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71화 (71/119)

〈 71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3)

* * *

"비행기를 타도 됐을 텐데."

"낭만이 있지 않느냐! 쓰시마 해협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이라니!"

"하긴, 그렇긴 해. 배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라서."

대한해협을 가로질러 부산으로 향하는 유람선.

흰 두루마기를 휘날리는 가소희와 형형색색의 무녀복을 하늘거리는 아유하가 나란히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너 한국 가는 거 비밀 아니였어? 뒤에서 사진 찍는데."

"흥. 내가 내 친구 따라가겠다는데 대체 누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냐?"

"대책 따위 없다는 거구나."

일본의 S급 히어로는 13명.

한국의 S급 헌터보다는 질이 살짝 낮지만 무녀는 한국 칠성에게 전혀 격이 밀리지 않는 수준의 히어로다.

그 이름도 빛나는 S급 4위.

한국으로 치면 주하연이나 가소희에 비견할 강자라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권력다툼에서 밀렸다지만 에이, 내 알 바는 아니지. 괜히 나한테 송환요청 들어오고 그런 거 아냐?"

"훗햣햣! 히어로 협회는 나를 더 소중히 했어야 했느니라!"

현재 무녀는 일본의 히어로 협회의 뒷방 늙은이 신세다.

가소희 혼자 꽉 잡고 있는 한국 헌터 협회와 다르게, 일본 히어로 협회는 알력 다툼이 극심해 각종 이권을 두고 온갖 물밑 싸움이 벌어진다.

무녀가 나가사키 같은 변두리에서 닝텡도나 외치며 살아가는 게 딱히 미니멀라이프를 좋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 이것도 히어로 협회랑 관련된 일이긴 한데 한 가지 부탁이 있느니라."

"개인적으로? 아님 공적으로?"

"공적인 수준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가소희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조금 더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귀를 갖다 댔다.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는 말투가 조금 이상할지는 몰라도 허튼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해남도. 하이난 섬에 중대한 공간 파장이 일어난 걸 관측했다는 것이다."

"해남? 아, 그 제주보다 살짝 큰 섬. 그거 남중국해에 있는 거 아냐? 거긴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지도에 확실히 나타났느니라. 섬의 공간진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걸"

공간 파장은 자연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 원인은 대체로 결계의 변화.

하이난 섬 전체에 결계가 씌워져 있다는 유력한 증거였다.

"그럼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리야? 대전쟁 이후로 다섯 나라 말고 생존한 곳이 있었다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계가 섬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건 조금 놀랍지만 아무튼, 그래서 조사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사대 일본이랑 공동으로?"

"아니? 걔네가 내 말을 들어주겠느냐? 몇 번이고 말했지만 몇 번이고 묵살 당했지. 이른바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한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소리구나."

"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딱히 들어줄 의리가 없는 부탁이다.

무녀의 말이 한국의 입장에서 신빙성 있느냐는 둘째 치고, 하이난 섬까지 가는 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헌터를 차출해 조사대를 파견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낀 동해도 다 정화가 되지 않은 마당에 그 먼 중국 남부에 있는 하이난 섬까지 조사대를 보내라니, 아무리 헌터를 개병신으로 보는 한국이라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보내는 게 이득이야. 인간이 살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줄기만 하고 있으니 또 사람이 있다는데 꼭 무시할 수만은 없겠지.'

일단 안건를 띄워보기는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가소희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굉음과 함께 유람선에 무언가 부딪혔다.

쿠우웅!

"뭐, 뭐야!"

"꺄아악!"

갑판 위에서 유람에 충실하던 사람도, 호기심에 몰래 두 유명인을 찍던 사람도.

갑작스런 진동에 공평히 배 위를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젠장, 그냥 비행기 타자니까!"

"태평한 소리 말고 뭔지 보고 오라는 것이다! 난 배를 보호할 테니!!"

서둘러 정령과 수호령을 불러내는 무녀를 뒤로하고 가소희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 울림은 필시 적의를 가진 거대 해양 괴물에 의한 것일 터.

배가 완전히 작살이 나기 전에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한다.

'젠장. 먹물을 뿌려 놨잖아.'

온 바다가 심해처럼 까매져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양 괴수의 먹물 뿌리기는, 사냥감을 혼란시키는 '사냥'의 전조.

그냥 분풀이로 어깨빵을 치듯 부딪힌 게 아니라, 이 유람선 자체를 반드시 침몰시키겠다는 신호였다.

가소희를 비롯한 능력자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겠지만 일반인들은 그대로 수장되거나 먹이가 되고 말 테니 어떻게든 싸워서 격퇴해야 했다.

­ 의심인자 1체 포착. 1차 목표와 일치율 98.77%.

충돌의 원인을 찾아 깜깜해진 바닷물을 가르던 가소희의 귓가로 음산한 기계음이 파고든다.

찌르르 울리는 전기신호와 금속이 무겁게 맞물리는 소리가 바닷물을 타고 흘러온다.

­ 최우선 동맹 카타스트로피의 최대 주적 확인.

­ 코드 9w7106k21n 요청 완료.

­ 타겟 이름. 무검희.

­ 무검희 파괴 전용 프로토콜 승인.

가소희는 들려오는 신호에 옅은 당혹감을 느끼며 소매에서 월왕구천을 뽑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양 괴수의 목적은 아무래도 유람선의 침몰이 아니라 가소희의 제거, 그 자체였던 것 같다.

­ 해신 포세이돈. 포위포격 시퀀스로 이행.

­ 수중벽력포 성자필쇠?者必? 92문 개방.

­ 수중소각포 화광충천火光?? 85문 개방.

­ 수중격멸포 산진해갈山??? 77문 개방.

­ 제1번부 텐타클 이하 99번 기체. 과부하 및 파워로드 완료.

­ 모든 포구 이상 없음, 정조준까지 0.034초.

­ 포격.

무정한 신호와 함께, 가소희의 시야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싸구려 창문에 비친 가로등처럼 점멸하는 불빛이 사방에서 덮쳐 온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키틴질의 묵색과 금속의 유백색이 공존하는 바다 괴물의 촉수.

촉수의 빨판에서 발사된 포격이 가소희를 구형으로 포위하고 날아들었다.

"!!"

우월에 단 3체 밖에 없는 재앙급 융합체.

'해신 포세이돈'이 무검희에게 죽음의 나팔을 불어 왔다.

***

"안녕하세요오오!!!!!"

"꺅!"

문을 열자 발랄하게 생긴 여성이 숙소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잠시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누, 누구?"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으앗!!!!! 거기 세금도둑 골든머리 외국인 발겨언!!!!!"

"저, 저, 저 말입니까?"

드물게도 '마기'를 담아 소리친 여성은 비호처럼 도약해 샬롯에게 덮치듯이 달려 들었다.

다행히도 진짜 덮치지는 않았는데, 샬롯은 진짜로 습격받은 것마냥 뒤로 우당탕 자빠지고 말았다.

건방지게도 하이힐을 신은 채 한쪽 발을 침대 위에 올린 여성은 샬롯의 설악 생태정보 책자를 빼앗고 그녀에게 척 내보이고 있었다.

"황금 고블린!!!!! 감히 국민의 혈세로 만든 책자를 협회에서 훔쳐 갔겠다!!!!!"

"아, 그, 그, 저, 으아"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국민도 아니면서!!!!! 미제 햄버거콜라피자 주제에 한반도 태백산맥의 정기가 한가득 모인 영산의 정보를 빼가려 하다니!!!!! 기립하십시오!!!!! 당신도!!!!! 우리 다함께 K­본때가 함뿍 담긴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보여 줍시다!!!!!"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여성은 침대에서 흰 이불을 끌어다가 샬롯을 김밥처럼 돌돌 싸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직감적인 공포에 덜덜 떨던 샬롯은 순식간에 이불에 파묻혀 하얀 번데기가 되었고, 멍석말이의 위기에 직면한 미제 정령사의 두뇌는 두려움에 그만 기능을 정지하고 말았다.

풀썩.

"에엥? 왜 기절했지? 쯔쯔, 약해 빠져가지곤. 이래서 김치를 많이 먹어야 한다니까 앗!!!!! 당신!!!!! 정말 반가워요!!!!! 우리 악수라도 한 번 할래요??"

"뭐, 뭐요?"

불쌍한 금발머리 소녀를 기절시켜버린 여성은 이쪽으로 기수를 돌리더니 번개 같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칠흑여제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에이, 빼지 마시고!!!!! 자! 악수!! 으응, 주먹 펴고!!!!! 옳지!!!!! 다음은 포옹!!!!! 으아, 좋아요!!!!! 예상대로 부드럽군요!!!!! 그리고 또 아, 뭐요!!! 자연스럽게 다가가라면서!!!!! 하라는대로 해줘도 지 네? 직접 와요?? 아, 안 돼요!!! 이건 계약 위반이야!!!!! 당신이 그러고도 한 차원의 지배자야!?? 악마가 양심이 있으면 꺄아아악!!!!!"

"."

온갖 생난리를 치던 여성은 가련하게 뒷걸음치며 비틀대다가 그만 샬롯 위에 그림 같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불에 싸매인 샬롯은 폐가 눌렸는지 우엑, 하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여성은 비로소 정적을 찾고 이불 위에 잠들었다.

'여러모로 폭풍 같은 여자네. 오팔의 계약자도 바뀐 건가? 하긴. 그러지 않는 편이 이상하긴 하다만.'

칠흑여제도 그 사실이 꽤 어이 없었는지 드물게도 웃음을 흘렸다.

­ 푸후후, 어디서 저런 재밌는 계약자를 주웠을까요. 아. 대비하세요. 오팔이 강신을 시도하고 있으니까.

쿠구구

칠흑여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이 마구 진동한다.

이불 위의 여성에게서 불길한 힘이 흘러 나오고, 감당하기 힘든 존재감이 임하며 공기를 짓누른다.

대체 무슨 일이냐며 방문을 두들기는 기척도 지우개로 지운 듯이 사라졌다.

"."

이윽고 여성의 신형이 삐그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관절 구동부가 작살난 인형처럼 어깨를 등으로 콱 젖히고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낸 여성은 이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심장 밑에 칼을 댄 것처럼 등이 서늘해져온다.

"큭 웃긴 꼴을 보였네."

"."

"거기? 옵시디언 좀 불러봐. 머저리처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제부터가 관건이다.

저쪽이 직접 강신한 만큼 이쪽도 강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팔이 이리도 빨리 강신을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나는 칠흑여제에게 받은 교육 내용을 상기하며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주저 앉았다.

그리고, 죽은 척을 이용해 긴장으로 굳은 몸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칠흑여제가 내게 강신한 '척'을 하는 것이다.

진짜로 칠흑여제에게 내 몸을 맡기는 건 불가능 했으니까.

"오랜만이네요. 말리안."

"하하하하. 그렇게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네. 지금은 그 누구도 날 말리안이라 부르지 못하건만 네 사정을 봐서 이해할게. 잡종."

나는 잡종이란 말에 아미를 우아하게 찌푸렸다.

악마와 인간의 혼혈인 칠흑여제를 모욕하는 말이었던 까닭이다.

"그 전에 이거 너 맞아? 기세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응?"

"누구네처럼 계약자의 몸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머저리도 아니라서 말이죠."

"아~ 그래? 악마가 계약자 두는 걸 그렇게 혐오하던 년이 그런 건 또 언제 배웠대, 응?"

오팔은 계약자의 저항으로 반신불수가 되다시피 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와 대비되게 나는 꽤 멀쩡하게 움직이며 마기도 흘리지 않고 있었으니 강신의 숙련도가 남다르다고 할 수 밖엔 없었다.

문제는, 인간으로서 살기로 한 칠흑여제는 계약자를 두는 것을 싫어해 강신을 해본 경험이 오팔에 비해 현저히 적어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의심하고 있나?'

"뭐어, 하긴. 네년도 반은 인간이니 강신이 능숙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그래서 무엇하러 이곳까지 오신 건가요? 피차 모른 체하고 지나쳤으면 좋았을 것을."

"글쎄 너랑 네 동생이 클리포트의 척살 대상 1순위인 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니지? 더욱이 죽었다고 알려진 게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는데 가만히 두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어?"

오팔은 그리 말하면서도 내 모습을 위아래로 찬찬히 뜯어 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그 시선을 받아 넘겼다.

"그래서 절 죽이시겠다고요."

"인간들한테 맞아 죽을 일 있어? 네가 로엠으로 건너온다면 못할 것도 없긴 한데."

"푸후후. 기대할게요."

기대한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언젠가 로엠으로 건너갈지도 모르니,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뜻.

인간으로 조용히 살겠다며 도망친 칠흑여제가 하기엔 묘한 말이다.

"그래? 내 영지에 네 자리를 준비해둬야 하나?"

"어머. 사마엘의 좌를 비워 주시겠다면야 감사하죠."

"하하하하. 나는 네 묫자리를 말한 건데 말야. 영지 소각장 안에 네 누이들의 무덤도 있는데, 그 곁도 괜찮지?"

"자기 목구멍에 가문을 생매장 하신 분이나 할 법한 소리군요."

오팔은 자신의 계파를 제외한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산 채로 뜯어 먹고 가주가 되었다.

"하. 꽤 변했구나, 잡종? 남의 과거를 캐는 성격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다 제 동생이 잘 난 덕이죠, 뭘."

아카데미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을 하르미아와 여전히 긴밀한 사이임을 시사한다.

"좋아, 좋아. 일단 옛날 일은 묻어 두고 몇 가지 물어 봐도 될까?"

"내키진 않지만 얼마든지."

"왜 계약자를 둔 거지?"

칠흑여제는 악마계약에 무척이나 부정적이었다.

간절한 인간을 악마가 마음대로 갖고 노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아, 뭐라 답해야 할까.'

오팔이 계약에 대해 묻는 건 더 깊은 의중을 찌르기 위해서다.

칠흑여제가 계약자를 두었다는 건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든가, 계약에 대한 거부감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든가 둘 중 하나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게 로엠에 관련된 일이라면 오팔이 신경쓰지 않을 수 없을 테고.

"후후 왤까요. 당신이 제 계획에 방해될 것만 같아서 말하지 못하겠네요."

강신한 대악마는 반쪽 밖에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이용해 짜증을 표현했다.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한지 검붉은 마기가 거칠게 새어 나온다.

'대충은 알아 들었겠지.'

오팔이 계획에 방해될 것 같아서 말해주지 못한다.

역으로 말하면 오팔이 방해할 수 있고, 방해해야 하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다.

나라는 계약자를 통해서.

"흥. 얼마든지 물으라고 했으면서 쫀쫀하기는 대충은 알았어. 그럼 네 계약자가 여길 왜 온 거야? 이 정도는 답해 줄 수 있지?"

"당신네 계약자의 목적이나 먼저 말해주시는 게 옳지 않을까요?"

"네가 내 계획에 방해될 것만 같아서 말 못해주겠어."

"그럼 서로 말하지 말죠."

방의 마기가 한층 더 짙어진다.

힘이 질질 새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강신인지라 감정이 모두 티나고 있었다.

"그래. 좋아 나 먼저 말할게. 대청봉에 묻힌 빙정이 필요해."

"그게 왜 필요하죠?"

"안 말해 줄 거야. 너는?"

"저는 마법서를 찾으러 왔어요. 설악에 묻혔다는."

겉보기로는 그 의도를 알기 힘든 목적들.

각각 빙정과 마법서로 무엇을 할 건지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 목적도 거짓말일 확률이 높지만 말이지.'

실제로 내 목적이 마법서라는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설악산에 묻힌 마법서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S)' 단 하나 뿐.

그것도 오팔이 친히 묻어 놓고 몰래 소문을 퍼트린 함정 같은 마법서였다.

'성능으로 보면 최고의 네크로맨시지만 일으킨 시체의 주인은 시전자가 아니라 오팔이 되는 흉악한 마법서지.'

마법서를 얻은 자는 시체들의 도시를 세울 정도로 강해질 수 있지만, 언제고 그 강함을 오팔에게 몰수당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나는 이 마법서를 언급함으로서 오팔을 속였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할까. 서로의 목적이 겹치지 않으니 이번만 서로 돕는 게 어때? 나는 빙정을 찾고, 너는 마법서를 찾고. 이른바 상호부조 관계가 되는 거지."

"글쎄요. 당신의 뭐가 예뻐서 그 제안을 받아 들이죠?"

"너랑 좋은 관계가 되고 싶어서, 그런 말은 안 되겠지?"

"후후. 그걸 말이라고."

오팔은 발을 끌고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슬슬 강신의 유지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이 없어. 한국에는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지."

"."

"그 전에 시급히 이뤄야 할 계획이 있어 아, 물론 네게 불리한 건 아냐. 네 목적을 잘 몰라서 장담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그렇죠. 솔직히 말하면."

"우린 주적이 아냐. 좋게 가자고, 좋게. 서로 길이 부딪히면 그때 생각하는 것도 늦지 않잖아?"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 투성이의 이야기 뿐이었지만, 어쨌든 서로가 만족할만한 회합이었다.

서로를 믿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말이다.

'이 악마년은 어디까지 속았을까.'

나는 죽은 척으로 잠재워둔 심장이 기대감으로 부푸는 것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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