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추방과 망명은 한끗 차이 (4)
* * *
차원충돌이 일어난 뒤, 각 차원은 제각기 혼란에 휩싸였다.
다페르헤이드는 기존에 없던 생명체와 힘이 등장하며 대혼란기를 겪어야 했고, 아인델로제 또한 지구의 식물과 질병이 넘어오면서 하위 천사의 절멸을 당해야만 했다.
로엠은 이러한 혼란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축이었다.
때문에 클리포트 의회는 이 틈을 타 아인델로제나 다페르헤이드를 침노하는 결의안을 내세웠는데, 이 안건은 십이가문의 가부 회의에서 진통을 겪게 된다.
남쪽 로엠의 세 가문과 서쪽 로엠의 유력 가문인 프라임워커의 반대에 의해서였다.
어쨌건 나머지 여덟 가문이 지지했으므로 악마의 다페르헤이드를 향한 침략 전쟁은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다페르헤이드의 재앙과 인류의 처절한 저항에 의해 소정의 성과만을 얻고 실패한다.
당연히 전쟁을 반대했던 네 가문은 로엠에서 더 큰 지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프라임워커에겐 악재가 되었다.
서쪽 로엠의 작은 맹주 노릇을 하던 프라임워커는 이 일로 인해 너무 많은 적을 만들고 말았다.
다페르헤이드에서 패주한 여덟 가문은 벌어진 차이를 메꾸기 위해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남쪽 로엠 대신 프라임워커에게 각종 정치적 공세를 가했으며, 서쪽 로엠의 다른 두 가문인 기르키스와 저거노트는 프라임워커가 가진 이권을 나눠 먹기로 하고 양쪽에서 영지전을 일으켰다.
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해 로엠의 패배를 부른 배신자 가문을 축출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그냥 이권 다툼이었다.
긴 압박과 전쟁 끝에 프라임워커는 모든 영지를 빼앗기고 패배했다.
카우디와 셀레스티는 항거의 뜻으로 가문의 인장을 가지고 다페르헤이드로 망명했으며, 이렇게 십이가문의 한 자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석으로 남았다.
클리포트 의회는 프라임워커 가문을 영원히 추방한 것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인장이 여기 있으니."
십이가문의 인장은 단순한 가문의 상징이 아니다.
위대한 열 명의 대악마가 앉아 있는 클리포트 의회의 결의안을 부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인 십이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물건이었으니.
단 한 가문이라도 십이가문 회의에 불참하면 의회의 결의안을 부결할 수 없게 되므로, 십이가문 회의는 카우디에 의해 사실상 정지된 것이나 다름 없다.
= 십이가문이 인장을 되찾으려고 이 놈들을 보낸 걸까요.
"그런 이유도 있을 거다. 너무 강한 놈을 보내면 인간에게 걸리니까 애매한 수준의 자객만 보내온 거지."
십이가문은 그렇게 카우디를 살살 찔러보다가 S급 헌터이자 악마계약자인 박하민을 움직여 카우디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크게 약화된 카우디는 쉽게 무찌르던 암살자에게도 고전하는 지경에 다다랐으며, 그렇게 가문의 인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나는 가만히 카우디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물었다.
"그 미친 사이비 놈이 뭐라고 하던가요?"
"오래오래 살라고 해주더군. 픽 죽으면 그것대로 곤란하다면서."
= 뭐요!? 남의 아버지를 반으로 가르고 뭐가 어째!?
셀레스티가 박하민의 덕담을 듣고 분통을 터트렸다.
카우디는 상체의 붕대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설마 성자가 악마숭배자였다니."
"사이비가 대악마와도 계약을 했나보죠?"
"감이 좋군, 작은 영웅."
악마숭배자란 여러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박하민이 십이가문 쪽의 사주를 받아 카우디를 공격하긴 했지만, 십이가문이 인장을 되찾는 걸 꺼린 클리포트의 대악마가 그것에 불만을 표한 것으로 보인다.
클리포트의 입장에선 십이가문이 무력화된 지금의 형국이 유리한 까닭이다.
프라임워커에게 '추살'이 아니라 '추방'을 내린 이유이기도 하다.
셀레스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어깨 위에 벌떡 섰다.
= 어쨌든! 아빠 상처는 안 낫는 거예요? 왜 안 고치고 있어요!!
"신성력을 담은 참살의 권능에 당했다. 내 뿔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에야 못 고쳐."
= 참살? 그건 저거노트의 가주가 가진 권능이잖아요! 정말, 불쌍해서 어떡해
참살의 권능에 당한 상처는 잘 낫지 않기로 유명하다.
거기에 악마에게 치명적인 신성력까지 담겼으니 그 효과는 배가되었고.
그에 더해 카우디는 마기를 잃고 자체적인 회복력을 소실했으니 일반적인 방법으론 고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 고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요."
하지만 신비와 주술의 영역으로 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 저, 정말!?? 정말정말정말로요!??
"아니, 방법은 두 개가 있긴 한데. 하나는 그냥 파이널 엘릭서를 마시면 되는 거고."
= 뭐예요, 그게. 지금 놀리는 거예요!? 지금 파이널 엘릭서를 어떻게!
"다른 하나는 지뢰복?雪?을 써도 되는 거고."
= !
파이널 엘릭서는 죽은 자도 살려낸다고 전해지는 지고의 회복약.
그 원리는 주술을 이용한 치료와 크게 다를 것 없다.
카우디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의심스런 눈길로 나를 내려다봤다.
"지뢰복? 주술 이름이냐? 나라고 무당을 안 찾아간 건 아니다만."
"주술사는 그딴 사이비하고 결이 다르죠. 그쪽은 기원, 이쪽은 확신."
우혜나의 영혼을 복구하기 위해 수련했던 육십사괘, 지뢰복?雪?.
곤?을 외괘에, 진?을 내괘에 둔 그 형세는 땅을 울리는 부활의 뇌성과 같으니.
고작 권능과 신성력 따위로 입은 상처를 못 고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저만 믿으세요."
나는 카우디의 짙은 의심 속에서 부적을 뽑아들었다.
***
"아, 음, 아아. 예아!"
가소희는 신난 표정으로 병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빳빳이 굳어 그녀를 괴롭히던 혀가 다 나았기 때문!
그것도 무녀의 간병 덕분에 근 이틀만에 싹 나아버린 것이다!
그녀는 팔에 꽂혀 있던 링거를 홱 집어치우고 옷깃에서 1L짜리 페트병을 꺼내 검은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햐~ 이거지! 그런데 이게 뭐더라? 콜라인가?"
"그거 간장이니라."
"푸학!"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책을 보던 아유하에게 간장을 내뿜은 가소희.
졸지에 까만 성수로 세수를 한 무녀는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화를 냈다.
"야!!! 뭐하는 거야!!!"
"아이, 퉤! 진짜 간장이잖아? 감히 내 입을 더럽히다니 정줄이 나갔구나?"
급변상황에 컨셉을 깨버린 무녀는 울상을 지으며 정령수로 간장을 씻어냈다.
슬프게도, 그녀가 보던 책은 간장 범벅이 되어버려 살려낼 수 없었다.
"아, 정말. 내가 이래서 태소식 쓰는 걸 싫어해."
"이 이 나쁜!"
가소희는 슬며시 눈을 피하며 새로운 콜라를 하나 따서 들이켰다.
시원하게 잘 빠진 곡선을 가진 유리병 콜라였다.
"야!! 콜라 마시지 말고 내 책 돌려내는 것이다!!"
"엣흠. 이프리트 불러서 말려 달라 하면 되잖아."
"이건 그냥 물이 아니라 간장인 것이다!!! 네가 머금었다가 뱉은!!! 말린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이다!!!"
"간장은 가열하면 단맛이 나니까 괜찮을지도 몰라."
가소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단맛이 나는 수제 양갱을 건넸다.
분기탱천해서 씩씩대던 무녀는 양갱을 홱 낚아채선 오몰오몰 씹더니 얼굴을 느슨하게 누그러트렸다.
은근히 다루기 쉬운 여자다.
"얌 다시 생각해보니 책은 다시 사면 되는 것이다."
"내 참."
"뭘 탄식하는 것이냐? 네 손맛이 날 이렇게 만들지 않았느냐?"
그렇게 탓하며 양갱을 갉작거리는 진녹색 머리 무녀.
양갱은 뭔가 구식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소희의 양갱만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그녀였다.
띠리리
"뭐야. 전화왔네."
"난 눈치 보지 말고 받는 것이다!"
"내 전환데 왜 네가 허락을 하냐? 흠흠."
헛기침을 한 가소희는 나름대로 성숙한 목소리(주관적임)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앗, 스승님? 스승님 혀 나았어요?
"응. 다 나았거든. 무슨 일이야?"
그게, 그냥 문안 인사도 할 겸 부탁도 좀 있어서
"부탁? 우리 예쁜 제자가 할 부탁이 뭐가 있을까? 사람이라도 하나 슥삭?"
농담 아니거든요
전화 너머에서 우물대던 정시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만드라고라 김치 말인데요
가소희는 부탁이 끝나기도 전에 즉답했다.
"싫어!"
아, 알았어요. 그런데 조금 필요한 곳이 있단 말이에요.
"PTSD로 미각을 잃은 불쌍한 사람?"
아뇨, 반으로 갈라진 악마 대장장이요.
"악마 대장장이? 아, 걔 엥? 걔한테 김치가 왜 필요해?"
정시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원기가 없어서 쓰러졌어요.
***
= 자, 잘 할 수 있다면서 으아앙
"죽은 거 아니니까 좀 울지 마"
= 흐아앙 아빠, 아빠아
빨간 망토는 비통하게 곡을 하며 근육질 거인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정시현의 치유로 갈라진 몸을 이어붙인 카우디는 송장이 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씨바, 뭔가 돌팔이가 된 기분인데'
지뢰복을 통한 치유는 몸이 원체 받쳐주어야 원활이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명력이 부족한 몸이라면 지금의 카우디처럼 픽 쓰러져 몸을 회복할 때까지 누워 있어야 하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지금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지만요.
"여제님까지 그러기에요?"
= 흐아아앙
문제는, 카우디는 마기가 없어서 몸을 쉽사리 회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데모나스라는 종족은 며칠 밤 새면 픽 쓰러지는 인간과 다르게 백 년을 쉬지 않고 활동해도 멀쩡하지만 그 백 년을 주기로 몇 달간 휴식에 들어가야 살아갈 수 있다.
헌데, 카우디는 일반적인 데모나스와 다르게 전투와 쇠질 때문에 몸을 축낼 일이 많은데다 마기를 잃었기에 휴식을 취해도 소용이 없어 이렇게 쓰러지는 지경에 다다르고 말았다.
= 우아아앙 이 돌팔이 영웅!
"아냐! 화, 환자가 특이 케이스였을 뿐"
= 전형적인 돌팔이 대사잖아요!!! 흐으아아앙
서러우이 우는 셀레스티는 원망스럽게 내 팔을 퍽퍽 쳤다.
설마 데모나스라는 양반이 활력이 없어서 쓰러질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지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어대는 셀레스티를 보니 내 양심이 쿡쿡 아파온다.
명백히 내 과실이 맞았기 때문이다.
'스, 스승님은 대체 언제 쯤'
"제자야~!"
죄책감과 불안감 속에 하늘을 우러르고 있을 즈음, 명랑한 목소리가 하늘 위에서 들려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