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84화 (84/119)

〈 84화 〉 추방과 망명은 한끗 차이 (2)

* * *

아유하가 병실로 돌아왔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손을 죽죽 늘이고 있던 가소희가 그녀를 발견하고 펜을 들어 반겼다.

[ㅎㅇ]

"반가우면 고개만 까딱이는 것이다. 불편하게 그러지 말고."

까딱까딱.

가소희는 싱글생글 웃으며 신나는 리듬을 타듯 고개를 까딱였다.

무녀와는 다른 천진함을 간직한 무검희였다.

"헛짓거리 말고 내 말이나 들어보는 것이다! 아주 중대한 사안이니!"

[네가 흔들라며]

"그런 게 중요한 에휴. 네 제자를 살펴본 결과 말이다."

연신 고개를 까딱이던 가소희가 행동을 멈췄다.

반 쯤 넋 놓은 채 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말해주셈]

"알아보니까, 너랑 동류가 맞는 것이다."

[ㄹㅇ?]

"나타나는 형태는 살짝 다르지만 확실히 파장을 파악했으니 맞을 것이니라. 세상에 너 같은 녀석이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와우]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였지만 그 글을 쓴 가소희는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그러나 그 누구도 규명해주지 못하던 선천적인 능력.

불가해한 현상에 있어선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무녀만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던 가소희의 '창'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었다니.

'그게 또 우리 시현이라는 게 말이지 역시 내 제자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렇고 말고.'

가소희는 원인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또 다시 까딱거렸다.

꽤 기분이 좋아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던 무녀는 아미를 찌푸리며 가소희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또 뭐가 그리 기분 좋은 것이냐? 정신 사나우니까 몸은 바로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사실은 밝힐 것이냐?"

[ㄴㄴㄴㄴ]

"어째서?"

[나중에 필요하면 알려주지 뭐. 이게 뭔지 감도 못 잡았는데 성급할 이유가 있나?]

"몇 년만에 진척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인데 한 번 물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나도 이게 뭔지 궁금하긴 한데 요즘은 좀 바쁠 때니까 전쟁 끝나고 하려고]

가소희는 그리 적어내곤 공책을 바닥에 툭 떨궜다.

손에 가슴 큰 제자가 두고 간 선물 보따리를 든 가소희가 허공에 손을 뻗어 그녀만의 '창'을 띄웠다.

­­­

[용량]

­ 714.28kg / 1000kg (둔화 없음)

[보관 목록]

­ 영광스런 만드라고라 김치 (66.71kg)

­ 월왕구천 (10.00kg)

­ 광속의 대악마, 실비아의 수급 (18.25kg)

­ 엘퀴네스의 눈물 (341.86kg)

­­­

태어났을 때부터 보이던 가소희만의 특별한 무언가.

무슨 물건이든 간에 그녀의 두루마기 소매 속에 간편히 보관할 수 있게 해주는 이능.

게임 속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인터페이스와 메커니즘.

다름 아닌 인벤토리였다.

***

= 오, 그거 되게 있어 보이네요. 저걸 뭐라고 하더라? 그냥 투구?

"보통은 아멧이라고 하지, 아마?"

무녀가 떠난 뒤, 나는 칠흑갑주를 소환해 인챈트의 성능을 알아봤다.

놀랍게도 상체만을 덮어주던 칠흑갑주는 무녀의 인챈트가 붙은 뒤 머리까지 보호할 수 있게 되었는데, 헬멧을 써도 딱히 앞이 안 보인다거나 답답한 요소는 전혀 없었다.

뛰어난 방호력을 제공하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걸쳐지는 칠흑갑주의 특성대로였다.

검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중세시대 기사의 아멧을 착용한 내 머리를 콩콩 두들기던 셀레스티는 천 끝으로 바이저를 올리며 꿍얼댔다.

= 영웅은 헬멧 따윈 안 쓰는 법인데

"영웅도 헤드샷 맞으면 죽어."

= 그치만 영웅담에 보면 머리를 노리는 적은 딱히 없던데요?

"그거야 주인공한테 불리한 걸 그리기 싫으니까 그런 거지. 이른바 플롯 아머라는 거야."

나는 갑주를 역소환하고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가소희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지만, 가소희가 불의의 습격으로 입원(솔직히 왜 한 건진 모르겠다만)을 하면서 사흘이나 기다리게 생겼으니 그동안 시간이나 죽여볼 참이었다.

물론 시간만 죽일 건 아니었고 해야 할 일도 하나 있었지만 말이다.

"수원을 또 가야 된다니"

= 오랜만에 우리 아빠를 보겠네요!! 아카데미 지하에 봉인당했던 제가 영웅님 몸에 딱 붙어 움직이는 걸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글쎄. 그런데 하나 확실한 건 내가 여자여서 다행이라는 거지"

웬 남정네가 빨간색 보자기가 된 딸이랑 딱 붙어 비비적대는 꼴을 보면 아마 죽이고 싶지 않을까.

카우디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다.

"그러고 보니 네가 망토 속에 봉인되겠다는 걸 순순히 들어주든?"

= 아뇨? 당연히 극구 반대하셨죠! 그날은 진짜 머리가 뽀살나도록 싸웠는데. 헤헤.

"결국 이겼나보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딸의 영혼을 자신이 만든 망토 속에 봉인해 건물 지하에 숨겨 놓는다는 건 실로 쉽지 않은 일일 게 뻔했다.

자기 자식을 용광로에 녹여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만들었다는 설화는 많이 보이지만, 카우디가 그 정도로 돌아버린 대장장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차원을 적으로 돌려서라도 딸을 지킬 위인이었다.

"넌 아버지한테 잘 해라."

= 넹? 그런 건 좀 낯간지러워서. 히히.

나는 셀레스티의 수줍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다음날을 준비했다.

***

다음날.

무녀의 부탁에 따라 카우디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수원으로 내려갔다.

대장간 도시로 변모한 수원은 재앙의 도래를 대비한 국가의 대대적인 하청이 있었는지 지난번보다 훨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말인 즉, 수원에 빽빽하게 들어찬 대장간의 열기 때문에 오지게 덥다는 소리다.

"더워 수원은 분명히 물 수?에 언덕 원? 자 아니었어? 물 수가 아니라 불 화火를 써야 되는 거 아냐?"

= 아빠가 그랬는데 물은 산소랑 수소로 이뤄져 있어서 불을 더 돋굴 수 있다 그랬어요!

"이름에는 힘이 있다더니 그런 쪽으로 힘이 있는 거였나 쓸데 없이 화학적이야."

수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달군 철의 울음.

튼튼한 나뭇가지에 각종 금속과 갑각을 덧댄 활은 갓 태어나자마자 벽에서 송진을 흘릴 참도 없이 바로 트럭 짐 칸 위로 내던져지고, 담금질을 잘못하여 아무렇게나 구부러진 롱소드는 구불구불한 몸에서 증기를 한껏 내뿜으며 노란 상자 안으로 쨍강 굴러들어간다.

영원한 순회는 아직 저 멀리 압록강도 넘지 못했건만, 이들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나는 잠시 어린 사내아이가 열심히 화살촉을 화살대에 조립하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카우디의 대장간은 수원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외곽 폐차장에 존재했다.

"뭐야, 이거?"

버스를 타고 대장간에 당도한 나는 정문 앞에 널부러진 것을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우락부락한 등근육을 한껏 노출하고 앞으로 엎어져 꼼짝도 안 하는 남성.

카우디의 제자였다.

"뭐야, 죽은 건가? 아닌데. 저기요?"

= 반응이 없다. 평범한 시체인 것 같

"우오오아아아아앗!!!!!!"

셀레스티의 말을 끊고 괴물같은 음성을 내지르며 가슴 근육을 튕겨 벌떡 일어선 사내.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으와아아악!!!"

"음, 오랜만이군!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아하, 재회의 함성이군!!"

"까, 깜짝이야!! 왜 앞에만 피칠갑을 하고 있어요!!"

거한의 몸은 깊고 흉악하게 찢긴 상처가 가득했다.

근육이 드러난 것부터 아예 갈비뼈 너머가 드러난 상처까지 아주 낭자한 게 살아 움직이는 게 용할 정도였다.

등 쪽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 등에 생긴 상처는 남자에게 있어서 치욕 그 자체지. 내 등은 상처가 없음을 만천하에 내보이기 위해 앞으로 쓰러져 있었을 뿐!"

"아니, 왜 그렇게 다치셨어요?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라든지, 그런 거예요?"

"난 스승님의 명령으로 입구를 경계하고 있었다네. 안에서는 스승님을 노린 악마와의 피튀기는 혈투가 일어나고 있지."

= 뭐, 뭐요!? 그걸 왜 지금 알려줘요!!! 빨리 가요!!! 네!??

실로 경악할 만한 소식에 셀레스티가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다시금 앞으로 쓰러지며 내게 부탁했다.

"카우디 대장간의 인정을 받은 그대라면 스승께 큰 힘이 될 수 있겠지! 난 이런 몸이라서 싸우지 못하지만 으음 힘이 되어주게."

풀썩.

힘이 다한 건지, 아니면 다시 사주경계 모드로 전환한 건지 다시금 쓰러져 미동조차 앉는 사내를 지나쳐 폐차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옅게 펼쳐져 있던 장막을 지나치자, 사내의 말대로 유혈이 낭자한 대장간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이요오오오오!!!!!"

까앙!!!

"끄으아아악!!!"

장막 너머에서 처음 마주친 것은 근육질의 거한이 핏기 없는 뱀파이어를 날려버리는 광경이었다.

공사판에서 뽀려온 것 같이 생긴 쇠파이프를 풀스윙으로 휘둘러 미남의 골통을 부순 카우디의 제자는 이쪽을 알아채고 손을 흔들었다.

"오오!! 칼이랑 칼집 가져간 친구잖아!! 5번은 아직 살아 있나??"

"아, 네! 그런 것 같아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잊을만 하면 벌어지는 일이지! 씹놈들, 남의 것을 뺏으려는 생각만 가득해선 쿠억!"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거한에게 반격을 가한 뱀파이어는 이쪽을 보며 다 찢어진 정장을 툭툭 털었다.

"켈록, 넌 또 뭐하는 년이냐?"

"뱀파이어 헌터."

"뭐?"

갑작스런 물음에 아무렇게나 답한 나는 부적을 꺼내 악마에게 흔들어 보였다.

뱀파이어는 부적을 보더니 반사적으로 폴짝 뛰어 10m는 족히 떨어졌다.

"뭐, 뭐냐!!! 뱀파이어 헌터가 여기에 어째서!!!"

"──, ────, ───~"

"끄아아아악!!! 자, 잠깐만!!!"

뱀파이어는 여러면에서 뛰어난 종족이지만 그 약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피부가 창백한, 그러니까 피가 없는 언데드 상태에선 구마 의식에 너무도 취약하다는 것.

설사 뱀파이어 퀸이 오더라도 피가 없으면 나한테 줫발린다.

"우와와와와와와왓!!!!!!"

까아앙─!!!

고통스러워하는 뱀파이어의 머리 위로 추상같이 떨어진 쇠파이프.

장송곡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뱀파이어의 시체는 차마 몸을 수복하지 못하고 재로 변해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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