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76화 (76/119)

〈 76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8)

* * *

마법서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S)'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어디 제단이나 상자에 놓인 것도 아니고 그냥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트랩도, 수호자도, 개연성도 없는 녀석이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S)]

­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우와아 이거 엄~청 불길한 책이네요?? 딱 봐도 인피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요!!!"

"인피는 아니에요. 인피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얼핏 보기엔 일반적인 책처럼 생겼다.

내용도 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쓰여 있어 도저히 네크로맨시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모습.

하지만 그 재질은 사람의 안구를 생으로 뽑아내 흰자위는 종이로, 눈동자는 잉크로 가공하여 만들냈으니 어찌 보면 인피보다 더 잔혹한 서적이라 할 수 있겠다.

박스핀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내 손에 들린 책을 뜯어 보며 불길하다느니, 섬뜩하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감상을 내놨다.

오팔의 계약자라는 사람이 저래도 되나 싶었지만 그야 내가 대신 걱정해줄 사안은 아니었기에 곧 신경을 끄고 말았다.

"그래서 그걸 대체 어디에 쓰시려는 거죠? 무척이나 사이한 물건 같습니다만."

"도구에 선악은 없어, 샬롯.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지. 결코 나쁜 짓에 사용하진 않을 테니까 안심해."

샬롯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다가 석연찮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당장 폐기하고 싶은 녀석이긴 했지만 일단은 오팔에게 말해 놓은 것도 있으니 당장에 불태워버리리라 말하는 것은 조금 눈치가 보였다.

"일단은 나갈까요? 아님 저녁이라도 먹고?"

"지금 시각이 8시 34분이군요. 먹고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앗! 저두요!!!"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꺼냈다.

들어오면서 작업해 놓은 것이 터지려면 한 10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박스핀 씨. 도시락에 그건 대체 뭡니까?"

"이거요?? 서른세발낙지라는 건데 엄청 맛있어요!!! 슐리는 절대 안 줄 거예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그걸 생으로 가져왔습니까?"

"네!!!"

박스핀은 무려 서른세 개의 다리를 가진 낙지를 도시락에서 들어 올렸다.

세발낙지의 세발은 다리가 세 개라서 붙은 말이 아니건만, 저건 대체 왜 서른세발낙지라고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박스핀은 자랑스레 히죽 웃어 보이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서른세발낙지를 생으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33개에 달하는 다리가 꿈틀대며 박스핀의 얼굴을 덮는게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광경이었다.

"밥맛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징그러워요."

"저걸 생으로 먹는 것보다 낙지를 도시락에 산채로 가져온 게 더 신기한데."

혹시 저 도시락이 아이스박스라도 되는 것인가.

나는 낙지를 들고 야만인처럼 와적와적 씹어 먹는 박스핀을 멍하니 쳐다보며 젓가락을 놀렸다.

그렇게 약 5분이 지났을 때 쯤.

동굴의 입구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크르르

크고 깊은 상처를 몸에 한가득 입은 짐승.

한 쪽 앞다리가 처참하게 비틀려서 절뚝이는 검은 털의 아비늑대였다.

"."

열심히 밥을 먹고 있던 우리는 조용히 도시락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반적인 개체와 다른 색을 가진 녀석은 대체로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니.

실제로 혼자인데다 부상까지 입었는데도 놈이 흘리는 기운은 심상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늑대는 입구에서 피가 섞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쪽을 들여다 봤다.

분위기가 흉흉한 게 아무래도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박스핀 씨.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으음~ 앵간한 위협으론 안 되겠는데요??"

그녀가 숨기고 있는 힘을 다 드러내면 저 늑대 정도야 쉽게 죽일 수 있겠지만 박스핀은 굳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잠재적인 적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을 테니까.

늑대는 긴장하는 우리를 보며 침을 뚝뚝 흘렸다.

아무래도 우리를 먹고 몸을 회복하려는 요량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은 늑대에겐 비극적이게도 삶이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끼에에에에엑ㅡ!!!

곧장 와이번 하나가 동굴 안으로 날아와 검은 늑대를 들이박았으니까.

옆구리에 와이번의 급강하를 제대로 맞은 늑대는 와이번과 함께 동굴 안을 뒹굴었다.

둘은 곧 피 튀기는 초근접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늑대의 붉은 피와 와이번의 푸른 피가 뒤섞이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말 그대로 이전투구???의 현장.

우리는 둘의 싸움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저 검둥이는 와이번한테 쫓기고 있는 모양인데. 늑대 무리의 총대장이라든가, 그런 거 아냐?"

"흠흠! 시현 씨!!! 저 땅에 떨어진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박스핀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푸른빛의 결정이 땅바닥 위에서 고고하게 서리를 흘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빙정?이다.

나는 난데 없이 등장한 빙정의 자태에 얼척이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아비늑대의 리더가 빙정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는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눈앞에 뚝 떨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저거 말입니다. 가져가도 될까요?"

"둘이 싸우는 틈에 냉큼 가져가버리죠!!! 야호!!!"

박스핀이 신나게 달려들어 빙정을 취득했다.

그러자 한창 와이번을 밀어내고 있던 검은 늑대가 박스핀에게 크게 짖었다.

마치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마냥.

"어머?? 네 거니, 멍멍아??"

끄덕끄덕.

박스핀은 빙정을 품에 넣고 늑대에게 소리쳤다.

"그럼 잘 챙겼어야지!!! 이제 내꺼야!!!"

커허엉!!!

늑대보다는 호랑이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낸 검은 늑대가 와이번을 뿌리치고 박스핀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나의 안배가 작동했다.

'칫, 빨리도 터져주네.'

꽈과광ㅡ!!!

연구계 지하층에 들어가기 위해 성초은의 연구실에 갔을 때 얻어 놓은 적마력과 녹마력의 혼합 샘플.

동굴에 들어오면서 페트병을 버리듯 자연스럽게 던져 놓은 시한폭탄이 비로소 폭발하며 동굴의 천장을 무너트렸다.

[깊은 나락마저 오시하는 은신하기(­28%)]

그리고, 나는 행동에 보정을 넣으면서 무너지는 바위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것이 박스핀을 떼어내기 위한 나의 전략.

'동굴이 무너져서 어쩔 수 없이 일행과 떨어졌다' 따위의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는 짓이었다.

'샬롯은 박스핀이 힘을 개방해서라도 지켜주겠지. 애초에 샬롯이 이런 걸로 다칠 만큼 약하지는 않지만'

동굴의 붕괴 정도야 샬롯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저래 봬도 활을 당기는 만큼 몸이 근접계열 못지 않게 꽤 발달해 있으니까.

활 시위는 조상님이 당겨 주는 게 아니니 말이다.

'미안, 샬롯.'

나는 낙석 사이로 번개 같이 동굴을 빠져나갔다.

***

굉음과 함께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당황할 틈도 없이 바위 사이에 파묻힌 샬롯은 붕괴가 진정되자 잔해를 밀어내고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오늘 하루는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고단한 날인 것 같다.

'시끄럽고 무서운 마기 소유자, 때맞춰 찾아온 두 괴물의 세력 다툼, 이상하고 불길한 마법서, 검은 늑대와 와이번의 난입에 이젠 동굴 붕괴까지 가지가지 하는군.'

­ 샬롯!! 샬로옷!!

­ 으아앙 알록달록이 죽었어

"저는 이 정도로 안 죽습니다."

동굴이 붕괴되는 정도로는 C급 헌터 나부랭이도 죽이기 힘들다.

인간이 큰 몸집을 가진 것도 아니니 낙석을 많이 맞을 일도 없는데다 떨어지는 돌을 쳐낼 양팔까지 있으니.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약간의 요령만 있다면 두바이 빌딩의 붕괴 현장에 있더라도 골절 하나 없이 살아남는 게 헌터란 족속이다.

콰드득!!

"아으아!!! 이게 무슨 일이람!?? 마침 어깨가 뻐근하더라니 돌덩이가 내릴 징조였나?? 실란!!! 시현!!!"

"저는 여깄습니다."

"아, 그래요!!! 술탄!!! 거기 있었군요!!! 우리 빅붑께서는??"

"모르겠습니다."

스피넬은 샬롯 몰래 바위 밑으로 급속히 뿌리를 내려 생명 반응을 탐지했다.

정시현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으음~ 그랬나?? 재주도 좋지!"

"무슨 재주 말씀이십니까?"

"히히, 아니에요!"

사라진 정시현의 의도를 알아챈 스피넬은 먼지로 가득한 공기를 마시며 희게 웃었다.

정시현이 실수한 게 있다면, 스피넬의 얼빠진 모습만 보고 그녀를 은연 중에 과소평가했다는 것.

귀여운 옵시디언의 계약자가 수작을 부린 것을 나름 능력 있는 스피넬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 쯧. 신뢰를 저버리다니.

'뭐, 저도 제 할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좋은 일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기만의 대악마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데요? 애초에 당신도 옵시디언한테 구라를 쳤잖아요?'

­ 나는 권능이 기만이니까 해도 돼.

"푸흐흐, 귀여우셔라"

샬롯은 당황스럽게 스피넬을 쳐다봤다.

박스핀이 상당히 경우 없는 인간이긴 해도 대뜸 자신에게 귀엽다고 말하다니, 상당히 오해를 살만한 언행이다.

실은 샬롯이 아니라 오팔에게 건넨 말이었지만.

"우선 시현이부터 찾아보죠. 다쳐서 못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니."

"아니~ 걔는 나중에 찾고요! 우선 우리끼리 뭔가 해야 할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예?"

스피넬은 뿌리를 거두고 묻혀 있는 하반신을 마저 꺼냈다.

"우리끼리 비밀스럽게 히힛."

"!"

콰드드득!!

"저 늑대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다고요. 안 그래요??"

"아, 음.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넹?? 뭐가 죄송해요??"

커헝ㅡ!!!

폭발과 낙석 사이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검은 늑대가 빙정도둑에게 크게 포효했다.

빙정을 쥔 스피넬은 예의 헤실헤실한 웃음을 연구인의 그것으로 바꾸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설악산에 온 이유는 빙정 따위가 아니라 검은 늑대 그 자체였으므로.

'우리 사랑스런 하데스의 마지막 조각이 여기 있네.'

성황리에 제작되고 있는 우월의 네 번째 재앙급 융합체.

땅을 관장하는 하데스를 위한 메인 프레임이 스피넬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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