르게 너무 익숙했는데.'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분명히 나랑 닮긴 했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그런 고심에 빠진 나를 위로해주려는 건지 셀레스티가 천을 뻗어 머리를 스읏스읏 쓰다듬었다.
감히 영웅님의 머리를 만지는 망토를 잡고 팔에 꽉 동여맨 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챙겨 무대 밖으로 나섰다.
샬롯이 반장이 되려면, 조금 더 노력해야 할 듯 싶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