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87화 (87/119)

〈 87화 〉 추방과 망명은 한끗 차이 (5)

* * *

저 위에서 가볍게 도약해 흙바닥으로 내려 앉은 가소희.

그녀는 땅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카우디를 이모저모 뜯어보더니 진지한 표정을 짓고 대뜸 물었다.

"솔직히 말해주면 좋겠어. 왜 죽였니?"

"아, 안 죽었어요!!"

"풋. 농담이야, 농담."

가소희는 카우디의 상태를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아까의 진지한 표정은 장난이었는지 금세 즐거운 웃음기를 머금은 가소희는 내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때렸다.

아무래도 그녀의 입장에선 카우디가 사경을 헤메는 것보다 만드라고라 김치를 써야 한다는 게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 우아앙 분홍 언니 흑, 우리 아빠 살려줘요

"너 악마라고 하지 않았니? 나보다 나이 훨씬 많을 것 같은데 언니는 무슨. 언니가 아니라 손주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 머, 머라구요??

무녀에게 이미 들은 바가 있는 건지 말하는 망토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가소희는 무언가를 꺼내려는지 옷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볼 때마다 신기한 모습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는 정도의 광경이다.

"거기!!! 나만 두고 먼저 가면 어쩌자는 것이냐!!!"

품 속에서 번쩍이는 스테인리스 김치통을 꺼낸 가소희의 곁으로 무녀가 가볍게 착지했다.

아무래도 날아온 것 같은데, 뛰어온 가소희보다 느리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했다.

가소희와 달리 무녀는 서울에서 어디 붙어 먹은지도 모를 수원까지 날아 와야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무녀는 가소희와 다르게 꼼짝 않고 누운 카우디의 전신을 세상 뚫어져라 훑어보다가 이마를 턱 짚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가소희와 상반되는 태도다.

격하게 방울을 딸랑거린 무녀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인식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손을 놀렸다.

"에잇, 이 돌팔이 녀석!"

깡!

그러나 그녀의 꿀밤은 강화된 칠흑여제의 사랑에 의해 막혔다.

재빨리 움직이는 무녀의 손을 보지도 못한지라 머리에 충격이 오고 나서야 내가 꿀밤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칠흑여제의 사랑이 반응하긴 했지만.

"어어? 막아? 이 건방진!"

"제, 제가 막은 거 아니에요!"

주력을 담아 강화된 그녀의 작은 주먹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깡!! 깡!! 깡!! 깡!!

"악! 꺅! 자, 잠깐 으악!"

멋진 투구가 자비 없는 한손 연타에 볼품 없이 우그러졌다.

칠흑갑주가 무적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근접계도 아닌 무녀의 펀치펀치에 싸구려 캔마냥 우그러들 정도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칠흑갑주는 경갑인 만큼 내구성보단 수복과 기동성에 초점을 맞춘 물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투구 너머로 전달된 연속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팔을 들어 머리를 감싸자 그제서야 주먹질을 멈춘 무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바뀐 바이저를 뜯어내다시피 연 그녀는 핑글대는 내 눈을 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쁘고 가슴 크면 멍청하다더니! 자칫하면 네가 데모나스 하나 죽일 뻔한 것이다!! 상처를 치유할 원기마저 없었으면 필히 죽었겠지!! 주술이 의학계에서 왜 밀려난 건지 모르는 것이냐!!"

"우으 죄, 죄송해요 설마 저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깟 주술 좀 익혔다고 어디 가서 전문가 행세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나한테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느냐!"

깡!

무녀는 끝으로 칠흑 투구를 한 번 더 때렸다.

그래도 나름 손속에 사정을 둔건지 투구만 망가지고 머리에 직접 가해지는 충격은 많지 않았다.

"야, 남의 제자 막 때리지 마."

"넌 조용히 하는 것이다! 이런 건 따끔하게 혼내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네가 간장에 절여 버린 육아 책에서 보지 못한 것이냐?"

"그렇게 치면 시현이는 내 앤데 왜 네가 훈육을 하니? 너도 치유술이랍시고 설치고 다니다가 큰일 날 뻔한 거 한두 번이 아니구만. 이 정도면 귀엽지."

"그, 그런 옛날옛적 얘기는 집어치는 것이다!"

무녀도 신은 아닌지라 미숙한 시절은 있었을 터.

과학적으로 자세히 검증되지 않은 분야인 주술을 익히다보면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경험을 가진 무녀는 선배로서 내 실수를 더 엄하게 꾸짖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넌 빨리 장인 놈한테 만드라고라나 먹이는 것이다!"

"이게 얼마짜린데 벌써 66.71kg 밖에 안 남았잖아. 시현아, 이거 다 빚으로 달아두는 거야. 알았지?"

"아, 으, 네"

묘하게 구체적인 숫자를 말한 가소희는 아다만티움제 젓가락을 쥐고 자그마한 사이즈의 김치통을 열었다.

그러자,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와 빛을 마주한 만드라고라 김치가 큰 괴성을 내질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귀를 막아 고막이 찢기는 것을 막았다.

­ 끼아아아아아아악──!!!!

"앗, 미안. 아까워서 숙성 덜 된 걸로 꺼냈더니만 너희들은 맛만 없었어도 다 숯불구이용 숯 행이었어. 알아?"

가소희가 기이한 열망을 담아 만드라고라를 위협하자 비명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천고의 영약 엘릭서의 베이스 재료도 맛 없으면 태워버리는 용자!

하긴, 만드라고라로 김치를 담그려면 그 정도 의지는 있어야 한다.

= 우앗, 까, 깜짝아

"저것도 발효되면서 꽤 약화된 것이다. 분홍대가리가 직접 만드라고라 김치를 담그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양념장을 바를 때마다 얼마나 크게 울던지. 가죽 벗긴 사람에게 염장을 해도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았느니라."

만드라고라가 기력 없는 사람을 일으키는데 효과적이라는 건 사실 그 괴성 때문이 아닐까.

확실히 저렇게 소리를 지르면 병상에서 죽어가던 노인도 벌떡 일어설 법하다.

세상에서 가장 반응성이 낮은 금속, 아다만티움으로 주조된 쇠젓가락이 20cm 남짓한 만드라고라를 조심히 들어올린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와 양념장으로 빨갛게 칠해져 먹음직스러운 윤기를 흘리는 아름다운 뿌리.

만드라고라의 신적인 향과 매콤한 김치 특유의 내음이 어우러져 사방에 퍼지자,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남한테 안 줄 거라고 말할만 하네'

김치의 강한 향은 채소 본연의 향을 죽인다.

김치에 사용된 채소의 특성은 파김치나 부추김치 같은 자기주장이 강한 류가 아닌 이상에야 그 식감만을 남기고 장렬히 전사하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만드라고라는 자기주장이 강한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김치의 향과 맞서 싸워 승리할 정도의 맑은 향을 가진 식물.

양념과 절임을 어설프게 하면 이도저도 아닌 맛이 되기 십상이지만, 가소희의 특제 레시피와 꼼꼼한 절임은 만드라고라 전용 양념을 채소 뿌리 속까지 꽉꽉 스며들게 하여 그 향을 배가시켰다.

그야말로 밥도둑을 넘어선 밥학살자.

한 뿌리만, 아니 겉에 묻은 양념 한 숟갈만 있어도 그날 세 끼는 걱정이 없을 것만 같다.

= 조금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저래봤자 김치잖아요.

"아니, 진짜라니까. 네가 김 모락대는 흰쌀밥에 양념이 속까지 단단하게 꽈득하고 아물린 총각김치를 살풋 얹어 한달음에 아삭 씹어 먹는 그 느낌을 알아?"

= 영웅이라면 운동장 흙에 섞인 미네랄도 소화할 줄 알아야지 무슨 얼어죽을 쌀밥에 김치예요?

역시 망토한테 먹는 것으로 이해를 구하기는 요원한 일인 것 같다.

불쌍한 것!

가소희는 세상 아까운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 카우디의 입에 만드라고라 김치를 투하했다.

믿을 수 없게도, 의식을 완전히 잃었을 터인 카우디는 절로 턱을 움직여 김치를 씹었다.

아스슥하는 소리가 수원 전체에 울려퍼지는 것만 같다.

"음 오 오오!"

가소희의 손맛이 담긴 김치를 씹어 삼킨 카우디는 감탄성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만드라고라의 원기회복 효능이 도는 건지, 거인의 흉악한 근육이 맥동하며 극적인 부활을 알렸다.

그야말로 땅 밑에서 태동하는 재생의 우레.

나는 새삼 지뢰복?雪?이 시사하는 것은 만드라고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생기를 만끽하던 카우디는 힘이 넘치는지 자리에서 벌떡 튀어오르며 외쳤다.

"으와아아아──!!!!!! 자아아알──자아아았─다아아아아아──!!!!!!!"

카우디의 권능, '충격'을 담은 외침.

무녀는 미리 펼쳐둔 방어막으로 이를 상쇄했다.

= 아, 아빠!

"우하하하하!!!! 고맙소, 주술사 양반!!!! 이렇게 몸이 상쾌해질 줄이야!!!! 헉, 세상에나!!!! 상처가 흉터도 없이 나았잖아!!!! 하하하하하하하!!!! 이런 천하제일대의원을 내가 의심했다니!!!!"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성큼성큼 다가온 카우디가 두 팔을 벌려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현명한 판단을 내린 칠흑여제가 갑주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척추가 부러져 죽었을 거다.

끼이익

심지어 칠흑갑주도 카우디의 전력 베어허그로 인해 불안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 잠깐! 저 허리!"

"크하하하하하!!!! 봐라, 딸아!!!! 이 아버지는 이제 괜찮다아아아!!!!!"

꺼낸 김에 만드라고라 김치를 하나 슬쩍 집어 먹은 가소희와 얼척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갈고리 눈을 뜬 무녀를 완전히 무시한 카우디는 셀레스티가 있는 내 왼팔을 붙들고 풍차를 돌렸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공중을 날았다.

"우햐아아아악!!!!"

"그만, 그만!! 얘 암기 다 떨어지지 않느냐!!"

"음? 하하! 손님들이 있었군! 이거 추태를 보였소!"

카우디는 이전처럼 나를 바닥에 툭 내려놨다.

물론 신장 차이 때문에 내게는 퍽 내려놓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으객!"

"아하하! 우리 천하제일대의원 정시현 제자님!"

"노, 놀리지 으앗, 어지러."

어거지로 일어서다 균형을 잃은 나를 붙잡아 세운 가소희가 내 허리를 잡고 반대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가뜩이나 어지러웠는데 이러니 정말 토할 것 같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어지럽지 말라고."

"그게 소용이 있을 어라."

믿을 수 없겠지만, 가소희가 돌고 있던 날 척 멈춰 세우자 현기증이 싹 가셨다.

이런 건 과학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새삼 책 속의 과학이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늘도 과학의 첨병으로서 열심히 논문을 작성하고 있을 성초은이 보면 기절초풍할 현상이다.

벙찐 표정을 짓는 내게 눈을 찡긋 해보인 가소희는 흙바닥에 떨어진 내 암기를 주워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해. 네가 똑똑한 아이인 건 아는데, 가끔은 부주의할 때가 있다니까. 이론만 알아서는 안 되는 게 많으니 앞으론 숙련된 조교의 조언을 구하도록! 알았지?"

"네, 네에"

"그래그래. 특히 의료행위 같은 건 어? 이게 뭐지?"

땅에서 각종 날붙이를 줍던 가소희는 반짝이는 뱃지 하나를 줍고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전에 뱀파이어를 처치하고 주워 두었던 기르키스 가문의 표식이었다.

"오늘 습격자한테 주운 거예요. 십이가문의 표식인데"

"그래? 음,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 맞다."

뱃지를 유심히 보던 가소희는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거 헌터협회에 잡입한 악마계약자가 들고 있던 건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