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62화 (62/119)

〈 62화 〉 우울한 신성투사

* * *

각고의 노력 끝에 토템 두 개를 완성했다.

하나는 왠지 모를 축복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축복의 맑끗한 정령토템(A)]

­ 귀여운 정령들의 놀이터!

[듬팍한 침묵토템(B)]

­ 다들 도서관에 침묵토템 하나 정도는 있죠?

= 침묵토템? 이건 되게 무섭게 생겼네요? 맞으면 아프겠다.

"실제로 둔기로 쓰는 토템이니까. 맞으면 침묵하게 되는."

= 그거 물리적인 의미는 아니죠?

"글쎄?"

첫 번째로 만든 정령토템은 설치형 토템.

토템술을 통해 활성화하면 정령을 불러 모으는데 도움을 주는 효과를 갖고 있어 내게 딱 맞는 토템이다.

물론, 대놓고 설치하면 적에게 파괴 당하기 십상이니 근처 어딘가에 잘 숨겨두고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다.

두 번째로 만든 침묵토템은 둔기형 토템.

둔기형 토템답게 번개를 맞으면서 나름 적절한 크기로 변한 이 토템은, 말 그대로 대?마법사용이다.

휘둘러서 맞추면 마력흐름을 흩어버리고 잠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어서 영창을 막는 출중한 효과를 지녔다.

물론, 둔기형 토템이라고 해서 번개맞은 나무보다 더 단단해지는 건 아닌지라 사실상 일회용이긴 하다.

= 정령토템 치고는 너무 무서운 괴물이 조각되어 있는데요? 보고 도망갈 것 같은데

"괴물 표정은 웃고 있잖아. 정령들은 호의를 포착하니까 괜찮을 거야."

= 음 그럼 발동시켜봐요!

땅에 정령토템을 꽂고 휘파람을 불었다.

토템을 만들 때 불렀던 노래의 가락이 울려퍼지자, 토템에 새겨진 괴물이 한층 더 밝게 웃으며 청명한 파장을 뿌렸다.

= 으, 징그러

셀레스티는 아무래도 재버워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토템을 활성화하고 품에서 방울을 꺼내 흔들었다.

원시의 힘을 함께 발동하자 수풀 뒤에서 조그마한 정령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주머니에 있던 쿨롱은 어느새 나와선 토템 위에 앉아 손을 흔들었고, 고개를 내민 정령들은 쿨롱을 보더니 오르르 달려와 토템 주위를 돌며 꺄르르 웃었다.

­ 와아~ 토템이다~!!

­ 이 괴물은 뭐지? 웃기게 생겼다! 꺄하하!

­ 저, 저기 무서운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몰려든 정령들은 나를 조금 두려워하긴 했지만 나를 보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손을 뻗어 물의 정령에게 손을 내밀자 쪼끄만 파란색 인어는 조금 망설이다가 내 손 위에 올라탔다.

나는 조금 감개무량해져서 물의 정령을 열심히 쓰다듬어줬다.

­ 웅 우웅 히히.

= 드디어 미움 받지 않게 됐네요. 주술을 무려 두 개나 썼지만요. 그쵸?

"한창 기분 좋은데 그런 말 하지 말아 줄래"

그렇게 토템의 효과가 끝날 때까지 정령들을 쓰다듬으며 신나게 놀았다.

***

토템을 챙기고 공원의 숲을 나섰다.

아직도 번개와 함께 폭우가 몰아치고 있었기에 전신이 이미 홀딱 젖은 지 오래지만, 오랜만에 대책 없이 비를 맞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아졌다.

젖어서 달라붙은 머리칼을 모아서 넘기며 기숙사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자습을 째버리긴 했지만, 벌점이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다.

난 공부 따위 안 해도 필기는 무조건 만점이란 걸 아카데미 모두가 다 아니까.

"영웅은 공부 따윈 안 한다네~"

= 공부를 안 한다고 다 영웅은 아니거든요?

"그치만 나는 영웅담의 악마가 인정한 영웅인걸."

= 저 악마 아니라고요!!!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며 빗물 사이를 거닐었다.

그 때, 저 멀리서 누군가 저 멀리서 엷게 빛나는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다름 아닌 천의린이었다.

이 폭우 속에서 뭘 하나 싶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비 대신 엷은 신성력을 두르고 쪼그려 앉은 천의린은 길고양이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 와아옹.

"야옹."

나는 둘의 모습을 보고 얼척이 없어서 내뱉었다.

"뭐하냐?"

"히악!??"

고양이와의 대화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건지 화들짝 놀라버린 천의린.

그녀는 내게 고개를 삐걱 돌리더니 곧 인상을 찌푸리며 삿대질을 했다.

"뭐야!!! 너!!! 깜짝 놀랐잖아!!!"

"내가 더 놀랐거든. 너 고양이랑 대화도 하니?"

천의린은 허둥대다 고개를 팩 돌리고는 팔짱을 꼈다.

"아, 안 그랬어."

"아 그래. 외로우면 그럴 수 있지."

"내가 너보다 친구 많거든?"

"그치만 반장 선거 발렸잖아?"

"야!!!"

천의린은 펄쩍 뛰더니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폭 내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태도였다.

"무슨 일 있어? 뭐하는 거야, 궁상 맞게."

"궁상은 무슨 아무것도 아냐."

"그렇다는 인간이 이 날씨에 밖에서 비를 맞니?"

"너야 말로 무슨 일인데. 그 등 뒤에 맨 건 뭐고? 노가다꾼이 장래희망이야?"

말 없이 등에 멘 정령토템을 바닥에 내려놓고 토템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방울을 흔들어 정령을 모은 뒤, 쿨롱을 꺼내 토템 위에 올려놨다.

­ 응? 와아!! 이게 뭐야??

­ 놀이터다~!!

­ 꺄악!! 나 먼저 갈래!!

"얘들은 뭐야?"

"고양이보다 귀여운 애들인데."

"별 이상한 나무토막이 다 있네."

천의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령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가락을 슬금슬금 움직이는 게 금방이라도 뛰어 노는 정령들을 한아름 잡아챌 기세였다.

"낚아챌 생각하지 말고. 네가 고양이니? 신성력 꺼트리고 만져봐."

"그럴 생각 없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신성력을 꺼트린 천의린이 정령들에게 손을 뻗었다.

정령들은 그녀의 가녀린 손을 보더니 그 위에 매달려서 해맑게 웃었다.

신성력이 꺼진 몸은 빗물에 무방비하게 노출됐지만, 천의린은 아무래도 좋은 듯 싶었다.

"와 귀엽네."

"그치? 길냥이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니까."

"으음 이거 하나 못 키우나? 잘 키울 자신 있는데."

"정령은 애완동물이 아냐, 이 멍청아."

천의린은 그렇게 정령토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정령을 만졌다.

토템의 빛이 꺼지고 정령들이 돌아가자, 그녀는 비로소 바닥에서 일어섰다.

"휴우. 고마워. 기분이 좀 낫네. 잡기가 많으니까 편리하구나."

"주술사란 족속이 원래 그렇지 뭐. 그나저나 왜 그러고 있었는데?"

"다른 애들한테 화를 냈어. 조금."

천의린은 그제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충 오후 자습시간에 숨 좀 돌리려 밖으로 나온 얘기, 소태연이 따라나와선 친한 척을 하길래 짜증나서 조금 밀친 얘기, 지나가던 현서진이 오지랖을 부리길래 화가 나서 투기장을 소환하고 공격을 갈긴 얘기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조금 화를 낸 거야?"

"그러게. 상대가 충분히 버틸 거라 생각해서 그랬나봐. 그랬으면 안 되는 건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현서진은 당황했지만 그녀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고 한다.

이에 이성을 되찾은 천의린은 그대로 자리에서 도망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왜 이러지, 정말. 난 왜 이리 화를 참을 수 없는 걸까? 진짜 분노조절장애인가?"

"."

"나도 이런 내가 싫어. 제멋대로 머리에 피가 돌고 가슴이 울컥하는 게 싫단 말야. 호르몬 제어고 지랄이고 그냥 없던 능력이면 좋을 텐데 그럼 피차 상처 받는 일도 없을 거 아냐"

신성투사가 빗물이 고인 벤치에 앉아 얼굴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엔 진솔한 우울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야."

"왜"

"혹시 양성 피드백이라고 알아?"

그녀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게 뭔데. 넌 이런 소리하는 애한테 잘난 척이 하고 싶냐?"

"호르몬 작용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야기야. 결과가 원인을 촉진하는 작용을 양성 피드백이라고 해."

"호르몬 작용? 결과가 원인을 어떻게 촉진하는데? 거꾸로 아냐?"

토템을 안아 들고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벤치는 꽤 낡았는지 삐걱이는 소리가 조금 들려 왔다.

"임산부가 출산을 할 때,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돼. 자궁을 수축시켜서 아이를 잘 낳게 도와주는 호르몬인데 일단 옥시토신이 조금 나오면 자궁은 조금 줄어들겠지.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자궁이 조금 줄어든 걸로는 부족해. 그러면 뇌에서 더 많은 옥시토신을 분비하지. 그런데 줄어든 정도가 또 부족하면?"

"계속 나오겠지 아, 그래서 결과가 원인을 촉진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데 그건 네 감정도 마찬가지일걸."

"무슨 뜻이야, 그게?"

"네가 가진 건 분명히 호르몬을 제어하는 능력이지, 충동에 휩쓸리는 능력이 아니야. 그런데 너는 호르몬이 불러오는 순간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잖아."

"응."

"지금도 봐, 넌 필요 이상으로 우울해. 그렇지 않아?"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빗발이 약해지고 있다.

정령토템에 새겨진 재버워크의 웃음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려 천의린과 눈을 마주쳤다.

"감정이 감정을 부르는 거야. 네가 짜증난다는 생각을 하면, 넌 화를 내는 호르몬을 부르게 되고, 그걸로 조금 더 크게 화가 나면, 그게 또 화를 내는 호르몬을 부르는 거야. 호르몬이 감정을 부르고, 감정이 호르몬을 부르면서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지."

"그치만 나는 그런 걸 부른 적이 없어. 오히려 호르몬을 억제하려고 노력한단 말야."

"너는 네 호르몬을 완전히 이성적으로 장악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나도 화가 나면 무의식적으로 손이 떨리고, 무언가 날아오면 질끈 눈을 감아. 이건 무의식의 영역이야."

"."

"일단 화가 나면, 침착한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봐. 단순히 호르몬을 억제하려고 하지 말고, 네 감정을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돼. 짚더미에 불이 붙으면 불 붙은 짚을 떼어내려고 노력을 해야지,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알았지?"

고개를 푹 숙인 천의린은 옅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움직여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

"응? 아냐, 뭘. 이 정도 소리도 못 해줄까. 그럼 들어가. 마침 비도 갰네."

손을 토닥여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다 져가는 태양이 먹구름을 헤치고 나타났다.

곧 지평선 너머로 져버릴 태양이지만, 그래도 황혼빛이 구름들을 헤치는 광경은 찰나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웠다.

= 앗! 전화 왔어요!

"아, 그러네. 이거 망가졌으면 어쩌지?"

잠시 해를 보며 멍을 때리다가 전화를 놓칠 뻔 했다.

"여보세요?"

­ 조카님! 그거 완성됐어! 내일 보러오면 좋겠네!

"앗, 네! 감사해요!"

­ 감사는 무슨. 내일 봐!

뚝.

나는 끊어진 전화를 축축한 옷주머니에 넣으며 기지개를 켰다.

비로소, 영웅담과 칠흑을 직접 다룰 수 있는 매개체가 생겼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