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9)
* * *
대청봉의 봉우리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청봉大?이란 명칭 자체가 '크고 푸른 봉우리'라는 뜻이건만 사철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만년설 때문에 이름값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대청봉은 대청봉이다.
눈발이 풀잎을 가리웠지만 아직 푸른 것은 남아 있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파란 번개가 아직 대청봉의 청을 맡고 있다.
쿠르릉
= 마침 먹구름이 모였네요. 이거 되게 악마소환의 장 같은데요.
"그러게. 멋있긴 하다."
내가 있는 곳은 설악산의 정점.
해발고도 1,708m 지점에 있는 대청봉 표지석 앞이다.
오후 11시, 불빛이라고 할 것 하나 없는 야산의 밤.
먹구름은 대청봉을 중심으로 서서히 나선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이따금씩 우레소리를 뱉으며 파란 번개를 번쩍이는 것이 실로 볼 만한 광경이었다.
흐린 날이 아니면 보기 힘든 광경이건만 뒤늦게나마 설악의 뇌성을 가까이서 듣게 되다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칠흑여제의 장막을 걷어내고 존재감을 드러낸 셀레스티는 스트레칭을 하듯 몸을 쭉쭉 늘이다가 슬쩍 내 등으로 향했다.
나는 굳이 망토를 말리지 않고 대청봉의 표지석을 힘을 줘서 살짝 들어냈다.
그 아래엔 손바닥만한 크기의 아티팩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푸른 갈기(S)]
옛날 옛적에 위대한 늑대가 있었어요. 그의 울음은 천둥이 되었고 그의 갈기는 벼락이 되었답니다.
먼 옛날, 번개의 정령왕과 벽력의 대천사가 자존심 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다름 아닌 '누구의 뇌전이 더 뛰어난가'에 대한 다툼이었다.
둘은 각자의 뇌전을 사용해 아티팩트를 하나 만들어 겨루기로 했는데, 이 때 정령왕 페이스카가 만든 아티팩트가 바로 푸른 갈기다.
= 오 그래서 누가 이겼대요? 네?
"위력은 벽력으로 만든 리베라가 더 뛰어났고 컨트롤은 번개로 만든 푸른 갈기가 더 뛰어났다나. 그래서 비겼대."
사실 활용도로 보면 푸른 갈기가 리베라보다 훨씬 뛰어나다.
성검 리베라는 어지간히 번개 친화력이 높지 않은 이상 쥐자마자 잘 익은 전기구이가 되기 십상이지만 적어도 푸른 갈기는 그럴 일이 없으니 말이다.
내 손바닥 위에 놓인 푸른 갈기는 십자 모양의 브로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령왕의 번개로 제련된 시퍼런 청금석 십자가에 각종 조각과 황금을 가미해 만든 호화로운 물건.
성능 없이 생김새만으로 수백억은 우습게 넘길 녀석이다.
= 이건 어떻게 쓰는 거예요? 그냥 차고 다니면 되나?
"잘 봐."
백문이불여일견이라, 나는 푸른 갈기를 손아귀에 쥐어 활성화했다.
푸른 갈기는 곧 일자로 청색 뇌전을 튀기며 길쭉한 투창의 모습을 취했다.
번개가 땅에 닿지도 않았건만, 발 아래에 쌓인 만년설은 그 열기에 순식간에 녹아버리며 밑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 이거 바위도 달궈지고 있는 거 맞죠? 그러고보니 공기도 뜨거운 것 같은데요? 당신 손 괜찮아요!?
"보다시피 컨트롤 능력이 뛰어나서. 내겐 직접적인 해가 안 오는 거야. 들고 있다보면 공기가 달궈져서 나도 익어버리겠지만"
나는 투창을 방패 모양으로 바꾸었다.
길쭉하게 사출되던 번개는 내 의지대로 둥근 원반 모양으로 변해 방패처럼 변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피시시
= 뭐야!! 이거 꺼졌는데요? 불량품 아니에요?
"원래 이런 장비야. 계속 그렇게 켜고 다닐 수 있으면 내가 태도를 왜 들고 다니겠니."
= 으엑. 조루!
푸른 갈기의 의의는 번개의 극적인 압축과 컨트롤을 제공하는 아티팩트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내가 따로 엄청나게 강한 번개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보니 푸른 갈기에 내장된 재생성 배터리를 이용해 번개를 다뤄야 하는데, 이는 길어야 칠 초면 방전되기 때문에 도저히 길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못 된다.
기껏해야 투창이나 잠깐의 방어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
켜는데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막 뽑아 쓸 수는 없는 친구다.
"조루라도 순간적인 화력만큼은 대단하잖아?"
=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거 재충전까지 얼마나 걸려요? 설마 일주일, 이러진 않겠죠?
"에이, 우리 쓸모 없는 빨갱망토처럼 그렇게 대기시간이 길지는 않아."
= 뭐라구요!??
"푸흐흐."
아무것도 안 했을 때의 대기시간은 약 사흘.
콘센트에 꼽아두면 열 시간이면 된다.
= 이 미친! 그런 것도 연결 돼요!? 그보다 딱 봐도 전기 먹는 하마처럼 생겼는데 괜찮은 거 맞아요?
"전기세를 내가 내냐, 아카데미가 내지. 난 기숙사비랑 학비만 내면 끝인데, 뭐."
심지어 나는 무상급식의 시대에 살고 있다.
= 돈도 많으면서
"스승님 돈이거든. 그리고 그거 다 주식에 박았어."
= 엥?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아니? 경제 지문만 나오면 학을 떼는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푸른 갈기를 비활성화하고 가슴팍에 달았다.
검은 코트에 멋들어진 브로치라니, 내가 생각해도 꽤 멋지다.
다른 애들이 보면 한심함이 한뜩 어린 시선을 보내올 테지만.
"내려가자."
= 벌써요? 저 나쁜 질투쟁이 깜둥이가 저를 또 심연 속에 처박을 텐데 조금만 늦게 가면 안 돼요??
자꾸 그런 식으로 음해하지 마세요. 잠시 장막으로 덮는 걸 심연에 처박는다니
"어차피 곧 내려갈 텐데, 뭘. 아래쪽에서 뭔가 일이 나지 않는 이상은."
끼에에에엑─!!
하늘에서 불길한 와이번의 울음이 들려온다.
울음소리가 한두 놈이 아닌게 꽤 시끄럽다.
'에이, 둘이 애들도 아니고. 알아서 잘 탈출했겠지.'
나는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
스피넬은 검은 늑대를 최대한 멀쩡하게 잡기 위해 생각을 짜내고 있었다.
굳이 인간의 몸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심하게 부상 입은 늑대 따위야 손쉽게 포획할 수 있겠지만 샬롯의 존재 때문에 그런 짓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순수한 인간의 몸을 이용한 육탄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생화학적 술수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검은 늑대의 시선이 위아래로 던졌다 받았다하는 빙정을 따라 움직였다.
아비늑대 따위야 한참 전에 이해한 스피넬은 단번에 검은 늑대의 증세를 진단해냈다.
'알츠하이머잖아? 하긴, 너무 강해서 평균 수명을 한참 넘겨버린 녀석들이 대개 그런 최후를 맞지. 사실 뼈대만 필요한 거니까 내 알 바는 아니긴 한데.'
판단력의 부재를 노린 스피넬이 빙정을 하늘 위로 집어던졌다.
빙정의 움직임에 집착하던 검은 늑대는 예상대로 빙정을 따라 땅을 딛고 도약했다.
스피넬이 노리는 것은 늑대의 목, 혹은 복부.
부서질 뼈가 별로 없는 급소다.
"스핀 씨!!!"
스피넬이 검은 늑대의 훤히 드러난 급소를 노리고 하늘 위로 뛰어오른 그때, 땅 위에 서 있던 샬롯이 급박하게 경고를 보내왔다.
무시하고 공격을 가하려던 스피넬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기압의 변화를 느끼고 혀를 찼다.
'어보미네이션이잖아.'
머리 두 개에 팔 아홉 개.
그리고 모두 다르게 생겨 먹은 수백 개의 다리.
등 뒤엔 수많은 인간의 얼굴을 박제처럼 박아 놓은 끔찍한 모습의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이 스피넬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카가가가가각!!
본래는 얼어붙은 호수 아래에 사는 바이칼 인어의 것이었을 싸늘한 기압 커터.
시중에서 파는 장난감 레이저만한 두께였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설악산 먹이사슬 정점에 선 괴물인 아비늑대의 가죽 따위는 방해물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앗."
장엄하게 뛰어오른 늑대가 구슬픈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떨어졌다.
꿰뚫린 곳은 하필이면 다루기도 쉽지 않은 턱 부근의 연골 관절.
스피넬은 소중한 메인 프레임이 상했다는 것에 분노해 눈을 부라렸다.
"야, 이 씻─"
콰가가가가각!!
다시 한 번 기압 커터가 하늘을 가른다.
공기를 얼려 가르는 커터가 스피넬의 머리를 향했지만 우월의 수장은 고개를 틀어 손쉽게 피해버렸다.
첫 번째 재앙급 융합체라는 타이틀은 딱지치기로 얻어낸 위명이 아니다.
'칫, 몸의 팔 할을 놓고 와서 그렇지!'
놓고 온 나머지 팔 할은 현재 하데스를 축조하고 있다.
"조심하십시오!! 뒤에 와이번도 있습니다!!!"
"네에!??"
샬롯의 말대로, 땅으로 떨어지는 스피넬을 낚아채기 위해 와이번 무리가 편대 비행으로 날아왔다.
그녀가 빙정을 갖고 있던 걸 보고 일부러 노린 것이다.
끼에에에에엑─!!
자유낙하하는 스피넬을 둘러싸듯 돌진해오는 와이번 떼.
스피넬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흉악한 발톱을 마기로 힘껏 쳐부수며 한 와이번의 발을 잡고 위에 올라탔다.
"너희들은 필요 없어!!!"
콰드드득!
스피넬의 관수가 와이번의 뒤통수를 뚫고 들어간다.
뇌를 부수지는 않고 두개골 속에서 우악스럽게 감싸쥔 스피넬은 곧 신경물질에 조작을 가한 뒤 다시 땅으로 뛰어내렸고, 스피넬에게 두개골을 꿰뚫린 와이번은 잠시간 이상행동을 보이다가 자연스럽게 어보미네이션 쪽으로 강하했다.
■■■──!!
문자로 표현하기 힘든 괴성을 지른 어보미네이션이 떨어진 와이번을 붙잡고 아홉 갈래로 찢어버린다.
와이번의 사체를 전신으로 소화한 어보미네이션은 갑작스런 와이번의 강하를 공격이라고 간주하고 와이번 무리에게 기압 커터를 날리기 시작했다.
끄웩! 쟤 왜 저러냐! 왜 하필이면 죽어도 그쪽으로 떨어진 거냐!
도망칠 수는 없다! 아직 빙정이 남았다!
꾸아악! 타, 타임! 날개! 날개 맞았다!!
와이번이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에게 맞서 편대를 재편할 즈음, 샬롯은 정시현이 있을 법한 곳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난데 없이 펼쳐진 난전에서 정시현을 찾아 다 같이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물론, 이제 대청봉의 끝에 도달했을 정시현은 손톱이 부서져라 돌을 치워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시현!!! 시현!!!"
샬롯은 원시의 힘으로 손끝의 고통을 가라앉힌 뒤 계속해서 잔해를 뒤졌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사이에서 수첩을 들고 뛰어다니는 종군기자의 심정을 느낀 그녀는 약간의 울분을 느끼며 돌을 걷어찼다.
하필이면 이 위급할 때 대체 어딜 가서는
크르르
그런 그녀의 뒤로, 정신을 차린 검은 늑대가 다가왔다.
기압 커터로 살짝 얼어붙은 입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수라.
뒤를 돌아본 샬롯은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커허헝─!!!
"샬롯!!!"
드디어 제대로 된 이름을 부른 스피넬이 서둘러 달려왔지만, 늑대는 이미 입을 크게 벌린 상태.
샬롯은 다가온 죽음이 손을 흔들고 있음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콰드드득!
하지만, 검은 늑대가 아가리를 들이민 곳은 다름아닌 샬롯의 옆 바닥.
눈에서 귀기를 흘리며 몇 초간 땅을 뒤지던 늑대는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가리에 물고 바깥에 내보였다.
"빙정?"
난리통 속에서 빙정을 쟁취한 검은 늑대는 기쁘게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짓고는,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듯 빙정을 꿀꺽 삼켜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