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81화 (81/119)

〈 81화 〉 복사꽃, 암살극에도 태연 (2)

* * *

버스가 서울에 닿았다.

나는 몇 시간을 내리 자고 있던 샬롯을 흔들어 깨우고는 차에서 내렸다.

서울의 중심지, 극정 아카데미 부근이다.

"오랜만에 보니 정겹군요."

"누가 들으면 한 달만에 온 건 줄 알겠네."

"그래도 정겨운 건 정겨운 겁니다. 즐거운 나의 집."

딱딱하게 내뱉은 샬롯은 허리를 구부리며 몸을 풀었다.

나는 잠시간 그녀를 보다가 휴대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큰 배낭을 들쳐 멘 샬롯은 슬쩍 어깨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고 휴대폰 화면을 넘봤다.

"또 어디 가십니까?"

"병문안. 조금 급한 일이라서."

"혹시 어떤 분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

잠시간 기억을 더듬던 샬롯은 기억났다는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무검희에게 검무를 사사받는다고 하셨죠. 솔직히 반신반의였습니다만."

"내가 무검희에게 검무를 사사한 거겠지. 스승으로 섬기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 아냐."

"까짓거 헷갈릴 수도 있지 너무 빡빡하게 나오십니다?"

자기가 불리할 때는 문명인다운 언어생활을 강조하면서 이럴 때만 쓸데 없이 관대하다.

내로남불 미국인 같으니.

무검희와 무녀에게 간다는 말에 샬롯은 눈을 빛냈다.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는데, 무정한 푸른 눈에 생기가 또랑또랑 어린 걸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지라 같이 가자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부탁해도 됐을 텐데 왜 그리 부담을 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불러낸 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극정 아카데미에서 크게 멀지는 않으니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를 타도 되겠지만 누구 말마따나 돈도 많은데 굳이 시간과 심력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난 부자니까 택시도 마구 타고 200원 비싼 꽃소금도 살 거다.

"히히."

"바보."

"뭐?"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합승한 샬롯은 배낭을 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새 또 잠을 잘 요량인듯 했다.

의외지만, 그녀는 시리도록 모범적인 인상과 다르게 수업시간에 꽤 많이 존다.

"잠깐. 거기 약초랑 버섯 있는데."

"그렇습니까."

"그런데 네 짐도 같이 넣은 거야? 그 쓸모 없는 잡동사니도 다 챙겨서?"

"제 짐은 쓸모 없지 않습니다."

샬롯은 대답을 회피하고 고개를 반대쪽 창가로 향했다.

다 같이 배낭에 쑤셔박은 게 맞나 보다.

그 귀한 것들이 상했을 게 분명했다.

'어휴. 상관 없지. 어차피 스승님 줄 거니까. 알아서 잘 써먹겠지.'

그러고 보니 미각이 사라졌단 얘기를 들었는데 이런 걸 줘도 되나 모르겠다.

대체 어쩌다 그런 일을 당한 거지?

차를 탄지 약 15분이 지나지 않아 서울대병원에 도착했다.

신성력의 등장 때문에 예전의 그 위상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현대의학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관이다.

서울대병원의 로비는 사람이 가득했다.

아직 현대의학만이 맡을 수 있는 환자도 많은데다 웬만한 동네 병원은 차원충돌 이후 싹 망했으니 대병원으로 환자가 쏠리는 것도 의외는 아니었다.

나는 모니터에 나타난 접수현황에 혀를 내두르며 번호표를 뽑기 위해 기계에 다가갔다.

"저기, 손님? 정시현 씨 맞으시죠?"

"네? 네에."

"특별 지시가 있어서요. 가소희 헌터님을 뵈러 오신 거라면 접수 없이 바로 올라가시면 돼요."

S급 헌터에 대한 예우인 걸까.

덕분에 나는 대기열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예우는 무슨. 인맥형 비리 비슷한 거겠죠."

"아니거든. 이 정도로 무슨 비리야. 부러워서 그러지?"

"흥."

우리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가소희의 병실로 올라갔다.

가소희가 입원한 곳은 다름아닌 일인실이었다.

그것도 병원 내에서 제일 큰 규모의 병실이었는데, 아무래도 S급 헌터를 다른 일반인 환자들과 함께 병실에 두기엔 조금 눈치가 보였나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고 안을 빼꼼 내다봤다.

"왔느냐, 꼬맹이!"

병실은 웬 차 향기로 가득했다.

내게 인사를 건넨 작은 체구의 무녀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종이컵을 홀짝였고, 환자복을 반듯하게 개어두고 내팽겨친 가소희는 면티 차림으로 반듯하게 차를 우리고 있었다.

병실에서 무엇하는 건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으음 실례하겠습니다"

칠성의 이름에 위압된 건지 샬롯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작게 인사했다.

가소희는 예쁜 도자기 잔을 들고 홀짝이다가 내게 반갑다는듯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공책에 붓펜을 세심히 놀려 내게 내보였다.

[ㅎㅇ]

성의 없는 메세지에 그렇지 못한 필치였다.

무녀는 내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분홍대갈빡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은 것이다. 들은대로 엄청난 잡탕이로구나."

"잡탕이요?"

"주술 몇 개로도 모자라 가슴에 환상과 어둠을 박았고, 팔에는 영웅담을 휘어잡았구나. 옷 안에는 허접한 암기가 수두룩한데다 겉에는 정령왕의 번개를 달고 허리춤엔 풍신의 검집과 대장장이 악마의 칼을 찼으니 네가 잡탕이 아니라면 누가 잡탕이겠느냐?"

­ 어머. 꽤 실력 있는 여자네요.

어둠이란 권능이 무색하게 한 눈에 존재를 들키고 만 칠흑여제가 낮게 탄성을 흘렸다.

그러든 말든, 무녀는 내 눈동자 깊은 곳을 천천히 꿰뚫어보며 덧붙였다.

"게다가 차원 틈새에 낀 악마와 괴상쩍은 능력까지. 사제가 쌍으로 지랄이구나."

"네?"

"어허! 무녀에게 같은 것을 두 번 묻는 것은 비례??니라. 훗햣햣!"

미래에서 온 셀레스티와 알 수 없는 능력을 언급한 무녀가 빙글 돌아앉으며 내게서 시선을 뗐다.

그나저나 괴상쩍은 능력이라는 건 무엇을 말한 걸까?

무녀는 종이컵을 뒤로 집어던지고는 가소희의 다관(찻주전자)에 손을 가져갔다.

가소희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쳐내자 무녀는 불퉁한 기색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내 무릎 위만 빼고 아무데나 편히 앉는 것이다! 원한다면 이 분홍대가리를 뭉개고 앉아도 되느니라!"

[걍 ㄷㅊ]

"친구한테 차 한 잔도 안 주는 벙어리한테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소희는 손가락을 들어 병실에 붙은 싱크대를 가리켰다.

수돗물이나 마시라는 뜻이다.

무녀는 어이가 없다는 태도로 항의했다.

"싫느니라! 나도 청태전!!"

[아리수라 먹어도 됨]

"자기는 식수도 정령왕한테 뜯어먹으면서!"

무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우아한 손길로 비어버린 잔을 채운 가소희.

당연히 무녀의 몫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군요. 굉장히 멋진 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조곤조곤 얘기해도 다 들리니라."

바람의 정령을 동원했음에도 귓속말을 도청당한 샬롯은 무안한 기색으로 근처 의자에 앉았다.

그녀에게 하나 있는 의자를 뺏긴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땅바닥에 다소곳이 앉았다.

혀의 제어권을 잃었다는 게 사실이긴 한지, 가소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하게 다도를 즐겼다.

향긋한 찻잎 향과 어우러진 그녀의 행동은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일구어내기 충분했다.

마치 무릉의 신선 같은 느낌이랄까.

[과일]

"네? 아, 그거. 바로 오느라 못 가져왔는데"

내 대답에 신선 놀이를 하던 그녀는 아미를 찌푸리더니 싱크대를 가리켰다.

나는 S급 헌터의 단호한 투정에 서둘러 샬롯의 배낭을 뺏어 들고 돗자리에 싸인 약초와 버섯을 건넸다.

"대신 이거 챙겨 왔어요."

[♡]

그녀는 돗자리 너머의 향취를 느꼈는지 만족스레 웃으며 내게 차를 따라주었다.

청태전이라 불리는 흑차였다.

'미각이 없어서 차를 마시는 건가? 하긴, 차는 향으로 마시는 거니까.'

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하게 우려낸 찻물이 옥색 잔 안에 찰랑였다.

차보다는 핫초코 따위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녀가 우린 청태전은 실로 훌륭했다.

무력 뿐만 아니라 식?에 있어서도 S급을 받기 충분한 솜씨다.

나는 무녀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피하며 가소희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거예요? 설마 다시 못 고치는 건 아니죠?"

[사흘이면 됨]

"싸우다가 혀라도 씹으셨어요?"

헌터들도 격하게 움직이면서 말을 하다보면 혀를 씹는 일이 왕왕 벌어지곤 한다.

싸우면서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커맨더 포지션의 헌터가 겪는 고질적 고충이라나.

[ㅡㅡ]

반응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킥킥. 이 친구가 그 정도로 띨빵하진 않느니라. 분홍대가리, 혹시 태소식太??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느냐?"

[ㄴ]

"그럼 내가 설명해줘야겠구나."

무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재빠르게 다관을 빼앗아 들었다.

가소희가 마뜩잖은 시선을 보냈지만 무녀는 단숨에 청태전을 모두 들이키고 푸하, 하는 숨을 내뱉었다.

"휴우, 역시 그대의 차는 일품이구나. 태소식이라는 건 화편검무의 오의 비슷한 것이니라."

[오의 아님]

"그러니까 비슷한 거라고. 잡탕 꼬맹이! 항심?心이 무엇인지 아느냐?"

"항심? 유항산??이면 유항심??心 말씀이세요? 맹자에 나오는 거잖아요."

"마, 많이 아는구나."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마음이 변치 않는단 뜻.

궁핍한 백성들에게 말로만 인의를 부르짖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소리다.

가소희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은 무녀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선연한 비웃음이었다.

[애한테 아는 척하다 털리네 ㅋㅋ]

"이 무례한! 털리긴 뭘 털린 것이냐! 아무튼 내가 말하는 항심은 조금 다른 뜻이니라! 태소식은 타 초식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아니라 마음의 변치 않는 부분, 즉 항심을 구현한 것이니!"

태소식의 태소太?는 태초太?와 비슷한 뜻으로, 맨 처음을 뜻한다.

항심 또한 마음의 변치 않는 부분으로서 온전한 마음의 기초가 된다는 부분에서 태소식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리라.

"정해진 틀을 벗어나 주술로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니라. 어떻게 보면 전능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항심은 변치 않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전능과는 거리가 머니까 주술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그 대가라는 게 혀의 통제권인가요?"

"그건 사람마다 달라서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분홍빡통의 경우에는 그렇다만, 나는 조금 다르니라. 알려줄 수는 없다만."

본디 주술이란 세계와 개인 간의 거래.

그 화폐는 꼭 스피릿일 필요가 없으니 신체부위의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잃는다고 해서 크게 놀라울 건 없었다.

사람의 심장을 바쳐 기우제를 지낸 사례도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태소식 이름은 ☆도향유천추?????☆임 존나 멋있지]

"너희 헌터란 족속들은 어째 오그라드는 이름을 짓지 못해 안달인 것이냐?"

[내 마음임 ㅂㅅ]

나는 둘의 격의 없는 대화를 보다가 물었다.

"아니, 그래서 그 도향 머시기를 왜 썼느냐고요. 듣자하니 엄청 센 기술 같은데."

[엄청 큰 기계촉수가 나 죽이러 옴]

"기계촉수?"

"유람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데 웬 포세이돈이란 거대 괴물이 분홍대가리를 죽이러 온 것이다. 유람선은 내가 지켜냈지만 여파로 해일이 일어나서 부산 쪽이 피해를 입었고."

나는 기계촉수와 포세이돈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거대한 기계괴물을 만들어낼 놈들은 우월 밖에 없는데다, 박스핀이 하데스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걸 상기했기 때문이다.

'검은 늑대는 하데스라는 것을 만드는데 쓸 예정이었나? 그보다 가소희를 죽이러 와? 왜?'

[그리고 나보고 카타스트로피 주적이랬음]

"정작 분홍대가리는 일본이 난리 났을 때 우리 집에 박혀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이다."

[네 심심함을 덜어줬는데]

"덜어준 건 심심함이 아니라 내 지갑 무게겠지, 이 핑크색 쓰레기!"

[ㅜㅜ]

나는 그제서야 사건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각국의 체제 전복을 노리는 카타스트로피와 궁극적으로 인류의 강제진화를 추구하는 우월이 손을 잡았고, 우월이 동맹의 원수인 가소희를 죽이기 위해 강력한 병기를 파견한 것이다.

어째서 둘이 손을 잡은 건지,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건진 모르지만 이건 꽤나 중대한 사안이다.

'가소희를 죽이려 했다는 건 가소희가 없어야 수월해지는 계획이 있다는 건데. 설마 단순 원한 때문은 아닐 테고. 혹시 이번 재앙 때를 노리는 건가?'

한국에서 박멸됐던 카타스트로피가 우월의 힘을 빌려 다시금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면 북부 전선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혼란을 노려 난장판을 피우는 놈들 특성상 영원한 순회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

[근데 뒤에 친구는 ㄴㄱ]

"그러고보니 저 외국인 처자에게서 엄청난 자연친화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진지하게 정령왕한테 납치 당할 수도 있는 수준이니라!"

"아, 제 반 친구예요. 병문안 같이 오겠다고 해서."

병풍처럼 빳빳이 굳어 있던 샬롯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직도 두 S급 앞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꽤 어색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극정 아카데미 1학년 Z반 샬롯 스털링입니다."

"흐음. 영국인인 것이냐?"

"미국에서 왔습니다."

샬롯의 말에 무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잉? 이상하도다. 미국에서 이렇게 자연친화력이 좋은 아이가 나올 수 있나?"

[ㄹㅇ]

가소희도 무녀와 함께 의문을 표했다.

대체 미국이 어떤 동네길래 저러는 거지.

"저 왜 그러시는 겁니까? 자연친화력이 높은 사람이 나올 수 없다니요?"

"흐음, 말해줘도 되는 건지"

무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망설이자, 가소희가 공책을 척 내밀었다.

그 속에 적힌 내용은 실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미국은 너 같은 애들은 실험체로 잡아가는데]

"실험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여러가지 조사해서 연구소로 잡아가는데 어케 여깄음?]

샬롯은 글귀를 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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