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영웅도 모르는 영웅담 (1)
* * *
무대에서 내려와 대련장 벽에 붙은 벤치로 다가갔다.
샬롯은 옛저녁에 대련을 마친 건지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졌다고요."
"응 미안."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샬롯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조용히 내뱉었다.
한숨을 쉬려다가 실례라는 걸 알고 그만둔 것 같았다.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더라고. 너도 그거 돌려보면 알겠지만 실수만 안 했어도 이겼어"
"음, 당신이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그런 거겠지만."
샬롯은 대충 그렇게 말하며 자기 단말을 척 내보였다.
그녀가 내민 단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최근 전적:="" 샬롯="" 스털링(승,="" +14)="" vs.="" 소태연(패,="" 14)=""/>
"."
"저는 부반장 후보랑 싸워서 이겼습니다."
"쟤는 끽해봐야 빌보드 15위잖아. 난 무려 3위랑 싸웠다고."
"천의린이랑 싸우겠다고 한 건 당신이 아닙니까. 제가 이겼으니 망정이지."
샬롯이 추궁하듯 허리에 두 손을 올리며 얼굴을 내게 내밀었다.
마치 고고한 아가씨가 핀잔을 주는 모습 같았다.
"알았어, 미안해. 다른 애들 이기면 되잖아. 응?"
"네. 나머지 네 판은 만회를 위해서라도 전승을 노려 주십시오. 그나저나 학교 로비에 붙은 모집 공문은 보셨습니까?"
"산성비? 알지. 급히 길드원을 모은다던데. 아카데미에 그 작은 종이쪼가리를 붙이려고 로비를 얼마나 해댔을지 생각하면 조금 그렇더라. 근데 그게 왜?"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산성비에 들어갈 겁니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대 길드고 자시고 저 모집 공고에 응하려면 여길 조기졸업해야 한다.
시나리오의 중심이 될 극정 아카데미를 내가 대체 왜 벗어나야 한단 말인가.
설사 로비에 붙은 게 길드원 모집 공고가 아니라 입영 통지서라 하더라도 절대 안 갔을 거다.
"아니? 난 애초에 길드에 들어갈 생각도 없고 게다가 평길드원부터 시작이잖아. 낮은 반이면 몰라도 우리 반 애들은 다 싫어할 걸."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면 헌터협회를 지망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프리랜서. 길드에 비해 수익은 적겠지만 누구의 명령을 듣는 건 질색이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응? 뭐가 다행인데?"
샬롯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냥, 나중에 제 길드에 들어오시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네 길드?"
"네. LA에 있는 길드입니다."
미국의 루케테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부갈드장 후보에 불과한 그녀지만, 그녀의 실력이 실력인 만큼 추후 쉽게 그 자리를 꿰찰 수는 있을 터다.
문제는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지만.
'카타스트로피의 반란이 터지지, 아마? 우리는 빠르게 뽑아내서 다행이야.'
눈치 빠른 샬롯이 다시 한국으로 도망친 후, 무정부주의 단체의 테러로 사회질서가 마비된 미국은 그대로 멸망하고 만다.
한 때 홀로 아메리카 대륙을 사수했던 강국답지 않은 말로였다.
"음, 그래, 뭐. 생각은 해볼게. 네 나라가 망하지만 않는다면."
"정말입니까? 오시기만 한다면야 극진히 대접해드리겠습니다. 한국에 비해 강압적인 질서도 없을 거고요."
"근데 우리 아직 아카데미 1학년이거든. 누가 보면 내가 A급 헌터는 되는 줄 알겠다."
"흥, 미리 침바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지금은 선거운동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4연승하는 거 잊지 마시고."
샬롯은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매칭 단말을 꺼내 버튼을 꾹 눌렀다.
곧 적당한 상대와 매칭이 잡힌 그녀는 내게 주먹을 꼭 쥐어보이더니 자신의 무대로 향했다.
나는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열심히 하자
***
좋은 매칭운에 힘입어 남은 4판을 겨우 이기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온몸이 피로해서 죽을 것 같다.
"으흐아아 좋네"
오랜만에 샤워 대신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몸을 담갔다.
온몸이 노곤해지는 따뜻함 속에서 찌뿌드드한 몸이 한껏 이완된다.
"우후아아아"
으아으 좋네요.
"천쪼가리 주제에 목욕을 즐기는 척 하지 마"
머, 머라구요!? 분위기 내 보는 것도 안 돼요!? 망토에게 자유를 달라!!
수중에서 둔하게 몸을 흔드는 셀레스티를 무시하고 몸을 턱까지 깊게 밀어 넣었다.
물의 부력으로 가슴이 살짝 떠오르는 묘한 감각이 꽤 재미있다.
"우음 셀레스티"
왜요?
"낮에 천의린한테 얻어맞은 뒤로 있잖아. 그때 무슨 일 없었어?"
내 질문을 들은 셀레스티는 물 밖으로 몸을 일으키며 천을 부르르 떨었다.
갓 온탕에서 나온 사람처럼 말이다.
그때요!? 제가 깜짝 놀라서 소릴 질렀죠!!!! 진짜 돌아가신 줄 알았다구요!!!! 머리가 터져버리다니!!!!
"아니, 그런 격한 표현을 쓸 것까진 없잖아 그리고 순간불사장치도 있고 사제도 있는데 뭘 죽어."
흥!!! 소중한 사람이 머리가 터지는 꼴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딨어요??? 그렇게 쉽게 말씀하지 마세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셀레스티에게 조심스레 사과했다.
"미안 요즘 너무 고어한 광경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미처 생각 못했네."
분석이니 뭐니도 좋지만 제 여린 새가슴도 생각해달라구요!! 이 건방진 질투쟁이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너도 나와서 한 마디 해!!
천 끝이 칠흑여제의 사랑이 있는 왼가슴을 쿡쿡 찌른다.
난데 없는 성추행을 당한 내가 기겁하자 칠흑갑주가 나타나 상체를 감싸버렸다.
함부로 만지지 말아 주세요, 셀레스티.
뭐!? 자기는 나한테 막 껴안는다고 자랑했으면서 난 찔러보지도 못하게 하냐??
없는 사실을 날조하지 마세요.
칠흑여제의 사랑이 몸을 꼬옥 조여오며 셀레스티에게 쏘아붙였다.
셀레스티는 날조라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칠흑갑주를 콩콩 쳤다.
그건 그렇고,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몸은 소중히 여기시면 좋겠어요. 가슴이 아프답니다.
"응 알았어."
그 말을 남긴 칠흑갑주는 내 몸을 나신으로 돌려놓고 사라졌다.
정말, 대련 좀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오니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겠네'
아무튼!!! 그러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어쨌든 그거 말고는 아무 일 없었단 거지?
네!!
셀레스티가 단호하게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몸을 비벼 거품을 내는 망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진짜 셀레스티는 아닌 모양인데.'
하르미아 시스템이 보인 메시지가 망토의 말과는 달랐던 까닭이다.
[권능 '영웅담(2)'과 연동 성공.]
[외부 디바이스의 요청: 출처를 알 수 없는 환상 재생.]
[관리자 권한으로 승인.]
[권능 '영웅담(2)'과 연동 해제(연결 사라짐).]
하르미아 시스템이 보낸 메시지의 로그엔, 영웅담이 하르미아 시스템에 접속한 전력이 나타나 있었다.
내가 턱을 얻어맞고 쓰러졌을 때 나타난 메시지였다.
'저 출처를 알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게 내가 봤던 그 광경이겠지.'
붉은 하늘과 잿더미가 된 도시.
재앙의 위용과 절대강자의 격돌
내게 대체 무엇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걸까?
'그것보다 그냥 영웅담도 아니고 영웅담 투라니, 이름이 이상하잖아. 마치 컴퓨터에서 같은 파일을 두 개 만들었을 때 나올 듯한 이름인데'
"셀레스티."
넹?
"하르미아 시스템에 연결해 봐."
못해요! 안 되는 거 아시면서!!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온몸에 흰 거품을 두르고 놀고 있던 셀레스티를 붙잡아 하르미아 시스템과 연결을 시도했다.
[권능 '영웅담'과 연동 실패(연결 어려움).]
아니나 다를까, 실패했다.
거 봐요! 이 시스템 이상해!
"으음 셀레스티."
왜요, 또?
"혹시 영웅담의 권능을 가진 존재가 너 말고 또 있어?"
내 팔을 감싸고 열심히 비누칠을 하던 셀레스티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전 세상에서 유일한 영웅담의 악마 아니아니!!! 영웅담의 수호령이라구요!!! 영웅담의 권능을 가진 건 제가 유일해요!!
"악마는 몰라도 천사 같은 애들이라면 있지 않을까?"
천사라뇨!! 그런 개 같은 흠흠! 아무튼,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영웅담은 제가 유일해요! 영웅의 파트너는 특별해야 하니까!
실제로 그렇다.
설정상 퍼베이시브 에픽이 가진 영웅담의 권능은 다페르헤이드와 아인델로제로엠을 통틀어 유일하니까.
그렇다면 내게 환상을 보여준 그 두 번째 영웅담의 정체는 뭘까?
"설정이 바뀌지 않았다면 나로 인한 것일 텐데."
설정? 또 하르미아 시스템 잘못 건드렸어요? 전에 감각 잘못 올렸다가 기절하셨잖아요!
"그런 거 아니 거든. 그리고 넌 샤워타올도 아니면서 자꾸 비비적대지 마."
등 밀어드릴까요?
"됐어. 네 몸이나 씻어."
팔에 감겨서 열심히 거품을 내는 망토를 잡고 욕조에 푹 담가버렸다.
물고문을 당한 셀레스티는 연신 우악,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리고 거품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으음 생각해 보니 관리자 권한이라는 문구도 되게 신경 쓰이는데. 셀레스티가 저도 모르게 연결됐다고 해도 관리자 권한은 없을 거 아냐. 무엇보다 관리자는 나고 헉!? 이거 혹시 해킹인가!?'
잠시 그리 생각했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르미아 시스템이 무슨 놈의 해킹에 당한단 말인가.
제작자인 하르미아 본인이 직접 와도 그건 힘들 터다.
'이모님한테 물어 봐야 되나. 너무 신경 쓰이는데.'
수상한 영웅담(2)의 존재를 의식하며 어느새 미지근해진 욕조의 물을 뺐다.
***
젠장.
어째 그 년은 여기서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생각보다 많은 힘을 써버렸는데
하아, 자, 잠깐만 흑,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봐
나 없, 을 때 죽으러가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