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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67화 (67/119)

〈 67화 〉 위를 향한 일상 (5)

* * *

"혼검기? 사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넌 못 만들 것 같아."

"뭐?"

내가 혼검기에 대해 묻자, 현서진은 멀쩡해진 몸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그리 말했다.

혹시 얘가 패배한 게 억울해서 그러나 싶었지만, 현서진의 표정은 여느때와 같이 평온했다.

"왜?"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검기의 원리가 뭔지 알아?"

검기의 원리.

생각보다 별 거 아니다.

그냥 마력을 있는 힘껏 꽉 뭉친 거다.

그렇게 마력의 밀도가 임계점을 넘어가면 마력은 스스로 새로운 구조로 변화하는데, 그게 검기다.

"기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고체로 변하는 대충 그렇게 알고 있는데."

"꽤 비슷한 비유네. 맞아. 몸 안에서 마력을 뭉친 거지. 강하게, 세밀하게."

마법으로는 검기를 만들 수 없다.

마법진은 밀폐되어 있지 않아 마력의 압축이 곤란할 뿐더러, 검기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력의 반발은 고작 마력회로 따위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체는 다르다.

필연적으로 마력을 줄줄 흘릴 수 밖에 없는 마법진과 달리 인체는 전체적으로 닫혀 있어 마력의 누설이 없다시피 하다.

또한 사람의 신체가 아무리 가냘프다 한들, 마법진의 회로보단 훨씬 견고하기에 압축된 마력의 반발을 간단히 버텨낼 수 있다.

"그렇지만 네 몸이 스피릿의 반발까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어. 마력과는 비교도 안 되게 거친 힘이잖아?"

"."

현서진의 말이 맞다.

스피릿은 심장의 정류기관을 거치지 않은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힘.

마력을 압축하는 게 진하고 부드러운 초코우유를 마시는 정도라면, 스피릿을 압축하는 건 쇠못 더미를 목구멍에 처박고 마시려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네 말대로 스피릿은 마력과 다르잖아. 마력과는 다른 방법으로 혼검기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사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어. 내가 스피릿을 다뤄본 것도 아니라서. 하지만 스피릿과 마력이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야. 스피릿을 정류한 게 마력인 걸. 근본적으론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나는 착잡하게 이마를 짚었다.

설마 가소희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하르미아의 압박 때문에 반은 억지로 떠맡은 애새끼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일까?

'너무해.'

위의 것들은 어디까지나 현서진의 사견일 뿐이지만, 나는 무척이나 침울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절세무공의 구결도 아니고 "이 초식에 모든 게 들어 있다!"라고 하면서 숙제라고 띡 던져 놓은 것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가소희는 애초에 나를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 없던 거다.

"괜찮아? 표정이 되게 우울한데. 그, 내 생각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쓰지는 마. 가소희 헌터님이 특이한 케이스일 테니까 말야."

"어. 그래."

나는 무척이나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고는 등을 돌렸다.

대련장을 나오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 아니!! 저 멍청이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요!? 영웅님한테 막 네가 틀리고 내가 맞다! 이런 태도로 나왔다가 처참하게 두들겨 맞은 앤데!!

"내가 쟤를 처참하게 두들겨 패진 않았어. 그냥 지가 무리하다 으악하고 쓰러진 거지."

= 그럼 무리하다 혼자서 으악하고 쓰러진 애 말을 믿는 거에요?

나는 영웅강림의 페널티로 등에 찰싹 붙은 셀레스티를 잡아당기며 헛웃음 지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한 마디를 안 지려고 든다.

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 워어~ 머신~ 워 머신~!!!

= 으앗, 깜짝이야! 전화소리 좀 바꿔요!! 무슨 이상한 락을 틀고 앉아 있어!!

"인간님의 음악을 모욕하지 마라, 악마야."

휴대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가소희였다.

= 우와, 호랑이도 떡 주면 먹는다더니!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겠지. 대체 무슨 말이야, 그건?"

나는 아미를 찌푸리고 발신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안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보세요."

­ 어, 시현아! 뭐해?

"삐지는 중이에요."

­ 응? 뭐라고?

"아니에요. 그런데 왜 전화하셨어요?"

가소희는 연신 비음을 흘리며 우물대다 한숨을 폭 쉬었다.

­ 아니, 그게 혼검기는 잘 되고 있나 해서. 그보다 스승이 제자한테 전화 한 번을 못 거니?

"당연히 감도 못 잡았죠. 제가 아둔한 탓에."

­ 아둔하다니! 누구네 제자가 아둔해? 누가 우리 예쁘고 섹시한 나의 제자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제자라는 말을 강조한다.

­ 그 나의 제자야.

"네."

­ 세상 제일 가는 멋지고 강한 소희 스승님의 제자야.

"왜요?"

­ 혼검기 안 되지?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지?

뭐지?

날 놀리는 것인가?

"."

­ 음,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줄래?

"저기, 하나 묻고 싶은데 제가 싫으세요?"

­ 아, 아니? 내가 널 왜 싫어하니?

"할 수도 없는 걸 하라고 숙제로 내고, 매일 전화한다면서 일주일 넘게 전화도 안 해서 제가 걸게 만들고, 게 먹을 때도 저한텐 국물만 띡 던져주고 결국 혼자서 다 먹었잖아요."

결국 어린 검은바다게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가소희가 먹고 남은 국물을 홀짝이며 얼마나 서러웠던가.

­ 그, 그것들은 미안 그래도 널 싫어하는 건 아냐. 그랬으면 화편검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겠니?

"결국 못 배우잖아요. 제겐 혼검기의 재능이 없는데요."

­ 휴우, 미안. 고백할 게 있어. 혼검기는 내 오해였나봐.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괜한데 힘쓰게 해서 미안해.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가소희가 돌연 이실직고를 했다.

혹시 현서진이랑 무슨 커뮤니케이션이라도 있는 걸까.

정시현이 혼검기 못 배우는 거 들켰으니 어서 자수하라고 현서진이 연락을 찌른 걸까?

= 가능성이 있어!

"뭘 가능성이 있어, 이 멍청아."

= 왜요! 검성의 아들과 검성의 동료면 전화번호 정도는 교환하지 않겠어요?

"무검희는 검성의 동료가 아니거든. 그보다 왜 직장동료하고 자기네 아들이 전화번호를 교환하는데?"

갑작스런 고백에 혼란에 싸인 내가 휴대폰의 마이크를 가리고 셀레스티와 되도 않는 토론을 하는 사이, 가소희가 재차 깊은 한숨을 쉬며 조곤조곤 말했다.

­ 그게, 내가 너무 재능이 있었나봐.

"?"

­ 그, 난 혼검기가 진짜 그냥 하면 되는 건 줄 알았거든. 그냥 되길래 한 거고, 그걸 기반으로 해서 검무도 만들고 그랬던 건데 저번에 우리가 하던 전화를 친구가 듣고서는 막 욕을 하더라. 왜 불쌍한 애한테 헛된 희망을 불어 넣어주냐고 그건 너니까 할 수 있는 건데 왜 그런 지랄을 하느냐고

"."

진심인가?

아니, 그 전에 이제껏 혼검기가 그렇게 힘든 일인 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어디 산 속에라도 살고 오셨나.'

­ 아무튼 미안. 사실 아카데미를 조기졸업하고 바로 산에 들어갔거든. 거기서 혼검기도 깨치고 검무도 만들고 하다가 휴우, 어떻게 말해도 핑계일 뿐이겠지. 정말 미안해

"."

어쩐지 야전 조리 솜씨가 뛰어나더라니.

생각 외로 상상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 저, 저기? 혹시 듣고 있니? 왜 대답이

"아, 네. 듣고 있어요. 순간 너무 당황해서요.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에요?"

­ 앞으로? 으음, 이제 와서 내가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혼검기에 대해서는 신경 꺼도 돼.

"아뇨, 그런 거 말고. 혹시 검무 말고 제게 가르쳐주실 게 있나요?"

­ 없지?

"그럼 이제 사제 관계는 끝인가요? 더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애초에 검무를 가르쳐달라는 내 부탁으로 성사된 관계였다.

그런데 화편검무의 전제조건인 혼검기를 못 배우게 되었으니 이 관계가 쫑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소희의 답은 사뭇 달랐다.

­ 아니지, 나의 제자야. 네게 가르칠 게 아직 남았어.

"네? 혼검기 없어도 되는 초식이 또 있어요?"

­ 없으면 만들면 돼. 실제로 이미 몇 가지 만들었거든.

어느새 가소희는 미안함을 씻어낸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 맘만 먹으면 네가 익힌 열화판 검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야. 이래봬도 칠성인 걸.

­ 아니, 이 분홍대가리! 그건 내가 다 한 것이다! 어딜 자기가 다 한 척을 하는 것이냐?

­ 이 정도는 너 없어도 되는 거였거든.

­ 내가 선심써서 내 검무까지 조금 섞어다 줬건만 나한테 그렇게 나와도 되는 것이냐? 이번에야말로 공동저작권을 선포하겠노라!

­ 그럴 거면 주지 마.

­ 이 무례한!!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방방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딘가 셀레스티가 생각나는 언행이다.

'그나저나 열화판 검무라?'

내가 가진 개화 같은 초식이 더 생겼다는 뜻이 아닌가?

직접 봐야 알겠지만, 그 정도면 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메꿔줄 수 있다.

­ 흠흠! 아, 미안. 혹시 들렸니?

"아뇨? 뭐였는데요?"

­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미안했어. 설마 그럴 줄은 몰랐는데.

"사과는 뭐 충분히 하셨으니까 됐어요. 그보다 검무 좀 보여주세요. 한 번 보게."

­ 아, 그럴까? 잠깐만. 영상통화로 보여줄게.

곧, 휴대폰의 화면이 좁고 어지러운 방 안으로 변했다.

­ 야, 이 미친! 여기서 펼치지 말란 말이다!!!

­ 잘 봐. 이게 제이식 첨극??이야.

화면 속에서, 입에 과자 부스러기를 한껏 묻힌 가소희가 월왕구천을 뽑아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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