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추방과 망명은 한끗 차이 (1)
* * *
무녀는 알록달록한 무녀복의 자락을 힘차게 휘날리며 공원을 걸었다.
길바닥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옷인지라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본래 무녀란 직업 자체가 관심을 끌면서 살아가는 직업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지 그녀의 보무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라 나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걷기를 택했다.
"가슴 덩어리! 왜 똥 마려운 개처럼 멀찍이 떨어져 걷는 것이냐? 썩 이리 붙는 것이다!"
"후배가 어찌 선배와 발길을 나란히 하겠습니까. 그건 비례??입니다."
"네 녀석은 헌터고 본녀는 히어로니까 상관 없는 것이다!"
아유하와 일행이 아닌 척 딴청을 피우던 나는 무녀에게 옷깃을 붙잡혀 걸음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키는 161cm로 어디 가서 작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되지만 암만 그래도 무녀보다 조금은 더 큰지라 내가 조금 더 성숙해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말인 즉, 내가 무녀의 언니 같이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단 말이다.
"어머. 쟤네 좀 봐. 언니랑 동생이 나란히 보기 좋네."
"옷은 왜 저렇게 입고 있대? 무슨 행사 하나?"
"에이, 귀엽잖아. 그런데 친자매는 아닌가? 언니 쪽 발육이"
멀찍이서 나와 무녀의 가슴 크기를 비교한 커플이 즐겁게 웃으며 속닥거렸다.
거기다가 대고 "다 들려요!" 하고 외쳐서 눈치를 줄까 생각해봤지만 그것도 상당히 부끄러운 일인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다.
대신 무녀에게 약간의 불만을 담아 물었다.
"저기, 밖에서 이 옷 입고 막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알아봐도 상관 없느니라. 그 옛 시절의 공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기 위해 구주를 쏘아다녔는데 본녀는 이국의 길바닥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냐?"
"아 예."
감히 공자보다 자기가 낫다는 둥의 언사를 한 무녀는 방울을 짤락거리며 품에서 접는 부채를 꺼내들었다.
펼쳐진 부채는 놀랍게도 예의 질긴 종이가 아니라 반투명한 디스플레이로 되어 있어 실로 사이버펑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신식 핸드폰이에요?"
"뭐라? 현대 전자공학의 정수를 감히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많이 비싼 핸드폰이겠네요."
"핸드폰 아니니까 거기 가만히 서서 이쪽을 보는 것이다."
나는 무녀의 말대로 가만히 서서 부채를 빤히 바라봤다.
무녀의 손에서 한껏 펼쳐진 부채는 내 모습을 비추며 그 위에 무슨 숫자나 그래프 따위를 그리더니, 곧 여러가지 결과를 내놓았다.
[100% Humanity]
[Sex: Female]
[Mana Type: Spirit]
[Body Age: 18]
[Blood Type: Rh+ A]
[Identity Number: 320830 4200510]
[Result: All clear]
"이게 뭐예요? 제 주민번호는 왜 나오죠?"
"네 신체 정보와 국가 데이터베이스를 대조한 것이다. 딱히 위조된 흔적은 없다고 나오는구나."
"참 빅 브라더 같은 소리네요. 아니, 잠깐. 무녀님 일본인인데 어떻게 한국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돼 있어요?"
"네 스승이 권한을 준 것이다. 아, 능동적인 조회는 당연히 안 되고 일치 여부만 알 수 있으니까 걱정은 하지 말거라."
멋진 첨단도구로 인적의 위조 여부를 판단하다니, 진짜 사이버펑크가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제 인적사항은 왜요? 설마 간첩이라도 될까봐요?"
"솔직히 네 존재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천사나 악마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이 무려 세 개, 정령왕이 공들여 만든 아티팩트가 한 개, 돌아버린 악마 대장장이가 만든 장비가 세 개, 재앙의 바람을 담은 장비가 한 개, 그리고 시공 너머에서 쳐다보고 있는 악마가 한 놈.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나 같은 사람을 마주쳤으면 상당히 수상하게 여겼을 테니까.
세상에, 몸에 권능을 세 개나 품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결국 제가 의심스러워서 나와보라 하신 거예요?"
"그런 것도 없잖아 있느니라. 모든 요소를 네가 통제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혹시 몰랐으니까 말이다. 사실 그게 주된 용건은 아니고, 또 물어볼 게 좀 있느니라."
무녀는 근처 벤치에 털썩 앉고는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곁으로 가 앉았다.
"거기 악마!"
"?"
"너 말고. 거기 왼손에 감긴 녀석 말이다."
= 우잉? 나?
평상시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왼손에 감겨 있던 셀레스티는 무녀의 호명에 호다닥 어깨를 타고 올라 무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해봤자 나와 칠흑여제 밖에 없으니 자신을 알아본 외부 인사에게 관심이 가는 거야 당연했다.
"그래, 프라임워커의 아이야. 설마 그 미치광이 대장장이한테 딸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 뭐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우리 아빠한테 돌아버렸다느니, 미치광이라느니 하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쇠질 좀 좋아하기로서니 미친놈이라니!
"훗햣햣! 진짜 미친놈인 걸 어쩌겠느냐. 세상에 마검을 만들었다길래 봤는데 플루토늄으로 도금을 해놓은 경우라니. 그걸 쓰던 놈은 좋다고 쓰다가 피폭당해서 죽어버렸지, 아마?"
= 엣흠! 아무튼 사용자에게 파멸을 불러왔으니 마검이 맞긴 하죠 그래도 요즘은 멀쩡한 거 잘만 만들던데요!
셀레스티는 뭐든지 미숙할 때가 있는 법이라면서 천을 움직여 내 검집을 들어보였다.
천린과 송곳니 학살자는 모두 A급 장비지만, 둘의 시너지는 웬만한 S급 장비 부럽지 않다.
무녀는 셀레스티에게서 검집을 빼가더니 천린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유려한 장식을 훑고 지나가자, 그 중심에서 시원한 돌개바람이 퍼져나왔다.
장식은 하늘빛으로 백열하고 있었다.
"내가 준 게 여기 있었구나. 풍신을 죽이는데는 정말 애먹었었지"
"그 재료를 준 게 무녀님이었나요?"
"물론이니라. 핵을 조금 떼서 놈한테 싸게 팔았지. 그걸로 뭘 만들까 궁금했는데 이딴 칼날가속장치나 만들다니 상상도 못했구나. 훗햣햣!"
무녀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장식을 훑었다.
새어나오던 돌개바람이 멎었다.
"예나 지금이나 재밌는 것만 만드는 녀석이로구나. 자기 딸을 가둔 망토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 이건 제가 해달라고 한거거든요? 우리 아빠 음해하지 마세요!
"흐음, 부녀가 쌍으로 미쳤구나. 아무튼 카우디 녀석이랑 연락이 되는 것이냐?"
= 찾아가면 되기야 되겠죠? 근데 왜요?
"만들 게 조금 있느니라. 긴 항해가 될 것 같아서 말이지."
긴 항해?
"태평양 횡단선 말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니라. 지정된 항로가 아니라 그 어떤 위험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전함이 필요한 것이다. 심해의 재앙이 떼거지로 몰려와도 견딜 수 있는 그런 배가!"
= 해적왕 되시게요?
"왠지 나만 진지한 것 같구나. 아무튼 너희가 가서 운을 떼보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부탁은 나라고 해도 잘 안 들어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냥 말하면 안 들어줄 것 같으니까 딸이 좀 가서 말해보라는 거다.
셀레스티는 짐짓 근엄하게 천 귀퉁이로 허리(천의 중간 부분)를 짚으며 말했다.
= 뭐 해 주실 거예요?
"글쎄, 세계제일 주술사의 점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냐?"
= 무당은 주술사가 아니라고 우리 영웅님이 그랬는데요?
"내, 내가 언제 그랬어."
"본녀는 무당과 주술사의 방식을 모두 쓰니까 상관 없는 것이다. 여기 사는 자칭 무신?? 놈하고는 다르게 말이다."
무녀는 상관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내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첨단기술 부채를 펼쳐 제 눈앞에 갖다 댔다.
돋보기로 곤충을 관찰하는 어린 파브르 같이 말이다.
"흐음, 투시 모드로 보니 더 크구나."
"뭐, 뭐라고요!?? 하지 마세요!!"
나는 무녀의 미친 행동에 기함해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에잇. 농담이니라, 농담. 그렇게 과민반응하면 내가 더 부끄러운 것이다. 뭐가 좋아서 친구 제자의 알가슴을 관찰하겠느냐?"
"그, 그런 농담 함부로 하지 마세요!"
= 맞아요! 영웅님 가슴은 위기에 처한 세상을 품는데 사용해야 한다고요!
"훗햣햣! 확실히 세상을 품을 만큼 크기는 하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지금 어둠이랑 환상을 보고 있느니라. 그 무서운 칠흑여제가 파편으로나마 살아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인 것이다. 어이, 깜둥이!!"
진짜로 칠흑여제를 보고 있는 것인지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무녀.
3D 안경을 끼고 입체적 환상을 만지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이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남의 모습을 관음하지 마세요, 무녀.
"후후! 처녀 귀신도 안 할 소리를 하는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게 관음이 되는 것이냐? 그럼 나는 하루에 대체 얼마의 벌금을 내야 한단 말이냐?"
놀랍게도 무녀는 나 밖에 들을 수 없을 터인 칠흑여제의 목소리를 들었다.
단번에 나와 연결된 미래의 셀레스티를 알아챈 것부터가 비범하긴 했지만 내게만 목소리를 들려주던 칠흑여제와 대화를 성사한 것 자체가 내게는 더 와닿는 일이다.
괜히 세계 최고의 주술사가 아닌 것이다.
부채를 눈에서 뗀 무녀가 내 다리에서 슬쩍 부적을 빼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작성했다.
문자의 힘을 이끌기 위해 해서로 적는 나와 다르게 딱딱한 전서와 날렵한 초서를 마구 뒤섞어 작성한 모습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부적을 몇 번씩 겹쳐 만든 느낌이라고 할까.
전문가의 솜씨가 묻어나오는 부적이었다.
"꼬맹이. 칠흑여제를 소환해보는 것이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 테니!"
"그게 뭔데요?"
"뭐긴 뭐겠느냐, 영구 인챈트지. 카우디에게 말 좀 잘해달라고 주는 선물이니라."
나는 영구 인챈트라는 말에 꽤 놀랐다.
아무리 세계제일의 주술사라고 해도 유지할 수 있는 영구 인챈트의 개수는 세네 개가 전부일 텐데 그 중 하나를 내게 할애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 자, 잠깐! 카우디의 딸은 전데요! 저 속 시커먼 질투쟁이 악녀 말고 저한테 해주세요!!
"응? 넌 결국 꼬맹이한테 붙은 떨이가 아니냐? 그리고 너는 내가 인챈트한다고 해서 극적인 강화는 이룩하기 힘들 것이니라. 기껏해야 망토가 따뜻해지거나 그 정도겠지."
= 이, 이럴 수가
내 머리 위에 올라타 항의하던 셀레스티는 무녀의 선고에 실망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나는 이마를 타고 내려와 시야를 가리는 망토를 손에 감아매고는 칠흑갑주를 소환했다.
"여제님. 괜찮죠? 뭔가 해가 되지는 않겠어요?"
괜찮아요. 인챈트란 게 사람으로 치면 알몸에서 옷을 조금 갖추는 정도니까요.
"그 말대로니라. 자, 앞으로 내 사질??을 잘 지켜주는 것이다!"
무녀가 갑주에 부적을 붙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