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5)
* * *
설악산은 말 그대로 눈과 바위산이 있는 곳으로 변했지만, 그 안에 있는 생태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생명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공기는 차갑지만 땅은 얼어붙지 않고, 바위는 굳세지만 풀뿌리를 거부하지 않으므로.
설악산의 모든 생명은 그러한 관용 덕에 제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계령 초소의 결계를 넘어 한계령 휴게소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대청봉까지 오르는데 쓸 길은 옛 한계령 코스.
해봤자 약 8km정도의 길이라 뛰어가면 금방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크르르
설악산이 어떻니, 뭐하니 해도 결국 하나의 던전이었으므로.
한계령의 결계를 넘자마자 마주한 건 약 150m 앞에서 트럭만한 늑대와 집채만한 멧돼지가 대치하는 광경이었다.
서로 원을 그리며 도는 게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울 것만 같은 상황.
둘은 갑자기 나타난 인간 둘은 추호도 신경쓰지 않고 계속 팽팽한 분위기의 대치를 이어나갔다.
문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두 짐승이 굳건히 버티고 서서 막고 있다는 거다.
우리는 조용히 근처에 찌그러진 폐차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비늑대와 칼리오돈이군요."
"하필이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쯧. 잠깐 옆으로 돌아가야겠네."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괴물이 서 있는 곳은 아스팔트 도로 위.
옛날에 세워졌던 한계령의 차로지만, 갖가지 격전과 노후화로 군데군데 박살나고 풀들이 자라난 길이었다.
비록 아포칼립스에나 나올 법한 모습의 도로지만, 적어도 뭐가 있을지 모르는 숲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에 높은 곳에 있는 한계령 휴게소까진 도로를 따라갈 작정이었다.
"도로를 버리고 숲으로 가겠다는 뜻이 아니었는데."
"아뇨. 그냥 저 둘의 싸움이 끝나는 걸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잠깐이라지만 도로가 아닌 곳으로 가는 건 무척이나 위험할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샬롯이 도로 옆에 우거진 숲을 가리켰다.
언뜻 보기엔 특별할 게 없는 숲처럼 보이지만, 나뭇잎이 살짝 흔들리는 게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뭔진 몰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면 딱히 유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음, 그런가. 그럼 스핀 씨를 기다릴 겸해서 싸우는 거나 보고 있을까."
"그렇게 하죠. 아비늑대와 칼리오돈의 싸움 방식도 익혀두면 나쁠 게 없겠을 테니 말입니다."
아비늑대는 대청봉의 맹주 노릇을 하는 괴물.
대청봉을 오르다가 충분히 마주칠 수 있는 괴물이므로 미리 아비늑대의 전투를 봐둬서 나쁠 건 없었다.
초거대 멧돼지인 칼리오돈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수십 초의 긴장 상태를 이어나가던 두 괴물의 균형을 깬 건 다름 아닌 칼리오돈.
톤 단위는 우습게 넘어갈 만한 멧돼지가 늑대의 빈틈을 노린다.
거친 숨과 함께 짓쳐들어간 송곳니, 그에 맞서 빠르게 물러나는 늑대.
아비늑대가 칼리오돈의 돌진을 사선으로 피했다.
허나 칼리오돈은 그에 멈추지 않고 긴 송곳니를 휘두르며 늑대에게 휘둘러갔다.
무리도 없이 혼자 겁먹을 법하건만, 아비늑대는 노련하게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해내고 칼리오돈의 목에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아비늑대의 치악력을 생각하면 보통은 여기서 싸움이 끝난다.
쿠흐으으─!!
하지만 칼리오돈은 아비늑대에게 목을 물어 뜯기며 마구 몸을 뒤흔들었다.
아무리 질기고 흉악한 가죽을 가졌어도 일단은 아비늑대의 주된 사냥감인지라 목을 물어 뜯기면 단숨에 절명하는 게 맞건만, 칼리오돈은 오히려 목에 매달린 늑대를 마구 공중에 흔들며 난동을 피웠다.
노후화된 아스팔트가 칼리오돈의 발굽 밑에 형편 없이 파편을 휘날린다.
쿠훅!!! 쿠후우욱─!!!
집채만한 멧돼지가 날뛰든 말든 목을 꽉 물고 놓지 않는 늑대.
자동차만한 늑대가 광복절 태극기마냥 허공에 펄럭이는 광경은 꽤나 재미있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난동을 부리는 멧돼지의 핏물도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지만 말이다.
"저 아비늑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빨이 부러진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왜 단숨에 끝을 못 내는 겁니까?"
"그러게. 게다가 저 아비늑대는 혼자잖아. 저 늑대가 혼자 칼리오돈을 궁지에 몰아 넣었는데도 다른 늑대는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으니."
어떤 머저리들은 늑대는 무리짓지 않는 고고한 동물이라 하지만, 늑대는 대표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흔히 사용되는 말인 '고고한 한 마리의 늑대' 같은 경우는 대개 늙어서 그 가치를 잃은 늑대가 무리에서 쫒겨났을 때 생기는 경우다.
그런 건 아비늑대도 마찬가지인지라 원래대로라면 눈앞의 상황이 일어날 일이 없어야 정상인 것이다.
"늙어서 도태된 거라고 보기엔 너무 젊습니다. 신기하군요."
"모르지. 저 녀석이 사회생활을 싫어하는 돌연변이라든가, 무리에게 배척을 당할만한 짓을 했다든가. 아니면 태생적으로 치악력이 약해서 버려진 걸지도 모르지."
쿠웅!
계속 난동을 부리던 칼리오돈은 마침내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난동을 피우느라 이빨이 더 깊게 박혀 과다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땅으로 내려온 아비늑대는 눈에 띄게 지친 모습으로 숨을 고르다가 우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칼리오돈의 시체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네 하긴, 늑대는 사냥한 자리에서 바로 식사를 하니까"
"본의 아니게 초장부터 휴식이군요. 저희도 도시락이나 까먹을까요?"
늑대의 식사를 지켜보던 그때, 기척을 잘 죽이고 있던 우리 둘의 등 뒤로 누군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와아아!!! 안녕!!! 먼저 가면 어쩌나 했는데 기다리고 있었네요!!!"
뒤늦게 결계를 넘어온 박스핀이 태양만세 자세를 취하며 인사해왔다.
물론, 마기를 듬뿍 담고 목소리를 한껏 키운 채였다.
당연히 식사를 막 시작한 아비늑대를 한껏 자극하는 행위였다.
크르르
"어머? 멍멍이다!!! 안녕!!!"
용감하게도 아비늑대에게 마기를 풀풀 풍기며 손을 흔들어 보인 박스핀.
진지하게 저 대가리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성초은에게 맡겨 보고 싶을 정도였다.
"조, 조용히"
"이미 늦었어. 완전 자극해버렸는데."
쿠웅 쿠웅
입가에 빨간 피를 묻힌 아비늑대가 이쪽으로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칼리오돈이 워낙 커서 묻힌 감이 있지만, 아비늑대 또한 승용차는 우습게 넘기는 신장을 가진 짐승형 괴물.
그 발소리란 여간 위압적인 게 아니었다.
"박스핀 씨?"
"네?? 왜요??"
"왜 소리를 질러서 식사 중인 괴물을 자극하는 거죠?"
"앗!!!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그만."
진지함이라곤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은 박스핀.
그녀는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아비늑대를 노려보며 마기를 한층 더 짙게 피워올렸다.
"멍멍아. 스톱!!!"
그러자 거짓말 같이 아비늑대의 발소리가 멎었다.
고개를 슬쩍 빼서 확인해보니, 늑대는 실제로 제자리에 멈춰서 박스핀을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악마계약자가 드루이드질이라니.
"잘했어!!! 쓰다듬어줄까??"
"장난치지 말고 그냥 집으로 보내요."
"에이, 너 집에 가래!!! 안녕!!!"
박스핀의 마기에 위압당해 있던 늑대는 더욱 강해지는 마기를 느끼고 주춤주춤 뒷걸음쳤지만, 재차 으르렁대며 우리를 위협했다.
이 정도 깡은 있으니 혼자서 살아남은 거겠지.
마기를 더 높이 끌어 올리던 박스핀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내가 기대고 있던 폐차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힘껏 내리찍었다.
상당한 수준의 물리력이었다.
쾅!!!
"저리 가주라, 응?"
그제서야 본격적인 위협을 느낀 아비늑대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늑대는 조금 우울한 기색으로 칼리오돈의 시체를 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샬롯은 박스핀에 의해 완전히 차의 형태를 잃은 쇳덩어리를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휴우! 짐승은 이래야 말을 듣는다니까. 사라? 왜 그렇게 떨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히히. 제가 조금 부주의 했네요!!! 그래두 쫒아냈으니까 됐죠??"
"아 네. 그래도 가급적이면 여기선 조용히 해주세요."
"네!!!!!"
대청봉의 최상위 포식자인 아비늑대를 힘으로 겁박해 쫒아낸 게 딱히 현명한 선택이라곤 못하겠지만, 저 개체는 딱히 동료도 없는 것 같으니 복수하러 온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박스핀이 자기보다 더 센 걸 느꼈는데 복수하러 올 리도 없지만은.
"저 늑대, 입가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응? 그걸 봤어?"
"제가 시력이 워낙 좋지 않습니까. 털 사이로 보이더군요. 꽤 깊은 흉터였는데 아무래도 입가의 근육을 다쳐서 무는 힘이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아하. 부상으로 쫓겨난 거였구나?"
사람으로 치면 한 손이 잘린 것과 필적하는 부상일 터다.
딱히 막 놀라운 사건은 아니라 그렇게 그냥 반응하고 말았는데, 샬롯은 그게 아니었는지 늑대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응시하며 실눈을 떴다.
무언가 또 그녀의 직감 레이더에 걸린 건가 싶었지만 나는 설악산의 내부 사정에 큰 관심이 없었으므로 샬롯에게서 눈을 뗐다.
쿡쿡.
"저기저기, 가슴 큰 깜장 코트! 당신이 찾는 그 마법서 어딨는진 알아요??"
"그거 켜고 있는 거죠?"
"그거? 아, 기만 말이에요? 당연하죠!!! 세라가 들으면 안 되니까요! 오팔도 그렇고 저를 너무 멍청이로 보신다니까?"
자기 행적을 돌아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마법서의 위치는 대강 알고 있어요. 대청봉에 숨겨진 동굴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빙정도 대청봉 언저리에 있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 전적인 협력관계가 맞죠?"
"음, 그렇죠."
"그럼 저희는 한 배를 탄 거네요. 우리 같이 마법서랑 빙정을 찾아야 하니 말이죠!"
박스핀은 과장된 몸짓으로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동행관계가 아니라 '전적인 협력관계'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딴짓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같이 붙어 있으면 몰래 다른 걸 하러 가기 힘들어질 테니.'
이러면 대청봉 정상에 있는 푸른 갈기를 뽑으러 가기에도 힘들어진다.
일단 내 목적은 동굴 안에 잠든 마법서라고 말해놨으니 말이다.
사소한 실책이었다.
'아주 사소하지. 이런 건.'
일단은 저쪽도 목적을 빙정이라 씨부려 놨으니 빙정을 챙기는 것 외에 다른 짓은 하면 안 된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진짜로 목적이 빙정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솔직히 아니라 본다.
아무리 봐도 "나는 빙정 밖에 목적이 없어!"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까닭이다.
물론 정확한 근거라곤 먼지만큼도 찾을 수 없는 심증일 뿐이었지만.
"당연하죠. 적어도 여기선 우리는 전적인 협력관계니까."
"에이, 섭섭하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나는 그저 웃으며 길을 올랐다.
샬롯은 기만의 권능 때문에 우리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연신 이상한 눈길로 우릴 쳐다봤지만,"도시락 메뉴 이야기를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니 무슨 소리냐"라는 말을 해주자 금세 납득하고 말았다.
완전 최면어플 같은 권능이다.
'자아, 이 귀찮은 여자를 어떻게 떼어내야 하나.'
아스팔트 잔해를 걷어차며 머리를 굴렸다.
***
빙정은 흔히 '조금 차가운 돌멩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 위명과 달리 딱히 극적인 효과나 힘을 가진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영약과 최상급 재료로 분류되긴 하지만, 단위질량 당 가격이 금보다 낮을 정도로 흔하고 효율 낮은 돌덩어리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설국이라 불리는 일본 홋카이도에 돌멩이처럼 널린 질 낮은 빙정이 시중에 마구 풀리면서 생긴 일이다.
'진짜' 질 높은 빙정은 금 따위는 명함을 내밀 수 없을 만큼 비싸다.
그 정도 물건은 애초에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니까.
설악산에 있는 빙정도 그런 류의 '진짜 빙정'으로, 그 가치는 화수연이 탐내던 전어도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로 약 8000억의 가치를 갖는다.
서울의 요새도시화가 진행되며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명동의 공시지가가 제곱미터 당 5억이니, 명동의 약 1.6 제곱킬로미터를 구매할 수 있는 돈.
단순계산으로 따지면 명동 전체 면적이 0.99 제곱킬로미터니까 빙정은 명동 전체의 땅을 구매하고도 남을 가치를 가졌다는 뜻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하여튼 인간 뿐만 아니라 괴물들도 빙정의 가치를 아는지라 대청봉의 빙정을 둘러싼 영역 다툼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와이번, 프로스트 어보비네이션, 카토블레파스와 맨티코어, 지옥의 코끼리 헬리펀트까지
빙정이 흘리는 한기를 차지하기 위해 모두가 대난투를 벌이는 대청봉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아비늑대다.
아비늑대의 육체는 정직하게 말하면 위에 언급된 괴물에 비해 나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비늑대의 진정한 힘은 높은 지능과 사회화에서 나온다.
개체수가 적거나 무리짓기란 개념이 없어 하나씩 쳐들어오는 녀석들은 아비늑대의 전술과 합동공격에 쓰러질 수 밖에 없으며, 가족 단위로 무리를 짓는 와이번도 일천이 살짝 안 되는 아비늑대의 쪽수에는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아비늑대가 처음부터 그런 힘과 결속력을 보여준 건 아니었다.
많아봐야 수십씩 무리를 짓는 아비늑대가 일천이나 모일 수 있던 것에는 한 위대한 리더의 덕이 컸다.
통상적인 하얀 털이 아니라 검은 털을 가진 늑대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빙정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설악산을 돌며 각 무리의 리더를 때려 눕혀 세력을 불렸고, 특유의 강함과 카리스마로 늑대들을 지휘해 와이번을 쫓아내고 빙정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검은 늑대는 현명한 두뇌와 범접할 수 없는 힘으로 근 수십 년간 아비늑대를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실로 아비늑대의 전설적인 리더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검은 늑대는 이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늑대들은 몰랐겠지만 위대한 리더는 '치매'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는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했고, 무리의 갈등을 공정한 해결책 대신 문답무용의 처형으로 다스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윽고 무리는 검은 늑대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졌지만 반란이 연거푸 실패하면서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반란에 질린 검은 늑대는 조금이라도 반항기를 보이는 늑대들의 입을 찢어 무리에서 내쫒기 시작했다.
인정과 긍지를 중요시하는 아비늑대들에겐 죽음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반항하는 이들은 없었다.
치매에 걸리며 빙정의 한기를 온전히 독차지한 검은 늑대는 도저히 무리의 힘으로 막아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검은 늑대가 노망이 났다.
우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엄마, 아빠, 언니, 조카, 다 불러라!
무너지는 아비늑대의 사회를 보고 있던 와이번 가족은 때가 왔음을 느끼고 낄낄 웃었다.
지난 수십 년간 파랗게 흐르는 한기를 목 안으로 꿀떡꿀떡 들이키고 싶어서 얼마나 군침을 흘렸던가!
빙정의 티끌만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대청봉 위를 날고 있노라면 사납게 날아와 꽂히는 검은 늑대의 시선은 얼마나 두려웠던가!
우리도 차가운 동굴을 차지하자!
새똥 같은 늑대들을 쫓아내자!
증오스런 검은 늑대를 한입에 씹어 삼키자!
신비한 하늘색의 비룡들이 하늘 위로 날아 오른다.
비늘이 하나하나 자랑스럽게 숨쉬며 한기를 내뿜었다.
빙정을 둘러싼 전투의 서막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