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천한 행복과 숭고한 우울
* * *
몇 년 전, 한국의 교육부는 괴상망측한 정책을 시행했다.
문무통합적 인재 양성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극정 아카데미에 강요한 것이다.
요즘 들어 학계에서 극정 아카데미의 연구계가 잘 나가니까 자신들이 잘한 줄 알고 기고만장해져서 벌인 패악이다.
"으 으으윽"
평생을 외골수 무인으로 살아온 천의린.
물리학 교과서를 읽다 머리에 쥐가 난 그녀는 되도 않는 정책을 시행한 교육부 장관에게 깊은 살인충동을 느꼈다.
"으으 으으윽"
"저기, 의린아? 조용히 좀 해줄래?"
"썅!!!!"
마음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은 천의린은 교과서를 집어던지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말이 돼!??? 내가 중력 퍼펙트 에너지 같은 걸 대체 왜 알아야 돼!!!!! 헌터 같은 애들이 추락사로 죽는 거 봤어!??? 세상 쓸모 없는 공부를 대체 왜 해야 하냐고!!!!! 이럴 시간에 대련이라도 한 번 더 붙이란 말야!!!!!"
"퍼펙트가 아니라 퍼텐셜이겠지. 그리고 다른 애들 공부하는데 소리를 왜 지르니?"
"으아아아아악!!!!!!"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채유하가 눈치를 주자 천의린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4층 높이의 교실을 탈출하고 만 것이다.
"."
"와, 떨어져도 안 죽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네? 대단한 여자야."
천의린의 급발진을 본 화수연이 키득키득 웃었다.
채유하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책에 눈을 돌렸다.
전투계 학생들도 공간벡터의 내적을 배워야 하는 시대다.
모든 필기시험이 절대평가로 이루어진다고는 하나, 난이도는 쓸데 없이 어렵게 내기 때문에 공부와 담을 쌓은 경우가 많은 전투계 학생들은 필기시험 시즌이 다가오면 무척이나 애를 먹곤 한다.
물론, 어딜 가도 건성건성 해도 잘하는 애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나저나 넌 그런 거나 읽으면서 천의린한테 눈치를 주니? 진짜 양심 없다."
"이게 왜? 난 지금 문학을 대비해서 독해력을 키우는 중이거든."
채유하는 읽고 있던 로맨스 소설을 덮으며 화수연을 째려봤다.
고양이 입을 하고 시선을 슬쩍 피한 화수연이 제 앞에 놓인 책을 채유하 앞에 옮겨 놨다.
"그런 거나 읽지 말구, 이것 좀 알려주라! 너무 어려운데."
"나 이런 거 설명 못하는 거 알잖아. 시현이한테 물어봐."
"시현이 없던데? 한참 전부터 계속 뭔가 읽더니 갑자기 나가서는 안 들어와. 야설이라도 읽은 걸까? 꺄아, 야해!"
"야, 야설"
채유하는 책상 위의 로맨스 소설을 슬금슬금 숨기며 얼굴을 붉혔다.
"뭘 부끄러워해? 아무튼 시현이 오면 물어봐야겠다. 아니지? 찾아갈까? 어딨을까?"
"흠흠, 글쎄? 저 돌머리도 그렇고 자습시간에 막 나가도 되는지 몰라. 너도 그냥 가만히 있어."
책상 밑에서 책에 커버를 씌운 채유하가 고개를 저었다.
***
토템의 사용법은 크게 둘로 나뉜다.
땅에 꽂아서 쓰는 설치형 토템, 직접 휘둘러서 사용하는 둔기형 토템.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발동에 다른 의식이 필요한지에 따라 또다시 나뉘지만 그런 건 당장은 크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의뢰를 통해 권하율에게 받은 서적을 보며 공원 사이를 거닐었다.
샤먼들이나 쓰는 주술서 주제에 고풍스러운 적색으로 마감된 표지.
토템술, 재버워키였다.
[재버워키(A)]
참으로 Jabberwocky한 설명서군요?!
"셀레스티.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아?"
= 네? 이상한 뭐요? 이상한 나라의 아리스? 무슨 별호 같은 건가?
"영웅담만 읽지 말고 동화부터 좀 봐, 이 씹덕아."
= 씨, 씹덕 아니에요!!!! 영웅담은 씹덕 아니거든요!!!!
재버워키는 타 토템술에 비해 특출난 장점을 갖지는 않는다.
대신, 짧은 시간 안에 숙달할 수 있다.
이 얇은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바로 숙련도를 S까지 찍을 수 있으니.
'문제는 해석이 쉽지 않다는 거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재버워키라는 시의 이름을 딴 주술.
현재도 정확한 해석을 알 수 없는 시를 모티브로 한 만큼 혼자서 이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장 첫 장만 펴도 '굄시락굄시락하는 하날우름이 그대게 삭식였다네' 라는 이상한 문구가 나올 정도.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된다면 애초에 이걸 구하지도 않았을 거다.
"다 읽었다."
= 이, 이해가 돼요?! 말 그대로 읽기만 한 거 아니에요??
괴상하기 짝이 없는 책을 덮은 뒤 오랜만에 정보창을 켰다.
이름: 정시현
진명: 영웅스러운 진보랏빛 주술사, 스피릿 각성자
특화: 제사(A), 부적술 문자의 기적(A), 일반 도법(C), 체술 죽은 척(S), 장송곡 황천을 걸어갈 그대를 위해(B), 칼춤 화편검무(D), 원시의 힘 태초부름(D), 토템술 재버워키(S)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정말 많이도 익혔다.
저 중에서 제대로 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 '문자의 기적'과 '죽은 척' 밖에 없지만 말이다.
'있는 것만 제대로 소화하자.'
굳이 따지자면 추후에 문신술이나 저주술 따위도 익힐 수 있겠지만 그건 지금 당장 힘들 테니 있는 거라도 잘 연습해서 쓰는 게 이로울 터다.
지랄맞은 도법은 빼고.
'아무튼 토템술은 익혔어. 숙련도도 S고.'
나도 많이 까먹는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다페르헤이드의 개발자다.
특히 학문과 주술의 설정을 많이 담당한 개발자.
재버워키의 내용도 나와 다른 몇 명이 같이 머리를 굴려서 적은 것이니, 내가 이 책을 해석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토템술의 정수가 담긴 기이한 글귀들을 떠올리며 공원의 수풀로 들어갔다.
극정 아카데미의 공원은 사실상 숲이라 봐도 될 정도로 넓고 울창했다.
실제로 미발견 던전이 존재할 정도니, 이미 공원이라는 범주를 한참 뛰어넘은 것이다.
적당히 깊은 숲으로 들어와서 꼿꼿하게 선 참나무 하나를 골라 벴다.
걸리면 벌점 정도로 끝나지 않을 만행이지만, 걸릴 이유도 없을 뿐더러 경비대가 내 편이니 큰 상관은 없었다.
= 우와, 나빠요! 지구온난화의 화신! 정령을 부리려고 자연을 파괴하다니!!
"뭐 어때. 그런 건 냉기 마법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수백 년 전만 해도 우러름의 대상이 되던 하늘도 비행기가 발명되자 인간의 이익을 위한 항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물며 인간님의 토템을 위해 공원의 참나무 하나 쯤이야 희생 못 할까.
절대 자기합리화는 아니다.
나는 쓰러진 나무를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뒤, 단검으로 조각을 시작했다.
익살스럽게 생긴 괴물의 모습을 위에 새겨넣고 요란한 직선과 곡선을 마구 새겨넣는다.
그리고 구멍을 몇 개씩 뚫어주면 토템의 기본은 끝이다.
= 엥? 끝? 이게 뭐에요!
"당연히 이걸로 끝은 아니지. 어디까지나 기본이라니까. 이건 토템의 틀이나 다름 없어."
이제 여기에 온갖 주술적 처리를 하고 자연적인 벼락를 맞추면 끝이다.
그럼 멋진 효과를 가진 토템이 완성된다.
= 더 심하잖아요!!!!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번개를 맞추라고요!??? 어떻게 만들어요!!!!
"맞추면 되지. 마침 날씨도 우중충하니 곧 뇌우가 올 것 같은데. 서둘러야겠어."
= 에휴, 그나저나 부적으로 번개를 만들면 안 되나요? 영웅님도 진? 같은 거 쓸 수 있잖아요!
"자연적이어야 된다니까. 기상현상으로 인한 번개. 인공적으로 만든 번개를 맞추면 저주 받아. 그리고"
내 옷주머니에서 작고 노란 정령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우린 번개의 정령이 낙뢰의 유도를 도울 거거든."
= 뭐, 뭐야!! 언제 훔쳤어요, 그거!?
흥! 훔치다니! 난 물건이 아냐, 이 멍청한 보자기야!
= 머, 멍청!?? 보자기!?? 이 사대 정령에도 못 든 잡종이!!!
자, 잡종? 으아아앙 나 잡종 아냐
"야."
정령부에서 '잠시 데려온' 쿨롱을 쓰담쓰담해주며 셀레스티에게 눈치를 줬다.
쿨롱이 삐쳐서 도망가버리면 큰일이기에 혼신을 다해 쿨롱을 달랬고, 이윽고 셀레스티도 마지못해 사과하자 쿨롱은 금세 다시 웃으며 내게 몸을 부볐다.
"그러지 마, 셀레스티."
= 죄, 죄송해요
쿨롱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토템의 틀을 하나 더 만들고 등에 들쳐 멨다.
약 140cm씩 하는 토템을 161cm에 불과한 내가 메니 조금 웃기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우리 스승님한테 옷깃 수납법을 배우던가 해야지.'
토템을 옷소매에 보관하는 것도 만만찮게 웃기겠지만 말이다.
***
그 시각, 우혜나는 공원의 수풀 사이에서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랭킹전에서 인기 많은 학생을 이겼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로 처먹은 까닭이다.
모두들 그녀를 싫어했기에 아무도 욕하는 학생들을 말리지 않았고, 그건 우혜나 자신도 납득하는 바였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계도 저런 취급 받는 건 그만두고 싶지 않니? 말 한 마디면 우습게 죽여버릴 수 있는 버러지들한테 그런 취급을 받는 건 화나지 않아?
"."
언령사라는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서 한다는 게 욕 먹고 도망쳐서 엉엉 우는 거라니, 쯧. 지옥에서 네 아비가 울겠구나.
"."
그렇게 망령의 비난을 견디며 한참을 침묵하던 우혜나는 비로소 비척비척 일어서서 하늘을 봤다.
빗물이 얼굴을 때리고 천둥이 하늘을 울린다.
그녀는 차가운 빗물에 흰 머리칼을 적시며 동공을 흐렸다.
'되는 일 하나 없네.'
비참한 내 인생, 그렇게 생각하던 우혜나는 질척한 땅을 밟으며 기숙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흰 신발이 흙탕물에 젖는 게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저스름이 내릴 때 팔긋팔긋한 토우브 떼가 운덕배기에서 땅을 긁어 푸헤치네♪
"?"
그 때, 그녀의 왼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변참했네 보로고우 떼가, 엄잖은 라쓰들은 얼부짖었네♪
그녀의 주술반 후배, 정시현이 리듬을 타면서 웬 통나무를 치켜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통나무 위에선 번개의 하급정령이 신난다는 듯이 꺄르르 웃으며 귀여운 춤을 추었다.
"저건?"
후흐흐흐, 천박하기도 해라. 토템술이구나.
"토템술?"
알 것 없어, 후계. 언령에게 한참 못 미치는 잡술이니. 오랜만에 우스운 구경을 하는구나.
가문의 망령은 듣기 싫은 웃음소리로 한껏 비웃으며 검은 몸체를 들썩였다.
정말 숨 넘어갈 듯이 웃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혜나는 웃지 못했다.
그녀의 후배가 보여주는 얼핏 우습고 미개해보이는 의식이, 너무나 생명력 넘쳤기 때문이다.
재버워크를 조심해라 아들아!
물어 뜯는 이빨과 할퀴는 발톱이 있단다!
접접새를 조심해라, 피하거라!
품시품시한 밴더스내치란다!
그는 찔카로운 칼을 손에 들고
오랫 동안 쑥적을 찾아다녔는데♪
어느 날 텀텀 나무 옆에서 멈춰서고
잠시 가만히 생각에잠겼는데♪
그렇게 걸폭한 생각에 잠겼을 때,
재버워크가 눈에는 불꽃을 튀기며,
별창한 숲을 뚫고 다가올 때,
재버워크가 부글거리며!
하나, 둘! 하나, 둘! 에이 푹 에이 푹
찔카로운 칼날은 칼짓을 했네!
괴물을 죽여 머리를 잘라 들고
그는 의기팔짝 뛰어왔네♪
그대가 재버워크를 처치했나?
내 품에 안기게, 빛나는 자네!
아 멋진 날이구나! 만세! 만세!
그는 기뻐 킁낄댔네♪
저스름이 내릴 때 팔긋팔긋한 토우브 떼가
운덕배기에서 땅을 긁어 푸헤치네♪
모두 변참했네 보로고우 떼가,
엄잖은 라쓰들은 얼부짖었네♪
무슨 의미인지 모를 흥겨운 노래가 끝나자,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매서운 번개가 정시현이 든 토템에 내리꽂히며 우혜나의 시야를 흐렸다.
와아!! 됐다!! 보라순이야!! 됐어!!
= 으와아 번개 맞는 건 짜릿하네요.
"휴우,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뭐라 조잘대는 목소리들과, 그에 답하는 정시현.
우혜나는 비가 오고 벼락이 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차례 웃었다.
같은 공간에,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도, 한 쪽은 죽을 만큼 우울한데 다른 한 쪽은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니.
'고마워.'
우혜나는 손을 뻗고는, 한 마디를 했다.
조금이나마 후배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축복하노라.]"
번개를 맞고 영험한 힘을 품게 된 토템이 희게 빛나며 맑은 빛을 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