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추방과 망명은 한끗 차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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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계약자가 들고 있었다고요? 이걸?""응. 이름이 가문 이름이 기 뭐시기였는데. 기르오슨가 기철인가."
이곳 뿐만 아니라 헌터협회에도 잠입을 했단다.
그것도 기르키스의 표식을 몸에 당당히 지닌 채.
"혹시 그 악마계약자는?"
"뱀파이어의 계약자였지. 기 뭐시기에 있는 악마는 죄다 데모나스라고 들었는데 왜 뱀파이어의 계약자가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기르키스는 프라임워커와 마찬가지로 데모나스로 이루어진 가문이다.
기르키스 가문과 추호도 관련이 없는 뱀파이어의 계약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음해네. 그것도 기르키스를 향한.'
뱀파이어는 용병이라고 치더라도 용병이 의뢰주의 표식을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다.
카우디 살해와 헌터협회 잠입이 상단 마차 수준의 퀘스트도 아니니 말이다.
차라리 군번줄이면 몰라도.
"그래서 그 사건은 어떻게 됐어요? 배후도 알아냈어요?"
"배후? 글쎄. 헌협을 노리는 게 한둘이 아니어야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서 조사도 다 이뤄지진 않았어. 조사라 해봤자 뚜껑 따서 뇌 조금 헤집는 정도겠지만."
악마가 계약자의 기억을 지우니 뭐니 해도 물리적 수술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가소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상은 곧 밝혀질 것이다.
일개 계약자가 무엇을 알겠냐만은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한 탐정마냥 뱃지를 요리조리 훑어보던 가소희는 동전 튕기듯 뱃지를 내게 던져줬다.
"적어도 두 사건이 전혀 연관이 없을 수는 없겠지. 아무튼 고마워. 자세한 진상은 저 친구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가소희가 말한 저 친구, 카우디는 굳세게 팔짱을 끼고 무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짐짓 무거운 분위기를 잡는 게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슬쩍 귀를 기울여보았다.
"거듭 말하지만, 싫다."
"아니!! 대체 어째서인 것이냐?"
"배는 무구가 아니잖나. 그리고 난 대장장이지 조선공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조선에 네놈의 어휴! 빡대가리!! 이쪽으로 오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무녀가 내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그나저나 대놓고 빡대가리라니 조금 상처 받았다.
너무해!
내가 불퉁스런 표정을 짓고 다가가자 무녀는 내 왼손을 곱게 잡아채곤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 확실히 그대는 조선공이 아니라 대장장이긴 하지. 하지만 이건 내 부탁이기도 하지만 네 딸의 부탁이기도 한 것이다!"
= 네? 뭐가요?
"뭐냐니! 배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지!"
= 아, 그거요
확실히 무녀는 내게 영구 인챈트라는 뇌물을 주면서 로비를 시도했다.
카우디를 설득해 배를 만들게 해달라는 류의 부탁을.
하지만 셀레스티는 몸을 버들가지처럼 흔들어 무녀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오며 과장되게 코웃음을 쳤다.
= 흥! 저한테 부탁하면서 인챈트는 깜둥이한테 붙여줬잖아요! 무슨 염치예요!!
"뭐, 뭐라? 염치이? 그 말은 인챈트를 회수해도 된다는 소리렸다?"
= 저한테 붙은 것도 아닌데 알 게 뭐예요! 그리고 우리 아빠가 싫다는데 다 이유가 있겠죠! 그죠?
굳건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카우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무거워봤자 수십에서 수백 킬로그램 정도의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에게 외해를 항해하는 선박을 만들라니, 말 그대로 미친 짓이지."
"거듭 말했듯 그대가 모두 다 하는 것이 아니라니까? 그대는 골격과 장갑만 손봐주면 된다고!"
"크하하! 웃기고 있군. 그게 다 하는 거 아닌가? 내가 하지 않는 건 뭐, 가구 인테리어나 그런 거냐?"
작은 조각배가 아닌 이상에야 골격부터 장갑을 전부 혼자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저기? 대화하는데 실례할게요~"
그에 반박해 뭐라 말하려던 무녀를 제지하고 나타난 가소희가 무언가를 척 내밀었다.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형사처럼 무언가 멋진 신분증을 척 내밀어보인 그녀는 카우디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런 재미 없는 통통배 얘기는 집어치고,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헌터협회의 별동대원이자 한국 칠성의 이쁜이 검수로서 묻는 건데 혹시 기르키스 가문과 무슨 관계를 맺고 계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니, 분홍대가리! 이게 무슨 패악질인 것이냐! 내가 먼저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다!"
반발하는 무녀와 다르게 배에 대한 주제를 피하고 싶었던 카우디는 가소희의 질문에 턱을 쓰다듬다가 답했다.
"기르키스라. 습격자가 갖고 있던 표식을 보고 말하는 건가?"
"그것도 있고 헌터협회의 사정도 좀 있어서요."
"흐음, 그쪽에도 쳐들어온 모양이지. 어디 보자"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생각하는 카우디.
"기르키스와 프라임워커는 먼 옛날 뿌리가 같았다, 이런 얘기는 쓸모가 없겠지. 그래, 기르키스는 우리 가문을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했던 가문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했다라, 왜죠?"
"우리 지방의 이권을 프라임워커가 많이 갖고 있었거든. 영지는 작지만 노른자위 땅을 죄다 차지하고 있기도 했고."
가소희는 팔짱을 끼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지금 상황과 그 일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 녀석들은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을 텐데. 우리가 망명하면서 프라임워커가 갖고 있던 건 가문의 인장을 제외하고 홀랑 다 넘어가버렸으니 굳이 힘을 빼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십이가문의 입장에서라면 몰라도. 만일 인장이 돌아오면 그들이 소유한 프라임워커의 재산도 얼마든지 트집을 잡혀 빼앗길 수 있는 일이지 않나."
말인 즉, 기르키스가 카우디를 공격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십이가문의 이름으로 카우디를 공격할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탐탁잖아하는 족속이니.
"그렇다면 습격자가 유독 기르키스의 인장만을 갖고 있던 이유는 뭘까요?"
"난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십이가문에서 맥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가 기르키스를 의심하게 만들어 기르키스에게 적극적 협조를 얻어내는 거지."
정말 그런 이유일까?
기르키스는 역사적으로 처세술에 능한 가문이다.
그런 법적 제재도 안 되는 하찮은 수를 십이가문이 내놓을 이유도 없거니와 설령 내놓더라도 기르키스에겐 쓸 수 없을 얕은 술수다.
"사실은 잘 모르겠군. 기르키스는 애초에 그럴 일을 당할 건덕지도 주지 않는 놈들이라."
기르키스와 수없이 대립했던 카우디의 입장에서도 그리 말할 정도니 더 이상의 사족은 필요 없으리라.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카우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기르키스랑 사이가 안 좋은 가문이 있나요?"
"사이가 안 좋은 가문? 아하, 혹시 십이가문이 아니라 특정 가문의 술수로 보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범인이 꼭 십이가문일 필요는 없으니."
기르키스를 음해한다는 것은 곧 기르키스 가문이 불리한 상황에 놓일수록 자신의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에서 나온 행동이다.
당연히 기르키스와 사이가 안 좋을 수 밖에.
"하지만 시현아. 일개 가문이 십이가문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악마를 차원 너머로 보낼 수는 없어."
"윤허를 받았을 수도 있죠. 아니면 몰래 보냈거나. 그보다 차원을 넘어가는 뱀파이어에게 기르키스의 표식만 몰래 챙겨주면 되는 일인데 십이가문의 허락이고 자시고 필요 없겠죠."
기르키스의 표식을 카우디와 헌터협회의 보였다는 것 자체가 기르키스에겐 약점이 된다.
뻔히 보이는 술수고 뭐고 악마들에겐 그냥 기르키스를 공격할 '명분'이 되기에.
카우디와 헌터협회가 겪는 혼란은 덤일 테고 말이다.
"기르키스와 사이가 안 좋은 가문은 꽤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이가 안 좋은 가문은 둘 있지."
프라임워커와 저거노트.
모두 기르키스와 함께 서쪽 로엠을 삼분하던 가문이다.
"저거노트 또한 프라임워커에 집중적으로 공세를 가했던 녀석들이지. 하지만 마지막 싸움에 패해서 기르키스에게 전리품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어. 영지부터 광산 채굴권까지 모두."
저거노트는 이로 하여금 기르키스의 꽁무니를 잡을 심산이다.
칠칠맞게 가문의 표식을 타 차원에 떨구고 다니는 머저리로 포장하는 식으로 공세를 가하겠지.
실제로 기르키스의 표식으로 인해 헌터협회의 검문이 강해지는 효과를 낳게 되면 기르키스는 진실이 어떻든 간에 책임론에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서쪽 로엠에 프라임워커가 없는 지금은 기르키스가 힘을 잃으면 그 근방에 있는 저거노트가 그 힘을 먹고 강해질 수 밖에 없는 형국이야. 확실히 말이 되네.'
이 결론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는 헌터협회의 악마계약자 심문이 끝나면 다 알게 될 일이다.
"아, 카우디 님? 이 참에 혹시 헌협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게 어때요? 아니면 경호라도 둘러드릴까요?"
"경호도 싫고 이사는 더 싫지만 지금 와서는 거절하기 힘든 말이군. 특히 그 성자 놈한테 당한 뒤로는 불안해서 잠이 안 왔지."
"그 덩치를 갖고 불안해서 잠이 안 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하! 오늘내일 하는 목숨으로 언제고 쳐들어올 수 있는 습격자를 몇 달간 밤낮 없이 신경써본 적 있나?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해주지."
"늙어 빠져선."
무녀와 카우디는 또다시 티격댔다.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딱히 나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부탁을 대리로 맡기길래 사이가 안 좋은 건가 했는데.
"스승님은 이제 어쩌실 거예요?"
"나야 뭐, 심문 결과 나오기 전에 한 번 다 뒤엎어봐야지. 미친 사이비 새끼도 견제할 방법을 찾아 보고. 솔직히 걔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참 하아."
대외적으로는 고작 별동대원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실질적으로 헌터협회의 머리 역할을 하는 그녀였다.
배후에 저거노트가 있든 십이가문이 있든 멀뚱히 있을 수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박스핀도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나?'
박스핀의 계약자인 오팔은 기르키스 가문의 전 가주 출신 대악마다.
위대한 열 좌석을 차지한 클리포트 의회에 비하면 지방 호족 정도의 위상 밖에 가지지 못한 십이가문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얼마 안 되는 대악마인 것이다.
어지간해선 가만히 있겠지만 자신이 일군 가문이 무너질 정도가 되면 어떻게든 개입하겠지.
'이번 재앙이 분수령이 될 수도 있겠어.'
악마의 간섭과 우월의 대두.
미친 세율을 빼면 어느 정도 평화로웠던 한국은 재앙을 기점으로 변화할 것이다.
***
야.
"아이, 씹!!! 손 베였잖아, 이 씨발애미창년의 새끼야!!!"
비늘의 표본을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초진동마기입자가속물질파 커터를 움직이던 스피넬이 빽 소리쳤다.
좋게 말하면 기분파, 나쁘게 말하면 감정제어장애자인 스피넬은 특히 연구 중에 방해 받는 일을 극히 싫어한다.
뭐? 싸가지 없는 거 봐라. 내가 내 계약자한테 말 걸겠다는데.
"이 씹새야!!! 그래서 너 ln x 적분할 줄 알아?? 마력공식은 커녕 자연로그도 모르는 병~신 뿔충이년이 감히 위대한자연공학의축복이자세기에다시없을우월의수장이자인류의진화를가져올대혁명가의 연구를 방해해!!!!!!!"
ln x? 아이엔 엑스라고 읽는 건가?
"야아아악!!!!!!!!"
거대한 핵융합로에 연결된 거대한 칼을 붕붕 휘두르는 스피넬.
물론 대악마가 그런 하찮은 위협으로 닥치게 할 수 있을 만큼 나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너, 우리 가문 건으로 일 하나만 해주면 좋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