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10)
* * *
빙정은 실로 많은 가능성을 지닌 물건이다.
극강의 효율을 가진 셀시어스 엔진의 코어가 될 수도 있고 마법 스태프를 만드는 데에도 쓸 수 있다.
깡으로 부숴서 일대를 빙하시대로 되돌릴 수도 있고, 한기의 정령왕이나 혹한의 대악마에게 진상하여 그 힘을 휘두를 수도 있다.
시중에 잡스런 빙정이 많이 굴러다녀서 그렇지, 실은 쓰이지 못하는 곳이 없는 팔방미인이다.
아우우우우─!!!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빙정은 대개 영약으로 인식된다.
몸 안에 극음의 한기를 심어주는 자연의 선물.
늑대라고 해서 그 덕을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사, 삼켰어?"
"에이씨, 화염기관은 빼야겠네 이리 와요!!!"
스피넬이 벙찐 샬롯을 뒤로 빼냈다.
검은 늑대는 속이 꽝꽝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우짖었다.
아우우우우─!!!
설악의 한기를 한가득 모은 빙정.
일반적인 영약도 가공 없이 함부로 먹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물건인데 마력 운용법도 모르는 늑대가 알 굵은 극음의 정수를 생으로 대책 없이 삼켜버렸으니 생명이 위험한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검은 늑대는 꼿꼿하게 앉아 고통을 버텨냈다.
땅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바른 자세로 길게 하울링하며 한기를 받아들였다.
사방으로 한기가 퍼져나가며 털 끝에 허연 서리가 맺히는 모습이 주변 괴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켁. 어머니! 쟤 돌멩이 먹는다!
어차피 곧 죽는다! 저 빙정은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엄마 와이번은 코웃음치며 자식을 얼렀지만, 검은 늑대는 오히려 극심한 부상에서 회생하고 있었다.
와이번 넷이 죽어가며 만든 깊은 상처들이 차가운 피로 봉합되고 힘이 다했던 근육엔 신선한 활력이 돋는다.
■, ■■■──!!!
제자리에 서서 기압 커터를 날리던 어보미네이션은 감히 빙정을 삼킨 검은 늑대에게 크게 울부짖었다.
기껏 아비늑대의 손아귀에서 떨어진 빙정을 쫓아 이곳까지 왔는데 다 죽어가던 녀석이 낼름 삼켜버리다니.
포식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어보미네이션에게 있어 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죽여라! 빙정은 아직 다 녹지 않았다! 죽여서 창자를 갈라라!
빙정이 아직 느껴진다! 검둥이는 돌멩이도 소화 못하는 멍청이다!
■■──!!!
검은 늑대에게 관심도 없던 와이번과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이 목표를 변경했다.
목표는 당연히 검은 늑대였다.
"야!!! 거기 안 서!!! 얘 몸에 털 끝이라도 닿기만 해봐!!!"
그리고, 그 앞을 스피넬이 가로막았다.
검은 늑대의 온전한 시체가 필요한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가득 찢어져서 배가 갈라진 시체는 못 써먹을 테니까.
샬롯은 늑대가 뿜어내는 한기에 몸을 떨며 스피넬을 말렸다.
"위험합니다! 빙정은 포기하고 시현이를 찾아서 몸을 빼는게!"
"에이, 그 친구 안 죽었어요!!! 그리고 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요!!!"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이 기압 커터를 쐈다.
힘을 갈무리하며 가만히 앉은 늑대의 목을 노린 공격.
졸지에 검은 늑대의 호법을 맡게 된 스피넬은 자리에서 뛰어 올라 공격을 쳐냈다.
"이 녀석아!!! 천변이 동족이라고 봐줄 줄 알아!!!"
스피넬이 땅에 가득 쌓인 바위를 들어올렸다.
무너진 동굴 위니 탄창은 사실상 무한.
근육에서 마기를 폭파시켜 생체 내연기관을 구현한 스피넬이 있는 힘껏 바위를 집어 던졌다.
콰광!!!
한쪽 머리에 바위를 제대로 맞은 어보미네이션이 몸을 비틀거렸다.
수백 개의 다리로도 감당해낼 수 없는 거대한 충격이 어보미네이션을 무력화한 사이, 그 틈을 탄 와이번 떼가 공중에서 늑대를 습격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스피넬이 급히 뛰어 와이번 둘의 골통을 부쉈다.
하지만 달려든 와이번의 수는 총 다섯.
세 마리가 아직 검은 늑대를 노리고 있었다.
"눈 감으십시오!!"
그때, 공중으로 웬 금속 쪼가리가 날아들었다.
하늘을 날던 섬광탄은 곧 한 줄기 화살에 예술적으로 꿰뚫렸다.
찌잉─!
끄우아악! 뭐, 뭐냐악!
내, 내 눈!! 눈이 불탄다!! 이제 시집 못 간다!!
끼야아아악!!!
끼에에에에엑─!!!
붕괴하는 동굴을 탈출하던 정시현이 코트에서 떨어트린 섬광탄.
그것을 공중으로 힘껏 던져 화살로 쏴 맞춘 샬롯이 와이번 셋을 격추했다.
"빨리 나오십시오!! 거듭 말씀드리지만 위험합니다!!"
"아이, 실란!!! 고맙긴 한데 당신부터 잠깐, 뒤에 봐요!!!"
직감과 정령의 경고를 들은 샬롯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샬롯이 몸을 피하자마자 흰 털을 가진 짐승이 샬롯이 있던 곳을 덮쳤다.
검은 늑대의 하울링을 듣고 찾아온 일반 아비늑대다.
아우우우우우─!!!
빙정을 삼킨 검은 늑대의 하울링은 계속되고 있었다.
늑대의 소집령이나 다름 없는 울음소리에 줄곧 밀리고 있던 아비늑대가 응답한 것이다.
기압 커터를 포기하고 육탄전을 선택한 어보미네이션을 힘으로 밀어내던 스피넬은 참전한 아비늑대 무리를 보고 간만에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신체의 이 할 밖에 없는 상황에서 변신도 쓰지 못한 채 온갖 괴물 무리에게서 검은 늑대를 지키는 것은 그녀로서도 힘에 부치는 일이기에.
그에 더해 스피넬은 샬롯도 다치지 않게 지켜야 했다.
사실 스피넬로서는 샬롯의 생사 따위 알 바가 아니지만 오팔이 쓸데 없이 정이 많은 칠흑여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자꾸만 닦달을 해댄 까닭이다.
괜히 부스럼 만들지 말자고. 하데스의 프레임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며?
"저한텐 쟤보다 하데스가 더 중요하거든요!!! 저거 아니면 재앙급도 못 만든단 말이에요!!!"
쯧. 비늘 갖기 싫으면 그러든지.
"이 개 비열한 아, 알겠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셜록!!! 이리 와요!!! 지금 탈출하는 게 더 위험해요!!!"
꽈직!
와이번의 발목을 붙들어 어보미네이션에게 던져버린 스피넬은 약간의 서러움을 느꼈다.
***
"와. 이게 무슨 일이다냐."
= 일이다냐?? 방금 귀여운 척 한 거예요?
후후. 깜찍하긴 하죠.
"아니, 멍청이 악마들아. 이상한 소리 말고 저것 좀 봐."
봉우리를 내려오던 나는 종족간 대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자리에 멈춰섰다.
내가 무너트리고 탈출한 동굴 근처에서 아비늑대와 와이번이 한바탕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 왜요? 걔네가 휘말렸을까봐요? 쟤네가 쬐꼬만 사람 둘을 뭐가 좋아서 건드리고 다니겠어요?
"그렇긴 하지. 괜히 나서서 싸우지만 않으면 쉽게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은근히 잘 어울리는 둘이라면 어딘가에 앉아서 띵가띵가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없어져서 열심히 찾는 중이려나.
그런 걸 생각하면 상당히 미안하기는 했다.
"있지, 샬롯한테 뭔가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
= 그건 모르죠? 명색히 기만의 대악마니까 뭔가 다단계 수작이라도 부렸을지도.
아닐 거예요. 걔는 은근히 절 두려워해서. 대놓고 견제를 했으면 했지 괜시리 이상한 꼼수는 못 부릴 걸요.
칠흑여제는 문제 없다고 말했지만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무너트린 동굴을 향해 나아갔다.
'거기까지 대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면 곤란한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싸움판 한가운데 서있을 리가 없으니 치, 없으면 먼저 내려가야 하나?'
그렇게 지도를 보며 몇 분을 걷던 나는 마침내 무너진 동굴 근처에 다다랐다.
눈 쌓인 솔잎 너머에서 수많은 늑대와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력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다.
= 에휴. 먼저 내려가죠. 걔네도 이미 내려갔을 걸요?
"으음 그러자. 그럼."
나는 발길을 돌려 눈 쌓인 산비탈을 내려갔다.
썰매라도 있으면 편하게 내려갔을 텐데
야 야 야 야
"후암. 졸리네. 요즘 째깍째깍 잤더니 밤에 졸려서 죽겠어, 그냥."
= 그게 좋은 거 아니에요? 새나라의 착한 악마 아니, 착한 성령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야 한다고 배웠어요!
"너 그 성령 컨셉질은 대체 언제까지 할 거니?"
= 흥. 솔직히 콤플렉스라구요. 당신들이 악마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안 좋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푸흐흐, 어떻게 악마 권능이 영웅담
= 야!! 조용히 안 해!!!
나는 내심 셀레스티가 악마가 아니라 천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뭐, 나름 잘 어울리긴 한다.
영웅담의 천사라니 조금 멋지기도 하고.
와 와 와 와
= 크흠, 흠! 그런데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와와와 하는?
"네가 소리 질러서 메아리 생긴 거 아냐?"
= 아니거든요. 괴물 그득그득한 야산에서 소리지를 만큼 담 좋지는 않아요. 영웅 하나 죽일 일 있나. 그리고 전 와와 거린 적 없거든요.
"그냥 해본 소리야. 난 사실 못 들었거든.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냐? 망토에 오래 있어서 환청이 들린다거나?"
= 절 대체 뭘로 보시는 거예요?
몸도 없이 망토에만 갇혀 있으면 어딘가 무뎌지지는 않으려나.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어 어 어
= 아니, 방금 들으셨어요!? 어어 하는 소리!!
"그러게 잠깐. 이거 박스핀 목소리 아냐?"
= 그래요? 비슷한 것 같기도.
"."
나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 올랐다.
썰매라도 탔으면 낭패를 볼 뻔 했다.
"아직 이 산에 있는 건가? 왜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대?"
= 당신 때문 아니에요?
"으음, 맞는 것 같아."
= 무책임해라
나는 다시 동굴 쪽에 도착했다.
이번엔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야!!! 이리 안 와!!! 어딜 비행도마뱀 주제에 차륜전이야!!! 좀 죽어!!!
'와이번이랑 싸우고 있다고?'
나는 서둘러 솔잎을 걷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끼에에에엑─!!
쿵!!
그 순간, 눈앞에 와이번이 떨어졌다.
한 발짝만 앞으로 갔어도 머리에 맞았을 거다.
나는 기함해서는 뒷걸음치며 시선을 들었다.
"뭐야, 씹!"
그곳엔, 박스핀이 아비늑대를 휘둘러 어보미네이션을 후려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