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만남과 진실 (1)
* * *
성초은이 혼을 다루는 법을 깨우쳤다곤 해도,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녀는 스피릿 사용자가 아니라 마력 사용자였으니 말이다.
심장에서 정류기관을 제거하지 않는 한은 다른 스피릿 사용자에게 머리를 맞대고 쓸 수 밖에 없는 능력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초은을 정령부에 있는 샬롯에게 데려갔다.
능력을 연구하고 싶다는 그녀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일이었다.
앞으로는 나 대신 샬롯이 성초은의 피실험자 겸 조수가 될 것이다.
절대 샬롯에게 짬처리를 한 건 아니다.
"우와 이런 말은 조금 그렇긴 한데, 머릿속이 완전 꽃밭이네요?"
"칭찬입니까?"
"칭찬은 아니죠. 전 그저 보이는대로 말했을 뿐인데요, 뭐."
"."
샬롯이 어처구니 없는 눈빛으로 성초은을 노려봤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초은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를 외쳤다.
얼떨결에 나 대신 모르모트가 된 샬롯은 정령을 품에 함뿍 껴안고 무척이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있는 시현 학생에게 하면 안 됩니까? 저는 지금 많이 바쁩니다만."
"후배님보다요? 뭘 하셔야 하는데요?"
"정령들 밥 줘야 됩니다."
"이상한 소리 말고 이마나 대세요."
정령의 식사권을 무시하는 발언에 둘의 몸에 타고 있던 정령들이 일거에 술렁였지만, 성초은은 기어코 샬롯과 영혼을 재차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샬롯이 해롱거리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으음 우혜나한테도 데려가보는 게 좋을까. 그러고 보니 혼을 제압할 수 있다면 망령한테도 적용이 되는 건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수많은 귀신을 수족처럼 부리는 사령술사가 될 수도 있겠다.
물론 혼에 무리가 가는 짓은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지만.
둘에게서 신경을 거두고 내 손에 들린 방울을 내려다봤다.
샬롯에게서 원시의 힘을 쓰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아무래도 잘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정령들은 나만 보면 기겁을 했으니.
짤랑, 짤랑.
원시의 힘을 이용하여 정령을 불러봤지만, 정령부의 정령들은 방울소리를 듣더니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질 뿐이었다.
내게 천연덕스럽게 다가오는 건 일전에 공들여서 쓰다듬어줬던 번개의 하급정령, 쿨롱 한 개체 뿐.
모두에게 버림 받은 나는 어깨 위에 앉아 꺄르륵대는 쿨롱을 쓰다듬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스읏, 스읏
우웅, 헤헤
"왜 다른 아이들은 나를 싫어할까? 내가 샬롯보다 못한 게 뭐라고"
응? 그치만 보라순이 음습하잖아! 끈적끈적하고
"."
순간 옳은 말을 하는 쿨롱에게 딱밤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눌러 참았다.
이 친구마저 없으면 나는 정령부의 모든 정령에게 버림 받았다는 흔치 않은 업적을 세우게 되니까.
"휴우!! 이번엔 진짜 알 것 같은데요? 한 번 더!!"
"싫습니다!"
"왜, 왜요?"
"처음 보는 여자랑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건 뭔가 잘못 됐습니다!"
드물게도 말 끝에 느낌표를 붙인 샬롯은 정령들을 품에 한아름 안고 이쪽으로 도망쳤다.
그녀의 정령들은 내 음습한 스피릿을 느꼈는지 연신 비명을 지르며 꼬물꼬물 샬롯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이 대신 해주십시오. 이걸 왜 제게 시킵니까?"
"너 저거 시급 받고 하는 일 아니었어?"
"근로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은 불법 노동이잖습니까. 공정위에 제소할 겁니다."
"샬롯 후배애!!! 시급 더 줄 테니까 와봐!!!"
"흥. 어쩔 수 없네요. 노조의 승리입니다."
"?"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 출신 아니랄까봐 태세전환이 야무지다.
"아, 맞다 그거 잘 되고 있습니까? 꽤 애먹으시던데."
"정령들이 불러도 오질 않아 어쩐지 쉽게 가르쳐주더라니."
"당연하죠. 친화력이 마이너스인 걸. 그래도 원시의 힘이 정령 소환에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스피릿이라면 광화 같은 건 유리하겠죠."
"난 머리 굴려서 싸우는 타입이라 광화는 조금 그런데"
"그것까진 제 알 바 아닙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샬롯을 노려보자 그녀는 고고하게 고개를 돌리곤 성초은에게 걸어갔다.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정령들이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폴짝폴짝 뛰노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원시의 힘으로 정령을 제대로 다루려면 다른 주술을 하나 더 익혀야 할 듯 싶었다.
'토템술 아, 젠장. 이건 또 어떻게 한대."
세간엔 이런 농담이 돌아다닌다.
주술사가 마법사보다 우월한 이유는, 직접 계산하고 뭐하고 해야 하는 마법과 달리 주술은 토템만 몇 개 박아 놓으면 정령과 귀신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라고.
그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토템술은 결코 간편한 주술이 아니다.
토템을 만드는 작업 자체가 무척이나 고역이니.
"."
첫 번째 재앙, 영원한 순회가 침공해오기까지는 약 두 달.
영원한 순회가 한반도에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는 사회안정을 이유로 국가에 의해 통제된 기밀이지만, 나는 인터넷 게시글의 형태로 사회 이곳저곳에 그 정보를 퍼트렸다.
온갖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추천수 조작기를 이용해 영원한 순회가 한국에 들이닥친다는 글을 상단에 올린 것이다.
단순히 미친놈의 개소리로 끝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도록, 각종 자료들을 취합해 그럴듯한 근거를 첨부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 얼기설기 짜맞춘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실상을 아는 전문가들은 함부로 틀렸다는 기고를 내지 못했다.
내가 적은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주작기를 사느라 돈 좀 깨졌지 흠흠, 아무튼 중국산 언데드를 상대하려면 토템 몇 개는 있는 편이 좋을 거야. 그래도 토템술은 엔키트에 부탁하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가소희는 그때까지 오긴 하겠지?'
국가가 부른다면 친구고 뭐고 다 제치고 달려오긴 할 테지만 헌터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칠성 하나가 빠졌다는 건 무척이나 큰일이다.
원작에서야 설정이 없는 둘을 뺀 다섯으로도 재앙을 물리치는 데는 충분했지만, 그래도 피해를 줄이려면 가소희가 제때 돌아와 주는 게 좋을 테니.
'빨리 오세요.'
혼검기는 아직 못 만들었지만.
***
그녀의 우려와 달리, 가소희는 일본에서 무척이나 한가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때 아닌 태풍으로 인해 카타스트로피가 태평양의 재앙을 유인하는데 실패하면서 혼란이 금방 제압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본을 구한 그 태풍을 가미카제의 재림이니 뭐니 하면서 신이 일본을 굽어 살핀다고 떠들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 태풍은 S급 히어로인 무녀가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말 그대로 망할 뻔 했느니라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진짜 망했겠지 휴우."
"진짜로 태풍을 불러왔을 땐 내 눈을 의심했는데 말야."
"이미 형성된 거였으니까 대륙으로 빠질 걸 이쪽으로 부르느라 애먹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인 일이 아니겠느냐아"
무녀, 히라 아유하가 탁자 위에 고개를 박았다.
가소희에게서 카타스트로피의 수법을 들은 그녀는 사흘밤낮을 쉬지 않고 제를 지냈고, 결국 태풍의 방향을 틀어 일본을 지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주목을 받기 싫어하는 무녀는 자신이 태풍을 불렀다는 사실을 숨겼기에 그녀에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너나 나나 귀찮은 거 싫어하는 건 같구나.'
가소희는 좁은 방 안에 널린 게임기와 게임 패키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일본의 환란이 제압되면서 본의 아니게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게 된 가소희는 마음에 드는 게임 하나를 골라 콘솔에 삽입했다.
다름 아닌 '마스터헌터'다.
"으응? 마스터헌터? 할 줄 아는 것이냐?"
"당연하지. 내가 이것 때문에 헌터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헌터라 여기에 나오는 거랑은 많이 다르지 않느냐?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은 괴물에게서 부스러기 하나 못 가져간다던데 말이다."
"그러게.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도 히어로제를 실시하는 게 나을 텐데 말야. 언젠가 사건 하나 터질 것 같아. 거대 길드 쪽에서 불만이 엄청 많다나."
가소희는 나날이 울상이 되어가는 김동규를 생각하고 깊이 한숨지었다.
가뜩이나 작은 파이를 나눠먹던 사대 길드는 이번 동원령의 강도에 따라 존속 여부가 결정날 것이다.
정부가 많이 빼앗는다면 싹 다 무너질 테고, 조금 빼앗는다면 한두 곳만 망하는 정도.
그 한두 곳이 김동규의 산성비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지만 말이다.
'정부가 욕심을 적당히 부려야 할 텐데. 헌터들의 불만이 엄청 큰데 말야.'
헌터를 영웅으로 보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모두들 겉으로는 헌터들을 존경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기득권이라면서 온갖 견제와 압박을 서슴지 않으니.
북쪽 전선의 헌터들이 하루만 파업에 들어가도 대한민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말이다.
"기득권이라. B급 괴수 한 마리에 수십 억을 부르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갔는데 왜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걸까."
"흐음. 내게 하소연해도 말해줄 수 있는 건 없느니라. 그래도 이민을 오고 싶다면 이 집에 방 하나는 마련해주겠노라."
"한국이 망하기 전까진 그럴 생각 없거든. 차라리 네가 오는 게 어때? S급 히어로라는 게 이딴 곳에서 살고 싶니?"
"흥! 되도 않는 소리 말거라. 이 나라에는 닝텡도가 있고 캡숑이 있는데 대체 어딜 간단 말이냐."
무녀는 그리 읊조리고는 게임 화면을 봤다.
가소희가 이 게임으로 헌터의 길을 걸었다는 게 마냥 헛말은 아닌지, 꽤나 능숙한 컨트롤이었다.
한참이나 화면을 넋 놓고 바라보던 무녀가 귀엽게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그래도 이번엔 한국에 좀 갔다 오기로 했느니라. 자네와 함께 말이지."
"한국? 왜?"
"무녀의 직감이 부른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느냐?"
"당연히 안 믿지. 뭣하러 오는 건데? 관광?"
무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TV 받침대의 서랍에서 산통을 꺼냈다.
몇 번 통을 흔들던 그녀는 하나의 점괘를 뽑았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천풍구?風?.
하늘 아래 만나는 바람을 형상화한 괘로서, 새로운 만남을 뜻하는 육십사괘다.
"그냥, 알 것 없느니라."
***
"천풍구?風?! 조만간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만남인데요?"
"글쎄요. 그건 복채가 필요한 유료 서비스라서!"
요란한 디자인의 무복을 걸친 사내가 대답을 회피했다.
엔키트를 통해 부른 무당인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무료로 점을 봐준다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마음으로 점을 쳤다.
무료라길래 혹해서 본 건데 설마 점괘의 구체적인 해석에 복채를 요구할 줄이야.
'이래서 무당이란 족속이란 믿은 내가 바보지. 어휴.'
한순간이나마 휩쓸렸던 내가 밉다.
"흠, 싫으시다면 됐습니다. 이래서 비무당 주술사들이란! 사람을 너무 안 믿는다니까요. 큭큭."
"비무당이란 단어는 대체 무슨 조어예요?"
"자, 바로 시작하죠! 이래봬도 바쁜 몸이니. 일단 머리카락이나 몇 개 뽑아주십쇼."
무당의 점집으로 변한 암살부 투척 연습장.
사내는 노련한 몸짓으로 곳곳에 위패를 설치하며 향에 불을 켰다.
'쯧, 한 번 볼까.'
무당은 다른 건 몰라도 숨은 영혼 찾기의 대가들이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