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마법소녀와 일각수 (1)
* * *
땅은 그 자체로 의연하다.
바닷물에 채 잠기지 않은 지각 위를 열심히 쏘아다니는 인간이란 족속은 제멋대로 흙바닥 위에 선을 그어 네 땅 내 땅 한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땅은 누군가의 소유였던 적이 없다.
기실 땅이란 것은 누군가 지고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처럼 품에 끌어 안고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때문에, 인간이 땅에 남기는 것은 대지의 소유증서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흔적이다.
돌을 든 원시인이 벽화를 남기고 고명한 선비가 봉분을 남기듯.
흩날리는 먼지가 바위에 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그렇게 땅을 스쳐지나간다.
땅이 종이라면 사람은 붓.
역사는 종이를 지나간 붓이 남긴 먹물이 되는 것이다.
"."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 앉은 두루마기의 여성이 아득한 눈으로 땅을 내려다봤다.
강성한 고대 왕국과 사상 최악의 독재국가가 최후를 맞이한 역사가 있는 이곳.
그곳엔 폐허가 된 평양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이익
음, 아아! 소희 씨, 들리죠?
"어."
평양성 쪽은 어때요? 다시 쓸만한가요?
전선 밖의 괴물 무리를 뚫고 오느라 오물이 낀 월왕구천을 한 차례 비틀어 턴 가소희가 입에 통신기를 갖다대고 말했다.
"뚱돼지 독재자가 만든 것 치고는 꽤 멀쩡해. 외성이랑 중성은 양호해보이고. 내성이나 북성을 다시 활용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래요? 적은 어때요? 청소는 쉬울 것 같나요?
"내성 너머로는 모르겠고, 그 밖에는 지성 없는 언데드만 남은 것 같은데 적당히 쓸어 주면 무리는 없을 거야. 내성이나 북성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은데. 탐색을 더 할까?"
아뇨.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요. 소탕이 어렵진 않을 테니까.
가소희는 헌터협회 별동대원으로서 꽤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
단신으로 북쪽 전선을 뚫고 올라가 평양성을 정찰하는 것이 바로 그것.
영원한 순회가 언데드를 부르면서 북쪽이 텅 비긴 했지만 단신으로 이 임무를 맡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녀가 한국 칠성이 아니었다면 말이지만.
음 그래요. 평양성에 무리가 없다면 계획대로 일차 방어선을 대동강으로 올리는 게 옳겠네요. 위에 보고해둘게요.
"시간 없으니까 내 이름 대면서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전해. 그놈들 은근히 미적대는 거 알잖아."
네. 그렇게 전할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뚝.
무전을 끊은 가소희가 바위에서 일어섰다.
텅 비어버린 평양성, 고고히 흐르는 대동강.
앞서 멸망한 두 나라가 그랬듯 대한민국 또한 이곳에서 국운을 걸게 되리라.
'어쩌면 한국사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지도 모르겠어.'
복사꽃의 검수가 허리끈을 꽉 조여 맸다.
***
나는 지금 사리원에 있는 북쪽 전선의 막사 안에 누워 있다.
재앙 직전에 가소희와 떠난 수련은 다름 아닌 북쪽 전선에서 행해졌다.
크고 아름다운 포신을 자랑하는 융합마력포와 대체 어떻게 이동하는지 모를 30m 높이의 이동형 감시탑, 사제의 축복을 받은 신성한 철조망을 점검하는 피로한 전투 마법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강원도 쪽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안 가네.'
전투기와 미사일이 심심찮게 날아다니던 과학시대에도 산은 군대를 움직이기 힘든 지역이었는데 사람이 직접 뛰어 다녀야 하는 지금 시대에는 얼마나 고생을 할지 상상이 잘 안 간다.
난 군대도 후방으로 다녀왔으니까.
"나 왔어."
정찰을 나갔던 가소희가 천막을 걷고 막사에 들어 왔다.
전선을 넘어 평양성의 상태가 어떤지 보고 온다더니만 약 세 시간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빨라도 되나.
"오셨어요? 평양성은 어땠어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그건 평양이 아니라 개성을 둘러보고 한 소리 아니에요?"
"제자야, 문학이란 건 해석하기 나름이란다. 요즘 교육부는 그런 걸 몰라요."
야은의 시구를 읊으며 교육부를 때린 가소희가 두루마기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직 망자들이 우글대는 북쪽 전선 너머에서 돌아온 것 치고는 꽤 깨끗했다.
그녀의 압도적인 무력을 잘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전선을 올릴 거야. 대동강 쪽으로."
"그럼 대동강 전선을 펼치는 거군요? 혹시 평양성을 거점으로 하는 건가요?"
"맞아. 그 꿀꿀이가 쌓은 성이 아직 남았거든. 즈그 인민을 이백만 가까이 죽여가면서 만든 요새니 지금까지도 멀쩡할 수 밖에."
압록강 너머에서 불어나는 언데드에게 위기를 느낀 독재자가 만든 보금자리.
먼 옛날 고구려의 수도 구실을 했던 평양성은 가뜩이나 삐쩍 마른 인민의 고혈을 쥐어짠 끝에 세계 최고의 대 언데드 공성요새로 거듭났다.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독재자의 무차별적 처형으로 능력자 부족에 시달리던 북한은 이런 요새를 갖고도 언데드에게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 성벽만은 여전히 번쩍이는 은을 몸에 덮고 옛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안에 전선을 대동강까지 올릴 수 있을까요? 보급은 그렇다 쳐도 급히 올라가면 안정화가 쉽지 않을 텐데"
"노처녀 마법소녀랑 틀딱 창쟁이가 돕기로 했어. 그 사이비도 아가페를 끌고 오기로 했고."
"아, 그렇군요."
가소희, 주하연, 이준욱, 박하민.
한국 칠성 네 명이 돕는다면 가뿐한 일이었다.
"지성 있는 언데드는 영원한 순회의 부름에 따라 압록강 너머로 올라갔어. 남은 건 떨거지들 뿐이니 빠르게 올라가면 대동강 전선을 형성하고 평양성을 보수해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평양성은 무리를 해서라도 장악할 가치가 있는 요새니까."
수 억에 달하는 질서정연한 언데드 상대로는 평양성을 끼고 공성전을 하는 게 훨씬 잘 먹힌다.
서울시가 암만 강력한 방위 시스템을 자랑하는 요새 도시라고 해도 서울까지 재앙을 끌고 오는 건 현실적으로 미친 짓이니.
치이익
음, 아아! 들리세요? 대동강 및 평양성 수복에 대한 허락이 떨어졌어요. 내일부터 북진하면 되겠네요.
"알았어."
뚝.
무전으로 사령부와 간단한 대화를 나눈 가소희가 깨끗한 천을 꺼내 월왕구천을 손질하며 말했다.
"들었지?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진격이야. 내 예상이 맞다면 평양까지는 한 나흘 걸릴 거고 평양성 보수 및 전선 형성은 2주가 걸릴 거야. 우린 선발대로서 평양성에 먼저 도착해 그 안에 남은 언데드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됐고. 우리 연약한 제자는 오늘 푹 쉬어둬."
"네. 그런데 선발대 구성은 어떻게 돼요?"
세심한 손길로 월왕구천에 광을 내던 가소희가 아미를 찌푸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랑 내가 있는 헌협 별동대랑 아가페 전투단 하나, 또 마법소녀 뭐시기의 주하연. 아가페까지야 그렇다 쳐도 그 주책바가지년은 왜 슬쩍 끼어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짜증나게."
"사이가 안 좋으신가봐요?"
"아니, 걔 성격 이상해! 존나 독선적이야! 명령은 좆도 안 듣고 지 혼자 뛰쳐나가서 펑펑대면서 계획이란 계획은 다 망치고! 그러면서 내가 뭐라 하면 팔짱 끼고 당신은 몰라도 정의는 자신을 알아줄 거라느니, 그딴 소리를 한다니까! 우리 하르미아 선배한테는 악마의 주구라면서 막 달려들고! 우리 선배만큼 착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그러는 거야, 대체? 반쯤 악마면 뭐 어떻다고!"
주하연의 면상을 상상하는 건지 천을 쥔 손으로 허공에 펀치펀치를 갈기는 가소희.
기껏 광을 낸 월왕구천을 땅에 깡깡거리는 게 여간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나는 화난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한 분홍머리 검수를 보며 적절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긴 그렇죠. 뭔가 목소리도 짜증나지 않아요? 아카데미에서 아침마다 힘내라느니 뭐니 하면서 주하윤 목소리가 울려퍼지는데 들을 때마다 죽고 싶더라고요."
"뭐? 정말? 아니, 우리 선배께서 왜 그걸 안 바꾸셨지? 우리 제자도 참 고생이 많다, 야."
가소희가 측은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사실 주하연이 짜증난다기보다는 아침잠을 깨우는 방송 자체가 짜증이 나는 거였지만 그런 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너도 조심해. 너도 하르미아 선배의 조카 되는 몸이니까 무언가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 막 쿼터 데몬이다! 하면서 달려들지도."
"그러면 우리 스승님께서 잘 지켜주시겠죠. 혹시 싸우면 누가 이겨요?"
"초딩도 아니고 그런 걸 물어보니? 당연히 네 스승님이 이기지!"
가소희가 자신감 충만한 표정을 지으며 월왕구천을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반반 갈 것 같지만 역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았다.
'설마 둘이 싸우지는 않겠지.'
하르미아와 달리 은근히 제멋대로의 성격을 가진 가소희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알아서 하겠지, 뭐.'
나는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사리원은 북한 교통의 중심지였다.
남쪽으로는 개성, 북쪽으로는 평양, 동쪽으로는 강원도가 자리한 교통의 요지답게 도로도 북쪽 치고는 잘 닦여 있었지만 북한이 망한지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 그런 도로를 바랄 수는 없었다.
말인 즉, 이동하는데 바퀴 달린 이동수단을 사용하기가 꽤 곤란하단 소리였다.
"아~ 다들 나처럼 적당히 베어넘기면서 뛰어갈 수 있으면 좀 좋아."
"그랬으면 영원한 순회한테 온 나라가 벌벌 떨 일도 없었겠죠."
먼저 평양성으로 향하는 선발대는 총 42명.
군용 차량를 차출해 가면 딱 좋을 숫자였지만 도로의 상태가 여간 아니었기에 도보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들 헌터니까 빨리 움직일 수 있잖아요."
"그렇지, 뭐. 저녁 먹기 전에 도착은 할 수 있겠어."
아침은 사리원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그나마도 대부분 길을 막는 언데드를 치우는 시간일 터였다.
가소희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그때, 헌터협회 별동대원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소희 씨!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요?"
"중요한 이야기인데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심문 얘기면 그냥 해도 돼요. 조용하게."
"아, 그렇습니까. 심문의 결과가 소희 씨의 예상과 일치했습니다. 기억이 지워진 흔적은 있지만 놈은 계약한 악마에게서 들키지 말되, 들키면 기르키스의 첩자인 척을 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녀석은 저거노트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헌터협회에 잠입한 악마계약자 이야기였다.
이로서 저거노트가 다페르헤이드에 지속적인 공작을 펼친다는 가설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알았어요. 가보세요."
"네. 소희 씨도 수고하십쇼."
같은 별동대원임에도 깍듯한 태도를 취한 별동대원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누가 보면 상관과 부하직원인 줄 알겠다.
"역시 실세시군요."
"뭐래. 난 그냥 평범한 별동대원이야."
"퍽도 그렇네요."
내 말에 가소희는 팔짱을 끼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보면 나보다 애 같을 때가 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보니 선발대 출발시간이 다가왔다.
한국 칠성이 두 명이나 있으므로 딱히 진형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판단 하에 빠른 행군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나는 짐을 메고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다리를 풀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멀리서 지휘관과 일정을 조율하는 가소희를 뒤로 하고 전쟁걸음을 정비하던 내게 누군가 다가왔다.
다름 아닌 마법소녀 차림의 주하연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저희 박물관에서 뵌 적이 있죠?"
하르미아와 함께 망혼의 방랑자를 처치했을 때 주하연을 마주친 적이 있다.
주하연은 그때 부상입은 하르미아에게 총을 겨눈 전과가 있다.
"네. 있죠."
"그때 무언가 해코지를 당한 건 아니죠? 혹시 협박을 당했다든지?"
"무슨 해코지요?"
"있잖아요, 그 환상을 다루는 악마! 하르미아라는 나쁜 녀석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나와 친구들을 하르미아가 잡은 인질 비슷하게 생각한 그녀였다.
설마 그 생각을 아직도 못 버린 건가?
나는 얼척이 없어서 뚱하게 응수했다.
"그런 적 없는데요?"
"역시. 그 녀석이 세뇌를 저질렀군요!"
틀림 없어뿅! 그 사악한 권능을 이용한 거야뿅!
'씹, 깜짝이야,'
주하연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네모낳고 귀여운 박쥐가 통통 튀며 말했다.
마법소녀를 돕는 마스코트 비슷한 것이 분명했다.
말투가 무척 역겹다.
주하연은 당황스런 눈길을 보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백마력으로 하얗게 남실대는 손이었다.
"자! 잡으세요!"
"왜요?"
"사악한 환상의 악마가 당신에게 씌운 주박을 풀어드릴게요!"
잡으면 안 돼요. 저와 셀레스티가 들킬 테니까.
칠흑여제가 나직히 경고했다.
확실히 내 안에 악마 둘이 잠겨 있는 걸 확인하면 날 때려죽이려 들 거다.
"음,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순수한 선의가 가득한 주하연의 눈동자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 미친 여자, 어떻게든 존재하지도 않는 주박을 풀어낼 심산이다.
"그, 사실 전 백마력 알러지가"
"치유할 수 있어요! 이 때를 대비한 알러지 치유 마법이 있으니까요!"
"화장실 갔다가 손을 안 닦았는데."
"괜찮아요! 마법소녀가 손을 더럽히는 건 감수해야 할 일이죠!"
"제 손바닥에 종양이 도져서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손목만 대셔도 돼요!"
씹.
내가 은근히 뒷걸음질 치며 손을 뒤로 빼자, 주하연의 눈매가 점점 의심으로 물든다.
손만 내밀면 되는데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악수를 거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악독한 악마년이 깊게 세뇌를 건 게 틀림 없군요."
"아니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난데없이 다가와선 세뇌니 뭐니 하면서 손을 대라고 하는데 누구라도 의심하는 게 당연하죠! 당신이 그러고도 마법소녀"
"전 틀리지 않아요."
당신이 그러고도 마법소녀냐는 말을 입에 담는 찰나, 주하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순수한 수정빛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은 기이한 무채색.
주하연은 일종의 강박과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새, 생각보다 미친년'
"어쩔 수 없네요."
주하연의 하얀 손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예쁜 손이지만, 내게는 데스 터치나 다름 없다.
"잠깐만 참으세요!"
하얀 손이 내 이마를 향해 질주했다.
칠성과 아득한 차이가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손길이었다.
'뭐, 뭐라고 변명해야!'
쩌엉!
내 이마 앞으로 무언가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떠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빨간 피가 철철 흐르는 주하연의 손목 단면이었다.
쿠구구
본부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폐아파트가 반으로 쪼개져 붕괴했다.
주하연의 손목을 베고 지나간 참격이 만들어낸 참극이다.
"너 우리 제자한테 뭐하냐?"
멀리서 월왕구천을 그은 가소희가 아미를 일그러트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