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6)
* * *
설악산에서는 GPS를 쓸 수 없다.
헌터협회가 출입이 금지된 설악산 내부에 한해서만 혼선을 놓은 것이다.
헌터나 인퀴지터에게 주어지는 전용 GPS는 터지지만 위치정보가 실시간으로 협회에 전송되므로 여기서 그걸 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얄팍한 지도에 선을 긋고 점을 찍으며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해야 하고, 옛저녁에 파괴된 등산로의 흔적을 좇아 대청봉으로 향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여기 한계령 휴게소가 맞습니까?"
"지도상으론 그래. 틀림 없어."
"건물은 커녕 잔해도 보이지 않는군요. 수풀이 이리 가득해서야 원."
수준급의 추적술을 익힌 샬롯도 단숨에 알아채지 못할 만큼 변해버린 휴게소.
인간의 흔적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수풀이 거기 있었다.
"확실히 흙 사이에 부서진 합판이나 유리 잔해가 있긴 합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뻔했군요."
"등산로가 어디로 이어진지는 알겠어?"
"휴게소가 있던 곳의 범위를 가늠할 수만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조금만 수고해줘, 그럼."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 환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스핀 씨는 뭐하세요?"
"이거 봐요!!! 얘 귀엽죠!!!"
겁에 질린 꿩처럼 수풀에 머리를 박고 있던 박스핀.
무언가 열심히 뒤적이던 그녀는 내게 웬 버섯을 척 내밀었다.
다름 아닌 빨간 갓이 인상적인 광대버섯이었다.
"그거 광대버섯 아니에요? 독 있는 건데."
"에이!!!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귀엽고 맛있는 버섯돌이라는게 흐하하학!!!흠흠! 이거 왜 이러지? 갑자기 눈앞에 뭔가 보이지 않아요?? 우, 웃음도 흐히힉!!!"
"먹으면 환각 증세를 일으켜서 미친듯이 웃게 되거든요. 그래서 광대버섯이에요."
"아하하하핫!!! 거, 거짓말!? 흐, 흐히히히히힛!!!"
이미 몇 개를 먹었던 건지 박스핀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큰 웃음소리를 내며 땅을 떼굴떼굴 구르는 게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다.
'저 정도 능력자면 이따가 멀쩡하게 일어나겠지.'
나는 박스핀을 무시하고 수풀을 발로 헤집었다.
조금 주의를 기울여보니 머지 않아 산삼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심마니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곳을 이상향으로 여기는 이유는, 이 산삼 같이 희귀한 식생들이 잡초처럼 널린 설악의 생태 때문이었다.
'스승님이 보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하네.'
평소에 구하기 힘든 나물을 구할 수 있다고 좋아할 지도 모르겠다.
가소희에게 산삼이란 비싸고 단맛 들어간 달래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희귀한 식재는 맞지 않은가.
하긴, 엘릭서의 베이스가 되는 만드라고라로 김치를 담가버리는 인간이 이런 곳을 싫어할 리가 있겠냐만은
나는 산삼을 캐서 돗자리에 싼 뒤 배낭에 넣었다.
원래 생으로 쑤셔 박으려고 했지만 산삼은 잔뿌리가 중요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들은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어차피 팔 것도 아닌데 보존 상태 따위가 중요하겠냐만은.
'중요한 건 마음이지. 그렇고 말고.'
그러고 보니 가소희는 한국에 잘 왔으려나.
만나면 산삼 무침이나 해달라고 졸라야겠다.
수풀을 헤집으며 능이버섯이나 하수오 따위를 더 캐냈을 즈음, 샬롯이 등산로를 찾아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수풀을 마구 베어내자 부서진 목조 계단의 잔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등산로가 있었다는 증거다.
"꽤 빨리 찾아냈네?"
"운이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스핀 씨는 대체 뭘하고 계신 겁니까?"
"마약."
"예?"
광대버섯은 마약으로도 쓰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광년이처럼 웃어대던 박스핀은 커피색 스타킹이 죄 찢어지고 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독소는 땀으로 배출한 건지 그녀에게서 묘한 냄새가 났다.
"우흐와아 버, 버섯돌이!!! 너 제법이구나!!! 균류에게도 이토록 대단한 가능성이 있었다니!!! 당장 하데스한테 버섯의 인자를!"
"뭐라고요?"
"아, 암것두 아니에요!!! 자!!! 빨리 가죠!!!"
박스핀은 허겁지겁 일어나 샬롯에게 쌩하니 달려갔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난 못 들었다.
'기분 탓인가. 어서 가야지.'
나는 일행과 함께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길잡이는 샬롯이, 괴물을 쫓는 건 박스핀이.
계획에 없던 동행자들이지만 꽤나 유능한 동료들이었다.
물론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맛있는 거나 줍고 있을 수 밖엔.
"와, 송이버섯도 있네! 이게 대체 얼마짜리야. 팔지도 않을 거지만."
"맛있는 겁니까?"
"응? 송이버섯을 몰라?"
"모릅니다."
"푸후후, 버섯의 왕이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샬롯은 내 말을 듣고 송이버섯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섯의 왕은 트러플 송로버섯입니다만."
"송로? 버섯의 왕은 송이지! 향으로 라면스프를 이기는 버섯이잖아?"
"확실히 향이 진하긴 합니다만, 그 버섯에선 송진향이 나는군요. 소나무 껍데기에서나 나는 냄새가 아닙니까. 그리고 향은 송로버섯도 뒤지지 않습니다."
"흥, 양키 센스 아니랄까봐 미적으로도 향으로도 식감으로도 송이가 압승인 것을!"
"그게 미美적으론 이길지 몰라도 미味적으로는 집니다."
이렇게 송이를 옹호했지만, 사실 나는 송로버섯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능이와 송이까진 먹어봤지만 송로는 너무 비싸서 구경도 해본 적이 없다.
"스핀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뭘요?? 그보다 얘 귀엽죠!!! 은근히 맛이 괜찮더라고요!!! 독은 있지만 한 입 먹어볼래요??"
"아닙니다."
샬롯은 광대버섯을 주머니에 꾹꾹 눌러 담은 박스핀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매끌한 빨간 갓에 흰 무늬가 다닥다닥 박힌 게 은근히 예쁘긴 했지만 먹어보기는 결코 싫은 비주얼이었기에.
끼에에에에엑ㅡ!!
그때, 하늘 위로 와이번이 날았다.
멀리서 우는 소리는 이따금씩 들렸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와이번이군요."
"그러네. 개멋있다."
"개멋있다니, 잼민이나 쓸법한 말입니다."
"재, 잼민이"
끼에에에에엑ㅡ!!
두 번째 와이번이 지나갔다.
우연인지, 둘의 동선이 같은 것 같았다.
아비늑대의 구역인 대청봉으로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것일까?
"후아암. 잼민이라는 말이 어때서 그래요?? 시리가 영국에서 왔다니까 그럴 수도 있지!!!"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 이름은 샬롯입니다 그리고 전 미국인이에요."
"아! 미안해요, 샬레! 자꾸 이름이 헷갈리네요!!!"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끼에에에에엑ㅡ!!
세 번째 와이번이 지나갔다.
저 와이번은 도피하는 둘을 따라 쫒는 아버지, 그런 포지션일까?
하긴, 와이번의 사회는 혈연관계가 중하다고 하니까 저런 일이 있을 법도 하다만은.
'젠장, 그럴 리가 없잖아.'
샬롯의 얼굴이 굳었다.
박스핀은 늘 그렇듯이 헤실헤실한 얼굴이었지만, 시선은 하늘의 남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색 비늘을 가진 비룡들이 떼거지로 앞서간 와이번을 따라 날고 있었다.
끼에에에에에엑ㅡ!!!!!!
비룡 떼가 태양빛을 가르며 날아간다.
우리의 눈앞에 와이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다시 걷힌다.
딱 봐도 서른은 넘는 숫자다.
"와하!!! 저거 대청봉으로 가는 거 맞죠!!! 빨리 가봐요, 빨리!!!"
"자, 잠깐. 위험하지 않습니까? 와이번이 저렇게 떼거지로 몰려간다는 건 대규모 세력 다툼의 징후가 아닙니까."
맞다.
세력 다툼의 징후다.
유일하게 와이번의 세력권이 아닌 대청봉으로 저렇게 수십의 패를 이뤄 찾아간다는 건 아비늑대를 쫓아내고 대청봉을 차지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세력다툼 맞을 걸. 아비늑대랑 전쟁이라도 하려나 보지."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 휘말리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어. 세력 다툼 끝날 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고. 우리 내일 일출 전까지 나와야 돼."
예상컨대, 저 정도 규모면 약 이틀은 지나야 비로소 극대점을 넘어 소강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산을 내려와야 한다.
"난 저기에 있는 게 꼭 필요해. 불안하면 여기서 기다려. 나 혼자라도 갈 테니까."
"쯧, 알았습니다. 세력 다툼이야 안 휘말리면 되는 거니까요. 저 녀석들이 우릴 대놓고 노릴 이유도 없고 말입니다. 큰일이 있지야 않겠죠."
"그럼그럼!!! 저도 여기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진 마세요!!! 와이번 정도는 암것두 아니죠!!!"
박스핀이 자랑스럽게 허리에 양팔을 짚었다.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크게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행적만 보면 힘만 센 아이 같았으니
'그런 건 오팔이 알아서 하겠지.'
"흠흠, 그래요. 그럼 대청봉까진 서두르는 게 좋겠네요. 저쪽에선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모르니까."
"동의합니다. 지금부터는 외길이니 길을 찾는 게 딱히 힘든 일도 아니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5시 12분.
조금은 빨리 걷는 게 좋겠다.
***
하늘빛 비룡이 땅을 휩쓴다.
이전의 전쟁과 달리 우왕좌왕하던 늑대들은 와이번의 강하에 혼비백산해서는 뿔뿔이 흩어진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녀석은 자비 없는 발톱 아래 네 갈래로 찢기고 말았다.
와이번과 아비늑대의 전쟁.
검은 늑대의 쇠락과 무리의 분열을 알아챈 와이번이 선타를 가하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키키키! 멧돼지 잡는 것보다 쉽다!
갈매기가 날치를 낚아채듯 강하한 와이번은 여유롭게 어린 늑대 하나를 골라잡고 하늘을 날았다.
날카로운 이빨에 목덜미를 제대로 잡힌 늑대는 공중에서 애처로이 울며 동족의 도움을 갈구했다.
와이번은 구심점 없이 후퇴하는 아비늑대들의 위를 날며 그 구슬픈 울음을 널리널리 퍼트렸다.
.
검은 늑대 또한 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늑대들이 그의 동굴 앞에서 단체로 하울링을 하며 그들의 리더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위대한 지도자여, 당신의 늑대를 환란에서 구하소서.
지략의 검은 늑대여, 그 용맹을 다시 한 번 떨치소서.
우리의 영웅이여, 침략자의 목을 물어 부수고 동족을 이끄소서.
늑대여ㅡ
.
잠시 어렴풋한 감정을 느끼던 옛 영웅은 생각을 그만두고 굴 안에 벌렁 엎드렸다.
지금의 그에게 중요한 건 심장이 시리도록 차가운 빙정 뿐.
그 외에 허구한 날 울어제끼기나 하는 쓸모 없는 녀석들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저기다! 가족분들! 저기에 빙정이 있다!
물론, 병으로 판단력을 잃어버린 그는 와이번의 목적이 자신의 빙정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