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1)
* * *
"안녕하십니까. 우연이네요."
"너 아카데미에 남는다고 하지 않았어?"
"흥."
설악산이 있는 속초로 향하는 버스 안.
샬롯은 큰 가방을 끌어 안고 내 옆 좌석을 꿰차 앉았다.
"혼자십니까?"
"어? 응."
"항상 친구들을 끌고 다니시길래 일행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영문 모를 소리를 한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이 외롭지 않게 동행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난 괜찮은데."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혹시 제가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아니아니! 불편하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니?"
새침한 표정을 지은 샬롯은 내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가방을 끌어 안은 채로 팔짱을 꼈다.
조금 웃긴 모양새긴 했지만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잘 됐군요. 이런 곳에서 우연히도 친구를 만나게 되다니. 마침 외로웠는데 잘 됐습니다."
"너 나 따라온 거 다 봤는데."
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를 미행하던 샬롯의 기척이 하르미아 시스템에 다 잡혔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우연입니다, 우연."
"그러고보니 사교성도 없는데 외로움을 잘 타서 힘들다느니, 방학에 훈련 말고 할 게 없어서 고민이라느니, 자꾸 그런 소릴 했지."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따라 나온 게 아니니까. 그것도 자의식 과잉입니다."
"전봇대 뒤에서 빼꼼거리는 거 다 봤다니까. 배낭이 커서 다 가려지지도 않던데."
"그, 그렇게 숨은 적은 없습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결국 다르게 숨긴 했다는 소리네."
샬롯은 귀를 샬롯은 귀를 살짝 붉게 물들이더니 내게서 고개를 홱 돌리고 창문에 머리를 댔다.
하지만 버스가 크게 덜컹이자 그녀는 창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쿵하는 소리가 버스에 울릴 만큼 크게 났지만, 샬롯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다시 창문에 이마를 박았다.
"풋."
"악취미로군요. 제게 그렇게 무안을 주셔야 되겠습니까?"
"무안을 주다니?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줄래?"
"흥"
가방을 안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그녀는 다시금 자세를 바로하고 날 곁눈질 했다.
아주 토라진 티가 역력했다.
"저기, 샬롯?"
"."
"흠흠. 설악산행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내 친구 샬롯아."
"왜 부르십니까."
"나는 설악산을 오를 건데 같이 가겠니?"
내 말에 잠시간 상념에 빠졌던 샬롯은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설악산을 오른다고요? 입산이 허용됐습니까?"
"아니? 당연히 불법이지."
기왕에 샬롯을 만난 거 설악산행 동료로 삼을까 싶어 넌지시 던져본 말이다.
어차피 샬롯이 동행하면 혼자 결계를 넘기가 힘들어지니까.
싫다고 하면 장난이었다고 하면 될 일이다.
눈을 깜빡이던 샬롯은 고개를 내밀어 내 눈동자를 들여다 봤다.
내 시야가 푸른 눈동자로 가득 찼다.
"뭐 하는 거야?"
"진위판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걸로 알 수 있는 거야?"
"원시의 힘이 뭐하는 주술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감입니다, 감."
문명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논리적 추론보다는 직감에 판단을 의존했다.
본디 직감이란 간단한 수준의 판단을 매우 빠르게 대강 해내는 것.
샬롯은 원시의 힘으로 이 직감이란 힘을 끌어낸 것이 틀림 없다.
설마 그걸로 진위판단을 할 줄은 몰랐지만.
"진심이군요. 어째서 거길 가십니까?"
"필요한 장비가 있어서. 그냥 조용히 올라갔다 오는 거야."
"흐음"
샬롯은 내게서 얼굴을 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필요한 겁니까?"
"응."
"입산은 어떻게 하고 걸리면 어쩌실 겁니까?"
"둘 다 뇌물 쓰면 되는데."
"이것도 진심이군요. 감이 고장났나?"
제 머리를 툭툭 때리던 샬롯은 한숨을 푹 쉬고는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정말?"
"부탁하셨으니 어쩔 수 없죠. 또 괜히 혼자 보냈다가 걸리거나 변을 당하면 극정 아카데미의 크나큰 수치가 될 테니 말입니다. 올라갔다 오는 것 정도야 괜찮겠죠. 약초꾼들도 뒷구멍으로 잘만 드나든다고 하니까"
함께 갔다가 사이 좋게 걸리면 더 큰 수치가 될 텐데.
극정 아카데미 1학년 최우수 학생이자 그 잘난 Z반의 반장과 부반장이 용감하게 설악산의 결계를 넘었다가 걸린다?
전국의 모든 사람이 비웃을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지만.
"고마워. 우연히 만난 샬롯아."
"그럼요. 우연히 만난 시현 부반장님."
샬롯은 예의 그 무표정으로 돌아와선 고개를 끄덕였다.
외로운 설악행에 예정에 없던 동료가 생겼다.
***
몰랐는데, 샬롯은 멀미가 꽤 심하다.
아카데미 최우수 학생이 멀미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만 진짜였다.
"우윽 제, 제가 마력 사용자였다면 말입니다!"
"알았으니까 말 그만 해. 그 소리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우욱!"
그녀는 열심히 검은 봉지에다가 대고 헛구역질을 했다.
마력이나 신성력을 가졌다면 멀미를 가라앉힐 수 있지만, 스피릿이나 마기 같이 거칠기 짝이 없는 힘을 가졌다면 오히려 멀미가 심해질 뿐이었다.
그런 걸 감안해도 샬롯은 정도가 지나친 것 같지만.
"와, 안?도 잘 안 먹히네. 넌 그 큰 짐에 멀미약도 안 챙겼니? 급하게 따라 나와서 그런가?"
"따, 따라 나온 게 우욱"
연거푸 헛구역질을 하는 샬롯에게 차라리 토?를 붙여서 싹 게워내게 할까, 하던 그 때.
수 시간의 운행 끝에 버스가 드디어 설악산 앞에 도착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샬롯의 가방을 뺏어 들고 뒷목을 끌어 버스에서 내렸다.
간만에 땅을 밟으니 꽤 좋은 기분이다.
"사, 살았습니다"
"넌 전투할 때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땅이라도 흔들리면 멀미하느라 죽겠네, 그냥."
"아, 안 그럴 겁니다"
땅 위에 엎어지다시피 한 샬롯을 끌고 버스가 선 헌터협회 속초지부로 들어갔다.
여의도의 137배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설악산을 관장하는 지부답게 그 크기는 웬만한 시청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속초지부의 접수처는 다른 지역과 꽤 다른 구조를 갖고 있었다.
죄다 문이 있는 칸막이식 접수처를 갖고 있던 것이다.
괴물이 많은 만큼 온갖 귀중한 자원이 많아 수없는 비리와 청탁, 뇌물이 오고 가는 까닭이었다.
나는 손을 잡고 끌고 오다시피 한 샬롯을 시원한 에어컨 앞에 앉히고 접수표를 끊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칸막이의 문을 열고 한 남자를 마주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설악산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아, 정기 순찰대는 봉사 인원을 받지 않는데"
"제가 신기한 거 보여 드릴까요?"
왼손을 내밀자 셀레스티가 꼬물꼬물 움직여 접수원 앞에 한 송이 꽃을 내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수표 꽃이었다.
"오, 예쁘네요. 그런데 전 아내가 있어서."
"개소리 말고 접수나 해주세요. 내일 정오에 대청봉 쪽으로 둘."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다음 일출 전까지는 나오세요. 여기 담당 초소 위치입니다."
나는 접수원에게서 개략적인 지도가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고는 창구를 나왔다.
종이에는 대청봉과 가까운 감시 초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자아, 접수는 됐고 근데 샬롯은 어디 갔지.'
에어컨 앞에 앉혀 놨던 샬롯이 사라졌다.
어딜 갔나 싶어 조금 둘러보니, 샬롯은 입구 근처에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해? 앉아 있지 않고."
"잠시만 나와 보십시오."
나는 샬롯에게 이끌려 유리문 밖으로 나왔다.
날 끌고 나온 샬롯은 유리문 너머에서 열심히 작동되고 있는 에어컨을 가리켰다.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저게 왜? 필터 청소 안 됐어?"
"아니, 에어컨 말고 저 사람 엄청 불길합니다."
샬롯이 가리킨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옆자리에 있던 오피스룩의 여성이었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 통화를 하고 있는, 흠잡을 데 없이 평범한 모습을 한 여성.
"저 사람이 왜?"
"이상하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직감이 그렇게 말합니다 통화 내용도 심상치 않고 아무튼 불길합니다. 하마터면 가라앉은게 다시 올라올 뻔 했습니다."
악마숭배자네요.
셀레스티와 달리 조용히 말할 수 있는 칠흑여제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포근했지만, 그 속에는 지울 수 없는 경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통 악마숭배자가 아니에요. 지금의 제가 느낄 수 있을 정도면 대악마의 계약자,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꽈악.
이번엔 셀레스티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손을 조여 왔다.
머리를 넘기는 척하며 망토를 귀에 대자, 셀레스티는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 제가 먼저 말하려고 한 거에요! 저게 감히 훈수를
"훈수가 아니라 선수겠지."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응? 아냐, 아냐. 그냥 잡념 때문에."
하여간 이놈의 망토는 도움 되는 게 없다.
내가 손을 떼자 셀레스티는 제발 들어달라는 듯이 다시 손을 조여 왔다.
이번엔 대한민국 응원 박자로 꽉꽉, 꽉꽉꽉 조여 온다.
= 아니, 그런 말 좀 했다고 바로 손을 떼요? 무자비하긴
"."
= 아, 아무튼! 연루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너무 작위적으로 존재감을 숨긴 티가 나요! 너무 완벽해서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칠흑여제와 셀레스티의 말에 의하면 저 여성은 대악마의 계약자다.
하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다보니 일일히 놀라는 데에도 지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 있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악마의 계약자라는 건 중대사안이니까.
"으, 으음 샬롯."
"네."
"통화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해?"
"그러니까 음 어, 어어?"
샬롯은 잠시 상기하는 듯하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강력한 권능에 의한 현상이다.
'클리포트 제8좌 사마엘'
기만의 대악마, 오팔이 틀림 없었다.
***
옵시디언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 있었나?
"옵시디언? 아, 칠흑여제요?"
그래. 펄이랑 같이 다페르헤이드로 튀었다가 토벌 당한 년. 네 뒤에 있는 것 같은데?
스피넬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통화하는 척을 했다.
뒤돌아 보지 않아도 앞에 위치한 거울을 통해 다 볼 수 있었으니까.
"칠흑여제 본인이에요? 그렇겐 안 보이는데."
당연히 아니지. 그리고 옵시디언이라고 불러. 자격을 가진 악마를 감히 인간의 명칭으로
"아~ 그래요~ 옵시디언~ 클리포트의 좌에 도전할 자격을 가진 고귀한 존재~ 됐죠?"
기어오르긴.
드물게도, 오팔은 계약자에게 크게 관대한 대악마였다.
그녀에게 스피넬이라는 보석의 이름을 가진, 그러니까 '자격이 있는' 계약자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했으니.
재앙의 힘을 빌렸다지만 고위 악마 수십을 단신으로 쳐죽인 인간은 결코 흔치 않은 인재다.
"그래서 저 년이 누군데요? 네?"
저건
사마엘의 좌에 앉은 오팔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운을 떼었다.
옵시디언의 계약자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