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79화 (79/119)

〈 79화 〉 아직 못 본 푸른 갈기도 (11)

* * *

­ 이쪽이에요. 가장 비겁한 주술사.

박스핀의 폭력 아래 고통스레 우짖는 괴물들을 보고 있자 하니, 생소하게 생긴 정령이 날아들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귀여움이 가득한 여타 정령과는 다르게 냉정한 분위기을 풀풀 풍겨대는 한기의 정령이다.

아마도 샬롯이 이곳의 한기를 매개로 부른 것이겠지.

­ 기분 나쁜 인간이네요. 제 몸을 향한 음침하고 더러운 시선은 집어치우세요.

"뭐? 이 얼음 쪼가리가 샬롯은? 샬롯은 어딨어?"

­ 우리 예쁜 알록달록이라면 저 기분 나쁜 인간 Mk­II 뒤에 있어요. 알아서 잘 쫓아오세요.

한기의 하급정령, 레이엔은 얼음 드레스를 하늘거리며 개판의 중심지로 날아갔다.

나는 와이번의 비행이 만드는 풍압을 느끼며 서둘러 레이엔을 쫓았다.

샬롯과 박스핀은 어째서인지 검은 늑대를 지키고 서 있었다.

검은 늑대의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빙정을 처먹은 것 같다.

"시현!! 이 상황에 대체 어딜 갔던 겁니까!!"

활에 무려 다섯 개의 화살을 매기고 허공에 속사를 펼치던 샬롯이 날 알아채고는 급히 달려왔다.

내 어깨를 짚는 손짓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 미안 붕괴에 휩쓸려서 길을 잃었어."

"다친 곳은 없습니까? 걸을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걸어왔거든.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샬롯은 다시금 하늘을 견제하며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검은 늑대가 빙정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노린 와이번과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이 난입하며 지금의 혼란이 빚어졌다는 것.

그리고 왠진 모르겠지만 박스핀이 빙정을 흡수하는 검은 늑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것까지.

나와 박스핀을 두고 차마 혼자 내려갈 수 없던 샬롯은 그녀를 도와 열심히 와이번을 쫓는 중이었다.

박스핀은 여기저기를 열심히 뛰어다니며 괴물들을 후려쳐 저지하는 중이었다.

늑대들은 이미 그녀에게 상당히 질렸는지 접근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부적술로 샬롯의 힘을 북돋아주며 박스핀에게 외쳤다.

"스핀 씨!! 내려가요!!"

박스핀은 대답 없이 검은 늑대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와이번을 때려죽였다.

하얀 성에가 낀 늑대를 지키기 위해 손날을 휘두르는 여성의 모습은 자못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그 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우리에겐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저 늑대가 필요한 것 같은데.'

빙정을 노리는 거라면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늑대의 뱃가죽을 갈라 꺼내면 될 일이다.

그녀가 빙정을 쥐는 순간 이 모든 괴물의 표적이 되겠지만, 박스핀이라면 어렵지 않게 떨쳐내고 산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빙정을 실시간으로 소화하고 있는 늑대를 전심을 다해 지킨다는 건 저 늑대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다.

"저 늑대가 왜 빙정을 먹었지?"

"스핀 씨가 대뜸 위로 던졌습니다. 검은 늑대가 빙정을 낚아채는 순간을 노려 녀석의 심장을 찌르려고 한 것 같은데, 어보미네이션의 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빙정을 미끼로 검은 늑대를 죽이려고 했다, 라.

대충 봤을 때 검은 늑대의 위험도는 A++급에서 S­­급 정도.

헌터의 안전을 고려해 괴물의 위험도가 필요 이상으로 높게 책정된다는 걸 생각하면, A급에 턱을 걸친 헌터, 그러니까 A급 기준 헌터 2명이면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의 위험도는 아무리 못해도 S급.

A급 기준 헌터가 6명이나 필요한 정도다.

와이번 가족과 아비늑대 무리의 공격을 싸그리 받아치면서 프로스트 어보미네이션을 시루떡으로 만든 박스핀이 검은 늑대를 상대로 그딴 수작을 쓸 이유가 없다.

'의문 투성이야. 왜 빙정을 삼키기 전엔 죽이려 했던 거고, 빙정을 삼킨 지금은 왜 지키려는 거야? 그리고 그냥 죽여도 될 걸 왜 굳이 빙정을 미끼로 써서 검은 늑대를 죽이려던 거지?'

­ 후후. 알 것 같네요. 저 친구는 그냥 저 늑대의 온전한 몸뚱이가 필요했던 거예요. 미끼를 쓴 이유도 단숨에 숨통을 끊어서 시체를 온전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겠죠.

'아. 그리고 검은 늑대가 빙정을 삼킨 지금은 모든 괴물의 척살 대상이 되어버렸으니까 사체의 훼손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서는 거구나.'

칠흑여제의 한 마디가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박스핀이 모종의 이유로 '검은 늑대의 훼손되지 않은 사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그리고 써먹을 구석이 없는 검은 늑대의 온전한 사체를 원하는 곳이라면 단 하나 밖에 없다.

'우월이구나. 씹년.'

사실 박스핀이 광대버섯을 먹을 때, 그 안의 이빨이 무척이나 뾰족한 것을 목격했다.

처음엔 그냥 개인의 특징이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그렇게 쉽게 넘길 건 아니었다.

괴물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지녔다는 점도, 그 괴이하기 짝이 없는 성격도.

우월의 시술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샬롯. 정령을 좀 불러줄래?"

"정령? 갑자기 정령을 말입니까? 정령이라면 이 주변에 레이엔이 많습니다만."

"다시 한 번 불러줘. 한기의 정령만 있지는 않을 거 아냐."

"음, 알겠습니다."

잠시 활을 멈춘 샬롯은 방울을 대충 휘저었다.

무척이나 성의 없는 부름이었음에도, 샬롯의 자연친화력에 이끌린 정령들은 좋다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야호!! 안녕!!

­ 으으, 여긴 춥다. 그 싸늘한 애들이 좋아하겠는데.

­ 쿨롱. 혹시 절 말한 거예요?

­ 아, 안녕, 레이엔!! 난 그게 아니라 우우

대충 방울을 휘저었다지만 그 결과까지 대충인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불러낸 정령들은 사대정령보다 번개의 정령과 한기의 정령이 많았다.

설산이기 때문에 한기의 정령이 많은 건 둘째 치더라도 번개의 정령이 많은 건 샬롯에게 있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번개가 번쩍이는 날씨라지만 심각한 뇌우도 아닌데 쿨롱이 이렇게나 나오다니.

"쿨롱? 어째서 여기에?"

­ 웅? 우린 여기 있음 안 돼?

­ 설마 사대정령 아니라고 차별하는 거야!? 알록달록 이 속성차별주의자!!

"그, 그게 아닙니다. 하지만 여긴 설산인데 어떻게?"

이곳에 번개의 정령인 쿨롱이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내 가슴팍에 달린 푸른 갈기 때문이다.

번개의 정령왕이 직접 만든 물건이니 주변에 번개의 정령이 모여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샬롯. 쿨롱한테 부탁해서 이것 좀 충전해줄래?"

"충전? 이건 뭡니까? 혹시 이게 쿨롱이 모인 원인입니까?"

"응. 궁금한 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빨리 충전해줘."

샬롯은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는 쿨롱을 모았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손바닥만한 여자아이들이 푸른 갈기에 신나게 모여들어 저희들의 힘을 모았다.

완전충전은 무리겠지만 한 10%까지는 충전이 될 것이다.

'그 정도면 간을 보기 충분하지.'

나는 박스핀에게 엿을 먹일 거다.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우월 좋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성초은을 괴롭힌 복수다.

푸른 갈기는 단순히 번개를 정교하게 내뿜는 게 다가 아니다.

정교하게 내뿜는 만큼, 정교하게 빨아들일 수도 있다.

번개의 극적인 유도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 우아앗! 엄청 빨려들어간다!!

­ 너 힘 안 주고 있지? 나 너무 힘든데!

­ 아, 아냐! 너나 힘 주시지!

푸른 갈기 위에 오밀조밀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댄 쿨롱들.

기나긴 세월 끝에 다시 세상에 출현한 푸른 갈기는 작은 하급정령의 번개를 무자비하게 빨아 먹고 그 배터리를 채웠다.

"샬롯. 지금 본 건 다 자연현상이야. 알겠어?"

"예? 무슨 자연현상 말씀이십니까?"

"있잖아. 먹구름 낀 날에 번개 떨어지고 그런 거."

"그 말씀은?"

나는 샬롯의 손에서 어느 정도 충전이 완료된 푸른 갈기를 집어들었다.

푸른 갈기를 쥐어 활성화 한 뒤, 그 위에 부적을 두 개 덮었다.

숨길 은?과 감출 폐?다.

"자연현상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 맞지?"

나는 투명하게 변한 푸른 갈기를 모른 척 내던졌다.

야구를 하겠다고 방망이를 든 다섯 살 짜리 아이를 상대하듯 느리고 완곡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십자 모양 브로치는 이윽고 검은 늑대에게 닿았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날아간 푸른 갈기가 번개를 끌어당겼다.

남은 10%의 전기를 모두 사용해서.

번쩍

그렇게 일섬一?.

콰르르르릉ㅡ!!!!

그리고 뇌성雪?.

하늘에 모여 있던 먹구름이 검은 늑대에게 푸른 벼락을 퍼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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