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뒤틀리는 국면 (1)
* * *
투표가 끝났다.
마지막 개표가 끝난 후, 칠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기호 1번: 16표.
기호 2번: 18표.
단 두 표 차이로 이겼다.
"반장은 샬롯 스털링, 부반장은 정시현이 되겠다."
"와아~"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2번을 찍은 사람 중 한 명만 1번을 찍었어도 재투표였을 텐데, 정말 다행이다.
"시현아!! 축하해!!"
수연이가 양발을 동원해 의자를 두구두구 차댔다.
요란스레 움직이는 매끈한 종아리를 때려서 진정시킨 후 샬롯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감격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도 설마 될 줄 몰랐던 건가'
솔직히 나도 확신은 없긴 했다.
실제로 소태연이 트롤링만 안 했어도 졌을 터다.
그런데 샬롯은 왜 저리 반장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임했을까?
당선도 됐으니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수연아. 너 자꾸 뒤에서 시현이 찰래."
"으응? 손이 안 닿는 걸 어떡해!"
어느새 나타난 유하가 궤변을 늘어 놓는 수연이의 볼살을 주욱 늘였다.
"으아으으!!! 아하!!!"
"아프라고 한 거거든. 당선 축하해, 시현아! 그렇게 고생하더니 결국 됐네."
"고마워. 너희들 덕분이지, 뭘."
사실 부반장이 된다는 것 자체는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이었지만, 약속대로 원시의 힘을 배울 수 있게 됐으니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으하으으!!! 나아아아!!!"
"또 시현이 발로 찰 거야?"
"사, 상항 바서어"
"뭘 상황을 봐, 이 화상아! 차지 마!"
난 크게 신경쓰지 않던 일인데 왜 유하가 대신 화를 내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미래의 유하는 정말 시간마법을 익힌 걸까?
그걸로 셀레스티를 현재로 보냈다면 혹시 눈앞의 유하도 미래에서 온 게 아닐까?
'으음, 터무니 없는 생각을.'
볼살을 당기는 유하와 바동대는 수연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
정시현이 부반장에 당선된 그 시각, 연구계 건물의 한 연구소에선 은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집중해서 마력회로를 배열하고 있던 성초은은 앞에 앉은 생명마력반응학 교수의 말에 아미를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지금 뭐라고요."
"모든 것의 이론을 알고 있느냐고."
모든 것의 이론, 혹은 만물이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리적 현상을 하나로 묶어 설명할 수 있는 가상의 이론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고전역학이 충돌하면서 이를 하나로 엮고 우주를 간편하게 설명하기 위해 대두된 이래로 옛날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올라섰던 적이 있다.
차원충돌 이후 마력학이 등장하면서 순수과학의 급격한 진보가 일어난 현 시대에는 갖가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는 증명이 수두룩하게 나온 상태지만 말이다.
지금의 만물이론은 그저 철 지난 종교쟁이들이 들먹이는 유사과학론일 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유사과학에 대한 경계?"
"글쎄, 유사과학이라. 만물이론은 유사과학 따위로 불릴 이론이 아니네만."
"그렇죠. 애초에 참인 이론도 아니니까."
이론은 반증되지 않으면 참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모든 것의 이론은 차원충돌이 일어난 후 40개 남짓한 실존 불가 증명이 속속들이 나타나며 학계에서 완전히 부정되었다.
기원전부터 내려온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 방법이 400개라는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숫자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게. 분명히 차원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각 학계에선 모든 것의 이론이 실재할 거라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네. 실제로 그에 가까운 초끈이론이나 M이론에 관한 연구가 절찬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지. 그런데 차원충돌 후 나타난 불가 증명들은 모두 마력학을 이용해 불가능을 역설하고 있다네. 뭔가 음모가 있다고는 생각이 안 드나?"
"논문을 제대로 보긴 하셨나요? 그 중 7개는 마력학에 뿌리를 두지 않은 증명이에요."
"있기야 하다만, 모두 마력학으로 발견되거나 증명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쓸모 없지."
성초은은 기가 차서 코웃음 쳤다.
그렇게 치면 지금 학계에서 쓰레기가 아닌 건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저딴 대가리로 어떻게 극정 아카데미 교수직까지 올라왔는지 의문이다.
"잘 들었고요, 그냥 꺼지세요. 제 소문을 듣고 자기네 학과로 무작정 빼가려고 이러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질마력분석학에서 떠날 마음도 없거든요.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아무리 교수라고 해도 그딴 개좆소리를 함부로 뇌까리면 어디서 한 대 맞는 수가 있어요. 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 자네도 진정한 진리를 보면 마음이 바뀔 테니 말야."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그리 받아친 교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앰플에 담긴 그것은,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는 애벌레였다.
성초은은 그 끔찍한 모양새에 가슴이 섬짓해서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지금 뭘하시려고"
"세계에 통하는 단 하나의 수식을 엿보는 법, 그건 재앙의 편린을 약간, 아주 약간 들여다보는 것이지."
"무슨 개소리를!"
교수가 꺼낸 건 '우월'에서 진화시킨 환상날개나방의 유충이었다.
건드리면 자기 보호를 위해 약간의 환각물질을 내뱉는 애벌레에 재앙의 편린을 담은 것이다.
교수의 주름진 눈가에 박혀 있던 깊은 눈동자가 무수한 겹눈으로 갈라진다.
성초은은 그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지만, 곧 바닥에 퍼진 검은 촉수에 의해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카, 카에다 커흑!!"
"안 되지, 안 돼. 우리에겐 자네 같은 두뇌가 필요해."
철퇴처럼 둘둘 말린 촉수에게 명치를 얻어맞은 성초은이 숨을 몰아쉬며 두려운 눈으로 교수를 올려다 봤다.
검버섯이 핀 피부를 비집고 나온 촉수를 온 몸에 두른 학자는 덜덜 떠는 후배 학자를 보며 앰플을 떨구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꽈드득.
'우월'에 의해 진화한 유충은 깨끗한 바닥과 구두 밑창 사이에 끼어 온 몸에서 싯누런 진액을 사방으로 터트렸다.
곧, 진액은 환각제로 변해 기체로 화하며 성초은의 두뇌를 범했다.
"안심하게."
재앙, '천변으로의 길'의 추종자가 구두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연기를 들이마신 성초은은 곧 눈에서 빛을 잃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잠깐 보기만 할 뿐이니."
물론, 그 광경을 보고도 감화되지 않을 자는 없을 테지만.
***
학교 일과가 끝나고 암살부를 들렀다.
본래는 샬롯에게 원시의 힘을 배우러 가야 했겠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미뤄두었다.
음침한 암살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폭죽을 펑 터트렸다.
여느 때와 같이 졸린 눈을 하고 있는 권하율이었다.
"반장 됐다며 축하해"
어둑하고 연기가 자욱한 정적 속에서 그녀가 박수를 느릿하게 쳤다.
무척이나 마피아 보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상황이었다.
"네? 아, 감사합니다. 근데 전 부반장인데요."
"부반장이나 반장이나 어쨌든 뭔가 됐다는 거잖아? 남 위에 서겠다는 자세 자체가 중요한 거지"
길게 하품하며 일회용 폭죽을 땅바닥에 휙 던진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상자에서 시가를 꺼냈다.
그녀는 새삼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게 시가 끝을 까딱였다.
"?"
"불"
"불이요? 으, 으음 네에."
권하율이 발을 올린 책상에 다가가 지포라이터를 들었다.
그러자 시가를 까딱이던 그녀가 그게 아니라는 듯한 비음을 흘렸다.
"그거였으면 내가 했겠지 너 기죽으라고 불 붙이라 한 거 아니거든 보라색 불꽃 피울 수 있다며"
"주술로요? 그걸로 담배를 피워도 돼요?"
"주술사는 넌데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니? 일단 붙여줘"
하긴, 이걸로 요리도 했는데 담배라고 안 될 건 없으리라.
부적으로 불을 피워 시가 끝에 불을 붙였다.
보라색 불씨와 함께 타는 시가를 쭉 빨아들인 권하율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머리를 뱅글뱅글 돌려대기 시작했다.
"우으 자, 잠깐"
"왜, 왜 그러세요!?"
"너어어 무슨 짓을"
풀썩.
이제는 눈동자마저 빙글빙글 돌리던 권하율은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떨궜다.
나는 당혹감에 그녀의 손 끝에 들린 시가를 살폈다.
"."
냄새가 뭔가 이상하다.
마치 담배가 아니라 위험한 마약 같은
'아 설마.'
나는 일전에 가소희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음, 으음 꽤 괜찮네요. 끈적하면서도 조금은 정적인게 늪 같기도 하고요.
늪이요?
네. 꽃으로 나타내면 양귀비? 그것도 자줏빛 양귀비겠네요. 난잡하게 흐르는 스피릿이 아닌 이상은 검기를 익히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내 스피릿은 양귀비의 성질을 띤다.
'아, 아니. 스피릿이 꽃의 성질을 그대로 띠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것보다 담배에 불 붙였다고 그게 마약으로 변하는 게 말이나 돼!?'
권하율은 여전히 헤롱헤롱한 눈동자를 하고 엎어져 있었다.
오늘은 다른 부원들이 들르지 않은지라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건 나 뿐.
나는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권하율의 뺨을 때렸다.
짝!
"윽 으으 아파아"
"저, 정신이 드세요?"
"으우 후우"
팽팽 돌던 권하율의 눈에 초점이 잡힌다.
부스스 일어선 그녀는 고개를 연거푸 흔들더니 정신이 드는지 날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니, 그, 이건 제가 한 게 아니라 제 스피릿이"
평소의 졸린 표정과 다르게 사나운 표정을 지은 권하율.
그녀의 앞에서 횡설수설하며 최선을 다해 작금의 사태를 설명했다.
무검희부터 시작해서 부적술까지 온갖 핑계를 대자 비로소 납득했는지 이마를 짚으며 알겠다는 손짓을 했다.
"알았어 그러니까아 다 내 잘못이구나?"
"아니 그,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 예쁜 보라색으로 태워보고 싶었을 뿐인데"
권하율이 소심하게 의자를 돌리며 다른 시가를 꺼내 태웠다.
내게서 등 돌린 모습이 우울하다.
"나 기분 다운됐어 넌 칼이나 던지러 가 사라져"
'지, 지가 붙이라 해놓고'
답지 않게 소심한 발언을 내뱉은 권하율의 의자를 잡고 빙글 돌려 날 향하게 했다.
그녀는 실제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의자에 쪼그려 앉아 시가를 빨고 있었다.
"뭐야아"
"그, 오늘은 칼 던지러 온 게 아니라 부장님한테 부탁이 있어서요. 진지하게."
진지하다는 말에 권하율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빨갛게 빛나는 시가의 끝을 보며 조용히 용건을 전했다.
"혹시, 유능한 무당 하나를 중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그걸 왜 나한테 찾아"
"엔키트 후계자에게 직접 의뢰하는 거에요."
그 말에 권하율의 몸이 쩍 굳었다.
상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엔키트의 후계는 안쓰럽게 손을 떨다가 반도 못 태운 시가를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비싼 시가를 순식간에 두 개나 잃은 것이다.
"어, 어, 어떻게?"
권하율은 크게 충격 받았다는듯 동공을 달달 떨었다.
이 인간은 평소에 그렇게 티를 못 내 안달이더니 진짜로 몰랐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장님 빼고 전교생이 다 아는데요."
"뭐, 뭐? 진짜로??"
"평소에도 스피커폰으로 엔키트 길드장이랑 대놓고 통화하시잖아요. 하교 때도 하이파이브가 직접 마중 나오고 그래놓고 안 들킬 거라 생각하신 거에요?"
"그런!! 남의 통화 내용을 엿듣다니!! 뒤는 언제 밟은 거냐아!!"
분기를 억누르며 읊조리던 권하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서 멀어졌다.
아주 순수하신 부장님이다
'감이 안 좋은데. 설마 안 들어주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당을 중개하는 건 거대 심부름 길드인 엔키트만이 취급하는 영역이니까.
더욱이 빠른 중개를 위해서는 권하율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별 수 없이 그녀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이런 상상놀이는 많이 해본 적이 있으니
"음 그, 그래!! 난 사실 엔키트에 잠입한 엑셀시어의 스파이다!! 엔키트의 위계는 훤히 꿰고 있지!! 으, 으하하!!!"
"그럴 수가!! 내게 마약을 흡입시킨 것도 설마!!"
"그렇다! 엔키트의 후계자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지!!"
불쌍한 암살부의 부장은 허억, 하는 소리를 내며 경악했다.
"하지만 어, 그 그래!! 우리가 거사를 펼치기 전에 살풀이를 위해 무당을 부르기로 했다!! 그래서 무당이 필요해!!! 내일까지!!! 안 그럼 음, 이 암살부 부실을 무너트리겠다!!!"
"그건 안 돼!!!"
"알았다면 들어줘!! 내일까지 이곳으로 최고의 무당을 불러와!!! 알겠어!?"
"의, 의뢰비는"
"사백 장!! 그 정도면 되겠지!!"
권하율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후계자 전용 핫라인을 통해 의뢰사항을 전달한 그녀가 전화를 끊으며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어딘가 기세등등해져서는 우하하 웃었다.
"음하하하!!"
"."
곧 표정을 바꾼 권하율은 한숨을 뱉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시가를 꺼냈다.
그러더니 날 퍽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어 굉장히 어리구나 그런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부장님이 먼저 했잖아요."
"나는 적어도 철 없이 음하하 같은 소릴 내진 않았어"
그녀의 말에 심히 부끄러워져선 고개를 떨궜다.
이 인간은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서는 남한테 뒤집어 씌우는데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우음 사실 진짜 모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들켜도 상관은 없을 것 같네 이미 다 안다며"
"네."
"으, 흐아아암 그래도 의뢰를 받는단 얘기는 하지 말았음 해 귀찮아질 수도 있어서어"
그녀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말하고 다닐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이제 불러온 무당이 실력 있기만을 바라야겠네'
나는 무당을 이용해 영웅담의 흔적을 좇을 셈이다.
영혼의 잔향을 탐지할 수 있는 그들이라면 도움이 되겠지.
무당이란 족속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뭐 어쩌랴.
급한 사람은 난데.
'아. 그러고보니 과학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영혼탐지기 같은 걸 써볼까. 성초은에게 연락을 한 번 해봐야겠어.'
역시 선무당보다는 불쌍한 논문쟁이가 낫지.
나는 암살부를 나오며 성초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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