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뒤틀리는 국면 (2)
* * *
넓은 의미에서의 진리란 단순히 참인 명제를 뜻한다.
정시현의 몸무게는 45kg이라던지, 성초은의 학과는 이질마력분석학과라던지.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히 현재 시점에 있어서 참인 명제일 뿐이다.
추후에 정시현이 기어코 가슴의 지방을 감량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녀의 몸무게는 더 이상 45kg이 아닐 것이고, 성초은이 재앙의 편린에 잠식당하고 학과를 옮긴다면 그녀는 더 이상 이질마력분석학과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영원불멸하지 않은, 일시적인 진리일 뿐이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진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사실을 일컫는 단어다.
태고로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힌 진리라는 개념은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지혜이자 기반으로 숭배되며 자연철학의 궁극적 목표로 자리잡았다.
현재는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상대론적 관점과 영원한 진리가 있다는 절대론적 관점이 충돌하긴 하지만 말이다.
성초은은 영원불멸한 진리의 존재를 딱히 믿지 않는 편이다.
이론과 가설이 그렇듯, 합리적인 명제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반박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설사 어떠한 명제가 영원한 참이라고 해도 과학자라면 그게 진리라고 무턱대고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정 명제에 대한 광적인 믿음은 또 다른 반지성적 숭배로 우화하는 까닭이다.
그런 성초은의 마음가짐은 자신이 진리라고 떠드는 불가해의 환상 속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 덕에 세기의 과학자는 재앙의 힘이 담긴 환각 속에서 패닉에 질리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잘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뒤틀리던 의식 속에서 마주한 건, 최초의 바다였다.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이 행성 위를 열심히 기어다니는 인간이란 족속의 첫 번째 요람.
장엄한, 그러나 아직은 미약한 생물이 최초로 등장하는 지점이다.
그녀의 시야가 심해로 가라앉는다.
막연한 공포를 느낀 성초은은 마음을 다잡으며 자기가 아는 한 모든 수식들을 되는대로 떠올렸다.
졸음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많이 쓰던 방식이다.
끝없이, 끝없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과학자의 시야가 칠흑 속에서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것은 아마도 태양.
해저 속에 있을 리가 없는 거대한 에너지였다.
'미, 미친'
태양빛이 커지고 시야가 밝게 물든다.
그녀의 눈동자에 제일 먼저 비친 건, 다름 아닌 태양의 정체였다.
해저 속에서 주황빛으로 작열하던 빛덩이는 태양이 아니라 재앙의 눈동자였다.
'천변으로의 길!?'
재앙백과에 수록된 삽화를 떠올린 성초은이 경악했다.
눈을 중심으로 구축된, 축구장 500개 면적의 육벽으로 싸인 세계.
성초은이 끌려들어온 거대한 구 안에는 수많은 생명의 모습이 있었다.
피어나는 꽃잎, 거대한 늑대괴물, 어미를 찾는 새끼양, 미친듯이 허리를 놀리는 유니콘과 그 아래에서 정기를 뽑아내는 서큐버스
여섯 날개의 천사와 퍼런 이무기가 뒤엉켜 싸우고, 물을 뿜는 톱니 이빨의 연꽃을 본 거구의 닭이 몸을 오들오들 떤다.
아직은 미숙한 세기의 과학자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연거푸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드넓은 구형의 육벽이 고동하며 끔찍한 힘줄을 꿀렁인다.
"."
제 나름대로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던 생태계가 돌연 저희들끼리 엉겨붙기 시작한다.
피와 가죽을 한데 모으며 뭉친다.
각자의 혈관이 허공으로 폭사하듯 너울거리며 서로를 껴안는다.
당연하게도, 끔찍한 광경을 자랑하는 융합의 물결은 성초은에게도 아귀를 뻗어왔다.
'젠장.'
성초은이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비로소 교수가 말한 진리가 무엇인지 대충 깨달았다.
"이래서 생물전공 새끼들은!"
진화.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등장한 영혼의 그릇, 생물체의 극적인 진화.
세계법칙에 간섭하는 스피릿을 극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생물체로의 진화가 그것이다.
***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안 받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가 알기로 지금은 성초은의 휴식시간이다.
흑람마녀가 되어서도 휴식시간만 되면 하던 싸움도 멈추고 가만히 쉬던 그녀가 전화를 안 받다니, 필경 무슨 변고가 생긴 게 틀림 없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 없어."
폰을 두고 나왔을 수도 있잖아요?
"음, 그런가? 아닌데. 딴 건 몰라도 휴대폰 하나는 잘 챙기는 사람인데."
혹시 내가 요즘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런 기미는 없긴 했지만, 아무래도 근래에 조금 바빴던지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오랜만에 좀 선배님도 만나면서 영혼탐지기도 한 번 찍어보고 와야겠다.'
나는 그렇게 연구계 건물로 발길을 향했다.
***
똑똑.
성초은이 있을 409호 연구실에 다다랐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똑똑 두들기곤 문짝에 귀를 갖다댔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똑똑.
"선배님! 저 왔어요!"
다시 한 번 문짝을 두들기며 외쳐보지만, 반응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성초은이 일과 중에 자기 연구실에서 벗어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쓰러졌나?'
그럴 수도 있겠다.
성초은이 요즘 한가하다고는 하나, 성격상 또 어딘가에 꽂혀서 죽어라 연구만 하다 픽 쓰러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선배님~ 들어갈게요?"
그렇게 말한뒤 문고리를 당겼다.
철컥.
문고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살 방지를 이유로 연구실의 문은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무척이나 수상한 일이다.
누군가가 문이 열리지 않게 안에서 마주 당기고 있다는 뜻이니까.
문고리를 당기는 힘을 더했음에도 문고리는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비실비실한 성초은이 내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이건 다른 누군가다.
나는 무언가의 변고를 눈치 채고 망설임 없이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합!"
콰작!
힘을 줘서 문고리를 부순 뒤, 문짝을 걷어찼다.
연구실 안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409호 연구실의 주인, 성초은 대신 흰 가운을 입은 백발의 중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원주인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만들다 만 마력회로만이 빛을 발할 뿐.
혹시 연구실 번호를 잘못 왔나 싶어서 고개를 틀어 팻말을 봤다.
409호. 성초은의 연구실이 맞다.
"저기 여기 성초은 학생회장님 연구실이 아닌가요?"
"맞네만. 그런데 초은 양은 지금 없다네."
"네? 이상하다. 선배님이 연구소에서 나와요? 지금 6시 밖에 안 됐잖아요. 적어도 11시까지는 계시는 걸로 아는데"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더군."
성초은이 화장실을 가?
자기가 직접 퇴실시간 전까지 참는다고 말했는데.
어딘가 어색한 자세로 앉은 남자를 훑어보며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네, 뭐, 그래요. 그 사람도 인간이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세요? 문은 왜 잡고 계셨고?"
"생명마력반응학 교수라네. 이름은 홍규호고. 문고리는 고장난게 아닌가 싶은데. 밖에서 열면 가끔 저런다네."
"오, 생명마력반응학이요? 그런데 선배님은 이질마력분석학 아니에요? 왜 여기 계세요?"
"외부인에게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네. 학생과 교수 간의 일이라서. 자네는 누군가?"
"아, 실례했네요. 잠시 명함이"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내 손이 쥔 건, 물론 차륜형 수리검이었다.
팟!
한 번에 세 개를 던졌다.
난데 없는 기습을 허용한 교수가 의자 뒤로 쓰러지며 가슴에서 피를 뿜었다.
나는 문답무용으로 송곳니 학살자의 검병을 잡았다.
'어딜 속이려고 하고 있어.'
연구실의 바닥은 정체 모를 기름으로 흥건했다.
기름 자국은 바닥에 난잡한 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는 몸에 방수성 기름을 코팅하고 다니는 스몰 크라켄이 남기는 흔적과 완전히 일치했다.
"케아아아아아아───!!!!!"
그 때, 교수가 갑작스럽게 폭음을 내지르며 몸을 가눴다.
인간의 성대가 냈다고는 믿기 힘든 음파가 연구실 전체를 진동시키며 성초은의 노고가 담긴 마력반응 표본들을 모조리 깨트려버렸다.
나 또한 고막이 뒤흔들렸지만, 다행히도 살짝 파열된 수준에 그쳤다.
비산하는 유리조각 사이에서 뽑혀 나오는 촉수를 노려보며 검병을 당겼다.
키이이이잉──!!
시원한 바람이 연구실을 뒤흔든다.
한껏 당긴 허리가 폭풍의 추진력과 함께하며 칼날을 밀어붙였다.
은빛 검광은 교수의 뇌가 있는 두개골을 정확히 갈랐다.
"케아아아악──!!!"
주름진 이마를 깔끔하게 잘린 교수가 다시 한 번 폭음을 질렀다.
이전보다 확실히 약해진 폭음이긴 하지만, 나는 근육통으로 울려오는 팔을 가누며 뒤로 물러섰다.
뇌를 조금 파괴한 것 정도로는 변절자를 일거에 죽일 수 없었으니.
'쳇.'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다발의 촉수는 계속 움직여 행동을 마친 내게 마구 뻗어왔다.
당황하지 않고 칼을 떨군 뒤 최대한 빠르게 부적을 뽑아 적어내렸다.
혹사 당한 오른팔이 통증을 호소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화火!'
이윽고 눈 앞으로 가득 뻗어온 촉수가 몸을 결박한다.
나는 미끈한 촉수의 감각을 무시하며 보랏빛 불꽃을 한 촉수에 붙였다.
"케아아아아악!!!!"
이전의 폭음과 다르게, 그것은 분명한 신음이었다.
화火가 기름진 촉수다발에 삽시간에 번져나가며 타는 냄새를 풍겼다.
풍성하게 피어오른 불꽃과 함께 빠르게 물러나는 촉수의 꼴은 언뜻 보라색 꽃과 같았다.
"크윽 끄아아아압!!!!"
교수가 꽤 인간적인 신음을 내지르며 전신에 흰 거품을 일으켰다.
게거품을 응용해 생성한 거품에 온 몸이 둘러싸인 교수는 비로소 열기에서 견딜만 해졌는지 날 노려보며 촉수를 꿈틀거렸다.
"무턱대고 공격이라니 끅. 너무하지 않나."
"선배님을 어떻게 한 거야?"
"그 친구라면 여기 있네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촉수가 움직여 책상 뒤에 숨겨놨던 성초은을 질질 끌어 내보였다.
당연히 의식은 없는 상태다.
아마도 환각 속을 헤매는 중이겠지.
'젠장.'
뒤틀렸다.
너무 뒤틀렸다.
내게 나타난 두 번째 영웅담과 일본의 카타스트로피, 너무 빨리 마각을 드러낸 우월까지.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
우월은 천변으로의 길을 따르는 추종자들로, 인간에 각종 괴물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합성해 더 우월한 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그들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는 스피릿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생명체를 만들어 물리법칙에 숨겨진 하나의 비밀을 찾는 것이다.
육체변형 따위로 영혼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후에 성초은이 천변으로의 길을 장악하면서 세 번째 재앙이 되는 걸 생각하면, 그녀를 우월에 끌어들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홍규호는 필히 견제했어야 할 인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참 후의 일이라 생각해 이름과 근황만 생각날 때마다 들어두고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두 번째 재앙, 자연역습이 일어난 연후에야 비로소 변절자가 되는 인물이기에 방심해버린 것이다.
"너, 대체 언제부터 변절한 거야?"
"변절? 아 인위진화를 말한 건가. 한 5일 됐다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우월이 너한테 접촉한지 5일이 됐다고? 진짜 뭐가 어떻게"
불타는 거품을 천천히 바닥에 벗어내 몸에서 불을 소거한 교수가 끄응, 하며 어깨를 돌렸다.
반 정도 잘린 두뇌를 손에 든 그가 뚜껑이 열린 두개골 쪽을 쓰다듬으며 아미를 한껏 좁혔다.
"젠장, 자네 때문에 바보가 된 느낌이군. 간단한 세자리 암산도 못하게 됐어. 뇌는 함부로 붙였다 뗐다 하는 게 아닌데 말일세."
선타로 목도 아닌 뇌를 베어낸 이유는 뇌가 재생이 힘든 기관이기 때문이다.
뇌의 위쪽이 날아갔으니 당분간 몸을 사용하는데 큰 제약을 받을 터다.
나불대는 꼬라지를 보면 아무래도 언어담당부위는 멀쩡한 것 같지만.
놈을 죽이기 위해 부적을 꺼내들자 교수가 다급히 성초은의 목을 촉수로 꽉 조르며 내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건 집어넣는 게 좋을 걸세. 자네 선배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목이 졸려 거친 숨소리를 내는 성초은.
나는 교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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