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추방과 망명은 한끗 차이 (3)
* * *
= 뱀파이어? 잠깐! 저 옷가지 좀 들춰봐요!
가루가 되어버린 뱀파이어가 남긴 것은 다 해지고 낡아빠진 정장 한 벌 뿐.
셀레스티의 말대로 가루 묻은 거적을 들춰보니, 그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가문의 표식이었다.
= 뱀 두 마리에 사과 하나 이건 기르키스의 표식이에요!
기르키스는 프라임워커와 인접한 서쪽 로엠의 가문이다.
이전에 마주친 대악마 오팔의 출신 가문이기도 한 기르키스 가문은 프라임워커와 비슷하게 데모나스가 주축이 되어 세운 가문으로, 역사적으로 프라임워커와의 관계는 무척이나 나빴다.
"기르키스 짓은 아닐 것 같은데. 누가 암살자한테 자기네 가문 표식을 쥐여 주겠어?"
= 그, 그런가요? 그럼 어떤 녀석이 이런 짓을 한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아마 카우디가 알지 않을까."
나는 기르키스의 표식을 주머니에 잘 갈무리했다.
십이가문의 표식은 여러모로 쓸 곳이 많다.
"오! 대단한 노래였소! 말 그대로 영혼을 울리는구만!"
"아, 네. 원래 그런 주술이죠. 카우디 님은요?"
"스승께선 저어기, 더 깊은 곳에서 싸우고 계시다네. 다른 제자들도 다 거기 있겠지! 혹시 그쪽으로 갈 참인가?"
"네. 아저씨도 가시겠어요?"
"아니. 5번이 쓰러졌으니 입구를 지킬 사람은 나 밖에 없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시게나. 아, 위를 조심하고!"
위를 조심하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그곳엔 등허리에 박쥐 날개를 단 아름다운 악마 하나가 이쪽으로 매혹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서큐버스다.
"쇳물로 단련된 우리에겐 성적인 현혹따위 듣지 않지만 자네는 어떨지 모르지! 부디 조심하게나!"
카우디의 제자는 그 말을 남기고 입구 방향으로 쿵쿵 달려갔다.
입구에 엎어져 있던 5번의 자리를 대신하러 가는 거겠지.
"아하하! 예쁜 여자애다~!"
근육질의 사내가 떠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서큐버스 하나가 날개를 팔락이며 다가왔다.
무언가 매혹의 권능 비슷한 걸 날리는 듯 했으나, 나는 무시하고 곧장 달려나갔다.
"어, 어? 야!! 거기 안 서!?"
서큐버스라면 흔히 갖고 있는 매혹의 권능은 정신에 간섭하는 류의 권능이다.
내 정신에는 서큐버스 퀸의 딸인 칠흑여제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으므로 그런 잡스러운 권능이 통할 리가 없었다.
서큐버스는 내가 무시하고 달려나가자 당황한 티를 내며 날 쫓았다.
나는 품에서 은제 암기를 날려 서큐버스의 날개 한 쪽을 꿰뚫었다.
"아얏! 너어!!"
낮게 활공하다가 땅을 긁으며 추락한 서큐버스.
인간보다 한참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하급따리 서큐버스인지라 더 이상 쫓을 생각은 않는 듯했다.
방심한 척하고 죽여버려도 됐을 텐데요. 역겨운 음마 년이
= 너 그거 동족 살해 아냐?
전 서큐버스가 아니라 인간이에요.
= 흥! 그렇게 치면 나도 마기 버렸으니까 인간이겠네? 나 이제 뿔도 없어!
"별 시답잖은 걸로 싸우지 마"
나는 마침내 폐차장의 중심지에 다다랐다.
폐차장의 중심지래 봤자 별 건 없었고, 폐차를 수십 개씩 쌓아 만든 미로 비슷한 성벽이 있는 게 전부였다.
= 저 안이에요! 저 안에서 싸우고 계신 거예요!
"잠깐, 이 미로는 어떻게 통과해?"
= 날죠!
"응?"
셀레스티는 천을 움직여 폐차의 벽을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겼다.
그러자, 발 밑에서 무언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한 순간에 20m 상당을 날아 오른 것이다.
"우아아아아아아!!! 뭐야 이게!!!"
= 스프링 함정이요!
"그게 왜 여기 있어어어!!!"
무슨 마을 지키기 게임에나 나올 법한 함정에 당해 하늘로 날아오른 내 몸은 폐차의 미로를 넘어 대장간 마당 쪽으로 떨어졌다.
헌데, 내가 착지할 곳에 웬 뱀파이어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하! 프라임워커도 이제 끝이군. 더 큰 일이 나기 전에 네놈의 인장을"
"으아아아아!!!"
나는 반사적으로 놈의 정수리에 발도술을 시전했다.
키이이이잉─!!
은색 섬광이 길게 울며 놈의 정수리에 짓쳐 내려간다.
"넘기 게헉!"
일도양단一???.
인장을 넘기라며 협박을 하던 흡혈귀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 영웅 등장!!
"까, 깜짝이야 영웅 등장은 개뿔이"
"따아아아아알!!!!!!!!!!!"
셀레스티의 말에 불평하려던 그 순간, 뒤에서 무언가 강력한 것이 날아왔다.
설악에서 봤던 장갑새를 능가하는 존재감.
나는 속수무책으로 카우디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낚아채였다.
"하하!!!! 내 딸!!!! 오랜만이구나!!!!"
"자, 잠깐, 내 팔!"
= 아이, 아빠! 영웅님 팔 부러져!
"그딴 거 알까보냐!!!! 이게 대체 몇 년만이냐!!!! 아이고, 내 새끼!!!! 홀쭉이가 다 됐구나!!!!"
거인 대장장이 카우디는 내 왼팔을 껴안고 망토에 얼굴을 부볐다.
그의 신장이 4m에 달하는 거구인지라, 나는 졸지에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단진자 운동을 하는 형국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 응? 그런데 아빠 다쳤어?
"뭐? 다쳐? 내가?? 무슨 소리!!!! 나처럼 멀쩡한 악마가 또 있으려고!!!!"
= 아냐, 다쳤잖아! 놔 봐!
"크,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셀레스티의 성화에 슬며시 내 팔을 놓은 카우디.
나는 공중에서 볼품 없이 툭 떨어졌다.
= 거기 다리랑 가슴팍에! 엄청 다쳤잖아! 이런 약한 녀석한테 다친 거야!?
"아니!!! 멀쩡하다니까 그러네!!! 내 딸!!! 이 아버지를 뭘로 보는 거냐!!!"
자랑스레 가슴을 탕탕 쳐보인 카우디는 이내 눈썹을 찡그리곤 급히 등을 돌려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가슴을 심하게 다쳤는데 또 가슴을 탕탕 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아빠!
"쿨럭, 으 내 딸아. 여기엔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더구나"
= 아니! 아빠가 죽긴 왜 죽어 아직 189살 밖에 안 됐잖아! 데모나스 평균 수명이 몇 년인데!
"거 우리는 마기가 없는데 데모나스라고 보기에도 뭣하지 않냐. 그리고 나 아직 188살이다."
= 하, 한국 나이로 세서 그래 아무튼 왜 무리를 하고 그래!!
셀레스티가 숫제 울먹이며 내 팔 위를 방방 뛰었다.
카우디는 망토가 되어 버린 딸이 안쓰러운지 침통한 표정을 짓고 돌아섰다.
"크흠, 흠. 얘들아아아!!!! 다들 살아 있느냐아아!!!!"
""살아 있습니다!!!""
"오늘은 돌아가서 쉬어라!!!! 피를 보고나서 망치를 잡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예!!!""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제자들은 각자 무기와 쓰러진 동료를 챙겨 미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크고 투박한 대장간 앞마당에 남은 것은 오직 싸움의 흔적 뿐이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따라오거라."
카우디는 힘있게 걸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부상을 감추려는 노력이었지만, 절룩이는 게 다 보였다.
= 깜둥아.
저요?
= 그래, 너.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구 데모나스는 마기를 버리면 오래 못 살아?
칠흑여제는 잠시 비음을 흘리다가 답했다.
글쎄요. 전 당신이 말한대로 서큐버스 혼혈이기도 하고 마기를 버린 적도 없어서요. 하나 확실한 건, 전 마기를 버렸으면 죽었을 거예요.
= 왜?
새로운 마기를 만들지 못한다는 건 사람으로 치면 피가 새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당신은 젊은데다 육체도 없어서 잘 모르시겠지만요.
셀레스티는 불안하게 내 팔을 꼭 붙들어 안았다.
땅에 내리 엎어져 있던 나는 일어서서 칼을 갈무리하고 카우디를 쫓아 대장간 안에 들어섰다.
서른두 평 남짓한 대장간의 실내는 생각보다 꽤 탁 트인 느낌이었는데, 카우디의 키가 높은지라 자연히 천장 또한 그만큼 높아진 까닭이었다.
벽에는 온갖 진귀하고 멋진 무구가 빼곡히 걸려 있었고, 방의 중앙에는 섬세한 세공을 위한 탁자와 관련 물품이 있었다.
벽 한구석에는 말끔히 청소된 원통형 기계장치도 하나 있었다.
카우디는 세공작업대 앞에 털썩 앉았다.
나는 그를 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헬리시움 주괴 위에 올라 앉았다.
거인 대장장이 기준으로도 큰 주괴인지라 위에 앉으니 땅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흐음 그래. 인사가 늦었군. 자네가 내 딸의 영웅인가."
"앗, 네. 근데 이전에 뵀을 때랑 분위기가 좀 다르시네요."
"늘 호탕하게 웃으며 살아갈 수는 없지."
수심어린 표정을 짓고 작업대를 툭툭거리는 카우디.
셀레스티는 천을 소심하게 마주치며 그를 올려다 봤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결심한 듯한 태도로 천 끝을 뻗었다.
= 그거, 오늘 생긴 상처 아니죠.
"그래. 좀 됐다."
= 보여주세요.
"안 돼."
= 잘렸구나.
셀레스티는 다 보인다는 듯이 천 끝으로 직선을 그렸다.
그 궤적은 카우디의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가슴까지 이어져 있었다.
심장을 지나는 선이다.
= 맞죠?
"."
=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카우디의 상체를 몇 바퀴 둘러 감은 붉은 붕대.
저것이 재생력을 잃은 카우디의 몸을 붙여 놓고 있었다.
"흐, 내 딸이 맞긴 하구나. 공포의 빨간 망토다워."
= .
"보통 이런 말을 하면 언제적 칭호냐면서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긴 하구나. 너나 나나."
카우디의 시선이 벽 한구석에 닿는다.
셀레스티의 원래 몸이 보관된 장소임에 틀림 없다.
= 그래서 왜 다치셨는데요. 네? 대악마도 두들겨서 땅에 꽂아 버리시던 분이.
"큭큭. 그건 과장된 얘기라니까"
원통형 기계장치에서 시선을 뗀 카우디는 망토가 된 딸을 바로 마주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섞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이런 습격은 많이 있었다. 한국 정부에 걸리면 곤란할 테니 애매한 중위 악마를 고용해서 무작정 때려 박는 거지. 뭐, 죽은 제자 놈도 없고 내 선에서 다 정리되긴 했지만 말이다."
= .
"가문의 인장을 가져간 이상은 이런 일이 있을 걸 알고 있었지. 그래서 악마에게 예민한 한국에 자리를 잡은 거다. 그건 옵시디언, 그러니까 칠흑여제라는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그 친구는 마기를 버리지 못해 결국 사냥 당했지만 우리는 어둠을 등졌지 않느냐."
어둠을 등졌다는 것은 곧 마기와의 영원한 결별을 의미한다.
"그렇게 그럭저럭 지내던 어느날이었어. 한국 칠성 하나가 무언가를 만들어 달라면서 찾아 왔지."
= 한국 칠성? 누군데요?
"성자 박하민. 아가페의 수장 말이다."
나는 그 말에 두 눈에 이채를 띄웠다.
박하민.
성자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악마계약자 때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