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뒤틀리는 국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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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는 연령제한이 없다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모두가 타고나는 본능.
그런 본능이 없었다면 인류는 선사시대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으리라.
동물 또한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그 정도는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자가 단순히 주어진 상황에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호기심을 갖는다면, 후자는 생존과 이익의 차원을 넘어서 끝없는 지식과 정보의 획득을 탐하는 '배움'의 욕구와 연결된다.
동물은 불을 두려워해 멀리 도망치지만 인간은 불길에 돌멩이나 나무 따위를 던져보면서 활용법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흐릿한 명제들 너머로 우주의 섭리를 내다보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심해 열수구에서 우연히 합성된 아미노산으로부터 비롯된 존재 치고는 무척이나 멀리 온 것이다.
성초은 또한 수많은 논문 더미를 밟고 서서 섭리를 내다보려는 과학자 중 하나이다.
아직 어려 박사학위조차 따지 못한 풋내기지만, 그녀의 흑백결합 이론이 상보관계의 마력결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면서 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
성초은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다.
천변으로의 길이 만드는 거대한 군체의식이 함유된 환각.
각기 다른 생물들이 고기벽 안에서 마구 뭉쳐 하나가 되는 환각이다.
성초은 또한 그 흐름에 저항할 수 없었다.
터져나온 혈관들은 성초은의 몸을 찢고, 수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두뇌를 해체해 열량 생산원으로 소비했다.
하지만.
그녀의 뇌가 담고 있던 재능과 지혜가 덧없는 트림으로 흩어질 때에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끔찍한 생물체가 생성하는 폭력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성초은의 혼은 살아있다.
끓는 물 속에 떨어진 각설탕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려야 했을 그녀의 의식이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났다.
그녀는 천변으로의 길이 보여주는 드넓은 의식의 확장을 경험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질 수 없었다.
거대한 군체의식에 묻히기에는 성초은의 혼은 너무 깊었으니.
'아.'
천변으로의 길이 보이는 환각은 피해자로 하여금 의식의 합일을 경험시켜 자연히 복종하게 만든다.
피해자가 환각에서 깨어나더라도 그 감각은 유지되며, 융합생명체로의 진화를 갈망하도록 개변당한다.
하지만 성초은은 그런 얕은 수에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더욱 나아갈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상에 파고든 재앙의 관념에게 순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천변만화???化니 뭐니 해도 결국 지구 표면에 기생하는 생명체의 일종일 뿐.
먼 옛날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었던 우주의 한줌 빈 공간보다 위대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떠올린 것은 허블 울트라 딥 필드.
우주의 풍경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찍을 당시엔 모두가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했지만 망원경이 가져다준 사진은 그 무엇보다 장엄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칠흑 속에는,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일만 개가 훌쩍 넘는 은하가 칠흑을 빽빽히 수놓고 있었다.
'하.'
생명은 위대하지만, 우주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성초은의 관심사는 생명의 의식이나 진화 따위가 아니다.
세계의 본질이다.
우주,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처녀자리 초은하단, 국부 은하군, 우리 은하, 오리온자리 나선팔, 태양계, 지구, 유라시아 대륙, 한반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극정 아카데미, 연구계, 4학년.
성초은은 우주에 비해 한없이 나약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꿈꾼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 충족에서 오는 작은 만족을 위해.
'하찮아라.'
그녀를 깎아내려던 잡스러운 유혹이 일거에 멎는다.
진리를 향해 달리는 과학자의 열망은 거짓된 흐름을 장악한다.
환각은, 더 이상 재앙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을 덮고 있던 육벽이 갈라지며 재앙이 모습을 드러낸다.
불가해한 모습을 한 괴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성초은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존재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후회할 것이다.
섭리와 맞닿은 탐구자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진화의 재앙에게, 가소로움과 분노를 담아 비아냥거렸다.
"니애미."
그녀는 환각을 뜯어냈다.
***
차원충돌 이후 아인델로제의 힘인 신성력이 지구에 등장했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의사라는 직업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사성 질환과 호르몬 이상, 선천적 장애와 정신질환 등은 신성력으로 고칠 수 없어 현대의학으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형시술 쪽은 감히 신성력으로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더더욱.
물론 의학계도 변화는 생겼다.
정밀한 수술용 기계를 메스에 정교한 검기를 두를 수 있는 전문적 의사가 밀어냈고, 마취를 비롯한 주사도 높은 수준의 슬립마법으로 대체하는 시대가 왔다.
옛날처럼 많은 지식과 인품만을 요구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젠 말 그대로 문무겸비가 필요하지 예나 지금이나 완벽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직업이네.'
그럼에도 의사는 아직도 드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전문직이다.
탄탄대로가 보장된 극정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대개 헌터와 인퀴지터 다음으로 의사를 지망하니, 그 인기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말이 필요 없으리라.
"성초은 환자는 방금 깨어났다고 하네요. 다른 중독증세도 없고, 다친 곳도 없으니까요. 아, 넘어지면서 무릎에 찰과상이 조금 생긴 것 빼고요."
"대뇌피질 지도에는 아무 이상 없는 거 맞죠?"
"초입방체 마법을 사용해서 스캔해본 결과 아무 이상도 없었어요. 오히려 정신이 굳세어진 것 같아요. 걱정할 것 없답니다."
극정 아카데미의 선배로 보이는 의사는 그리 말하며 병실의 문을 열었다.
창 너머로 지는 노을이 꽤 인상적인 병실은 무척이나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이 모인 장소였으니 당연했다.
성초은은 창가에 있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꽤 멀쩡한 자세를 하고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피곤에 찌들었던 이전과 달리 표정에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게 보기 좋았다.
환각은 어찌어찌 잘 넘겨낸 모양이다.
"선배님!"
"어? 시현 후배!"
성초은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날 맞이했다.
태블릿은 빽빽한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파일의 제목을 힐끔 보니, 의지와 스피릿에 관한 논문의 내용이었다.
"이건?"
"다음 연구주제예요. 일어나자마자 그냥 이걸 해봐야겠다, 싶어서."
우월의 추종자가 원하는 바를 떠올린 나는 순간 식겁해서 그녀를 바라봤지만, 성초은은 참으로 맑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정신오염의 흔적 따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혹시 정신이 흐리다거나, 몸에 무언가 붙이고 싶은 충동이 든다거나, 그런 거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없는데요. 제가 다 뜯어버렸거든요."
당당하게 선언한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주먹을 슉 뻗었다.
의사가 말하길 대뇌피질 지도에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니, 멀쩡한 게 맞을 것이다.
"휴우 정말이죠? 그 교수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죠? 정말?"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건 인간지성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근데 그건 왜요? 환각의 자세한 내용을 아시나요?"
"아, 그게 잘 몰라요! 그냥 정황상 세뇌 비슷한 걸 당한 게 아닐까 싶어서."
성초은은 내 말에 피식 웃어보이곤 자세를 고쳐 앉더니 나와 머리를 맞대었다.
뭐하는 건가 싶어 머리를 빼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눈 앞이 꺼메지더니 스피릿이 요동쳤다.
어딜 감히
칠흑여제의 목소리와 함께 흔들리던 스피릿이 가라앉는다.
칠흑여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어둠 사이에서 수많은 빛이 요요히 반짝였다.
그것은 두려울 정도로 많은 은하였다.
"흐익!?"
"으 머리 아파. 어때요?"
"뭐, 뭘 하신 거에요!?"
"잠시 제 혼을 당신이랑 연결했어요. 환각에 휩쓸리면서 깨달은 건데, 처음해보네요."
황급히 머리를 빼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성초은의 모습이 보였다.
혼을 연결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대체 뭘 배워 온 거야?'
원작에서의 행보를 생각하면 아예 이해 못할 일은 아니긴 하다.
극정 아카데미 파괴 등의 여러 사건으로 잔뜩 피폐해진 그녀는 다시 연구를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홍규호를 따라 우월에 가입하며 천변으로의 길과 하나가 된다.
그렇게 사라져야 했을 그녀는 도리어 재앙의 군체의식을 제압하고 세 번째 재앙, 흑람마녀로 우화한다.
자신의 것이 아닌 혼을 휘두르는 법을 배운 것이다.
"."
"어때요? 제 스피릿이 보이던가요? 제 스피릿은 어떻게 생겼나요?"
"우주가 보였어요. 별이랑 은하가 잔뜩 박힌."
"와아, 제 혼은 우주 망원경으로 관측한 우주인가봐요. 후배님은 완전 시꺼먼 검은색이던데요? 스피릿은 보라색이던데. 음. 혼의 형태랑 다를 수가 있나?"
아무래도 칠흑여제가 나서서 혼의 접촉을 막은 모양이다.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성초은의 무릎 위에 놓인 태블릿을 다시 한 번 봤다.
그래서 논문의 주제를 의지와 스피릿으로 한 건가 보다.
"흠흠. 아무튼, 휩쓸리던 도중에 이걸 깨달아서 환각을 무너트릴 수 있었어요. 분위기 타서 욕도 조금 했고"
"음 영혼을 연결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무슨 의미인데요?"
우월이 원하던 최종형태가 당신이란 소리지, 이 멍청아.
스피릿을 주술이라는 틀 없이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단 소리니까.
"아니에요. 혹시 그걸로 논문 쓸 생각은 아니죠?"
"네? 쓰면 안 돼요? 대발견인데? 노벨상을 휩쓸 거라고요?"
"학회에 미친 과학자들 많은 거 알잖아요. 납치 당해서 뇌 둥둥 당하고 싶으면 그러시든가."
"앗 그럼 독자연구로 해야겠네요."
성초은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괜히 머리가 아파져 고개를 흔들었다.
이리도 뒤틀리는 세상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도 이건 나쁜 일은 아니겠지'
조금 더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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