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마법소녀와 일각수 (2)
* * *
선발대의 분위기가 얼어 붙었다.
무검희의 제자와 주하연 사이를 가른 참격.
폭삭 주저 앉는 건물의 붕괴를 배경음으로 삼은 가소희가 땅에 새겨진 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왔다.
"하! 안녕하세요, 헌협 높으신 분?"
억지로나마 표정을 풀어낸 주하연이 땅에 떨어진 손을 주워다 다시 팔에 붙였다.
백마력이 하얗게 빛나며 상처를 재생했지만, 곧 상처 단면에서 날카로운 꽃잎이 흐드러지며 잘린 팔을 다시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렇게 떨어진 주하연의 손을 꽈득 밟은 가소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하냐고."
"뭘 하냐니? 마법소녀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죠! 안 그런가요, 캔디?"
맞아뿅! 치졸한 권력자가 또 우리를 방해하는 거야뿅!
"넌 씨발 닥쳐 봐."
가소희의 검이 주하연의 어깨를 번쩍 스쳐 지나간다.
진붉은 머리칼 몇 가닥이 반으로 갈라진 박쥐 새끼와 함께 흩날렸다.
"이래봐야 캔디는 죽지 않는데요?"
"다른 건 몰라도 너는 자르면 죽어."
"하아, 한국 칠성이란 자가 할 줄 아는 게 협박 뿐이라니! 이 세상의 평화까지는 갈 길이 멀군요."
주하연은 뒤로 살짝 떨어지며 순수한 마법소녀가 지을 법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성격이 가진 그림자를 보았음에도 위화감이 생기지 않아 뒤늦은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뭘 하시냐고 물으셨죠? 자, 보세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발랄한 자세를 취하며 마법봉을 소환해보인 주하연.
그 발랄한 자세라는 것도 한쪽 팔이 잘린 상황이었기에 무척이나 괴기해보였다.
울컥 터져나온 피가 땅에 철푸덕거린다.
"이 봉은 제 동료의 능력인 '멸마!'를 가지고 있어요. 알죠?"
"멸마가 아니라 카니발리즘(동족 포식)이겠지."
"제 봉은 멸해야할 악마의 흔적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특성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 좀 보시겠어요?"
마스코트의 추악한 진실을 언급한 가소희를 아랑곳 않고 무언가 주문을 외운 주하연.
'매지카 · 매직!♬ 운명적으로 샤랄라☆' 따위의 부끄러운 주문이 끝나자 마법봉이 희게 빛나며 끝을 부들부들 떨었다.
겨울철 폭우 속 야산에 조난 된 사람처럼 사정없이 떨어대던 마법봉은 일순간 떨림을 뚝 멈추더니 가소희 뒤에 숨은 나를 척 가리켰다.
빼도박도 못하게 나였다.
죄송해요. 검과 검집을 쫓아온 것 같네요. 제가 조금 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주하연이 쫓아온 것은 다름 아닌 천린과 송곳니 학살자.
모두 악마였던 카우디가 만든 무구였다.
나는 마법봉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캔디! 감정 상태가 어때?"
두려움에 떨고 있어뿅!
으적!
가소희가 반으로 잘린 채 나불거린 박쥐를 마저 밟아 으깼다.
그녀의 발에 신긴 죽음의 무도가 검은 피를 튀겼다.
"보이세요? 보이시냐구요! 당신의 제자에게서 악마의 흔적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정화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뭔 개소리야. 그걸로 아무나 가리키고 패죽이면 정당화가 되는 줄 아냐? 네가 중세시대 마녀사냥꾼이야?"
"패죽인다는 게 아니잖아요! 무언가 꺼림칙한 게 있으니 확인해볼 수는 있다는 거죠! 헌터협회의 높으신 분께선 멸마전문가인 마법소녀에게 그 정도도 허용을 못하시겠나요?"
"너희들은 법적으로 그딴 권한을 윤허 받은 적이 없을 텐데, 비헌터."
사람들은 각성자를 뭉뚱그려 헌터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하지만, 당연히 모든 각성자가 헌터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마법소녀는 헌터협회에게 인가를 받지 못한 각성자로 법적으로는 '비헌터 각성자'로 분류된다.
헌터 잡는 헌터인 인퀴지터나 갖는 '각성자 대상 불시검문권'을 비헌터인 마법소녀가 가졌을 리가 없는 것이다.
헌터협회 실세인 가소희의 정론에 헛웃음 지은 최고참 마법소녀가 고개를 비틀었다.
"헤, 당신들은 늘 그런 식으로 마법소녀를 방해하더군요. 그냥 공적을 빼앗길까봐 억지로 만든 구실인 걸 누가 모를 것 같아요? 저희를 헌터로 인정하지 않는 맥락도 비슷하잖아요!"
"아하하! 늘 느끼지만 너네 정말 재밌구나. 긴급소집령은 응하기 싫지만 헌터는 하고 싶어요, 딱히 인퀴지터가 될 능력은 없지만 아무나 막 집어서 마녀사냥은 하고 싶어요, 그런 거 아냐?"
실제로 마법소녀가 벌인 행각으로 생긴 무고한 피해자는 수없이 많다.
그만큼 악마계약자를 잡아들인 수도 늘어났지만 그들이 끼친 민폐를 덮을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다.
주하연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을 꾹 닫았다가 다시금 말했다.
"흥! 그보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의 제자에게서 악마의 흔적이 나왔고, 저는 그걸 확인하고 정화할 의무가 있다니까요? 나 참, 이래서 높으신 분들이란 자기가 불리해지면 꼭 원리원칙을 들먹인다니까."
"나는 네가 가졌다는 의무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야, 병신아. 그리고 너네 이거 알아?"
가소희가 옷깃에서 뱃지를 꺼냈다.
헌터협회에 잠입했던 첩자가 지니고 있던 기르키스 가문의 표식이었다.
덜덜덜덜덜
나를 가리키던 마법봉이 와들와들 떨더니 방향을 틀어 가소희가 든 뱃지를 가리켰다.
마기를 버린 악마의 손이 닿았을 뿐인 무구와 로엠의 유력 가문이 자신의 상징을 새긴 표식.
어떤 게 더 악마의 흔적이 짙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어라?"
"헌터협회가 마법소녀를 불신하는 이유는 너희가 무능하기 때문이야. 당장 그 악마숭배자 새끼에 대한 것도 감을 못 잡는데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악마숭배자? 그리고 그 뱃지는 대체 뭐죠!?"
"개수작 부리는 악마계약자를 때려잡고 얻은 거지. 십이가문에 대해 알아?"
"십이가문이라면 캔디가 말한"
가소희는 심각한 표정을 짓는 주하연을 보고 코웃음쳤다.
"거봐. 그따구로 밖에 모르지. 진짜 적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애꿎은 하 선배나 쑤시고 앉아 있고. 그래. 네 말대로 헌터협회의 높으신 분으로서 말하는데."
뱃지로 원을 그리며 마법봉의 끝을 마음대로 움직여 보인 가소희가 바닥에 떨어진 손을 날카로운 발굽으로 뭉개버리며 말했다.
"니들보다 수 억 배는 유능한 헌터협회에선 우리 시현 양이 악마와 일절 관련 없음을 선언한다. 그러니까 썩 꺼져."
"."
분한 표정을 지은 주하연이 마법봉을 해제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이 일로 포기할 생각은 없어보였고, 언제라도 다시 나를 노려올 게 뻔했다.
가소희는 마구 뒤틀려 퍼렇게 식어가는 손을 힐에서 떼어내곤 멀리 차버렸다.
차인 손은 제멋대로 흰색으로 빛나더니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주인에게 돌아가는 거겠지.
"시현아."
"네?"
"넌 어디 가서 혼자 다니면 안 되겠다.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이런 짓을 당하니?"
새어나오는 기세를 갈무리한 가소희가 한심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 머리를 꽁 때렸다.
한국 칠성 씩이나 되는 자가 가소희가 없는 틈을 타 대뜸 다가온 걸 어쩌란 말인가.
어쩔 수 없었단 말이다.
"아무튼 조심해.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전투도 나서지 마. 저 년이 언제 노려올지 모르니까."
"네? 그건 좀"
"에휴, 애는 칠흑여제가 낳았는데 육아는 왜 내가 해야 하는 건지 이 바보 같은 것아. 네가 처신이라도 잘하면 이렇게까진 안 하지."
"??"
가소희는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적절히 조용한 곳으로 걸었다.
딱히 방향성이 있는 것 같진 않고, 그냥 걷고 싶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한 티를 내면 안 돼. 바보 같이 '네? 뭐라구요?' 이런 것도 좀 고치고. 당당하게 '지금 니가 무슨 권리로 날 조사하려 드냐, 우리 스승님이 헌터협회의 가소희란 분인데 감당할 수 있겠냐.' 이렇게 나왔으면 그렇게 쉽게 손을 뻗진 않았을 걸."
"아니, 한국 칠성한테 그게 먹힐 리가 없잖아요."
"걔라고 내 눈치를 안 볼 것 같니? 실제로 내가 걜 쫓아냈잖아? 넌 그게 문제야. 넌 네가 얼마나 뒷배 있고 능력 있는지 모른다니까."
은근슬쩍 자신을 올려친 가소희가 내 등을 팡팡 쳤다.
"솔직히 네가 뭐가 부족하니? 뒷배 탄탄하지, 앞길 창창하지, 얼굴 반반하지, 가슴 빵빵하지"
"네? 그게 뭔"
"네? 하지 말라고. 사회생활 안 해본 티내긴. 뭐든 간에 네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야 상황이 유리해지는 거야! 너 소심하다는 말 많이 듣지?"
갑자기 뼈 때리네.
확실히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 적당히 필요한 대답만 하는 타입이었다.
"그, 그게 잘못된 건가요"
"어휴. 얘가 대체 뭣하다 이렇게 됐는지. 너 이대로 가면 어어 하다가 보증도 막 서주고 그럴 걸?"
"아니에요!"
"아니긴. 이 밥팅이."
그리 쏘아 붙인 가소희가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콩 찍었다.
머리보단 가슴이 더 아프다
"그래도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랬을 텐데요."
"그냥 답답해서 넋두리 좀 해본 거야. 사실 저 년이 저러는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라서."
그녀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도 갖가지 지랄은 죄 한다고 한다.
명령권자를 개무시하고 멋대로 움직이다가 부대 곤경에 빠트리기, 강에 떠내려가는 고양이를 구한답시고 강적을 두고 이탈해 물 속에 다이빙하기, 마기를 쓰는 헌터를 대뜸 때려눕혀 전치 32주의 상해를 입히기 등등.
이게 대체 왜 이제껏 안 알려졌는지 이상할 정도의 기행 뿐이다.
"내가 저 년을 싫어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어 아, 출발시간 좀 지난 거 같은데 왜 출발을 안 하지? 애들은 왜 이렇게 얼어 있고?"
"누구 때문이겠어요?"
"누구 때문이긴. 우리 소심한 쿼터데몬 제자 때문이지."
아니거든요.
***
가소희의 검이 사리원을 두동강 내던 그 때, 멋들어진 삼륜 스쿠터를 탄 스피넬이 서울에 도착했다.
간만에 몸을 100% 되찾은 그녀는 새로운 몸을 입고 즐거우이 강남을 활보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집중되는 시선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하하!!! 다들 제 미모에 맥도 못 추리는군요!!!"
간도 크네. 설마 유명 탤런트를 잡아먹을 줄이야.
"이름이 분명히 예나였죠?? 이야, 이쁘긴 하더라고요!!! 당분간은 이렇게 다니지 않을까 싶은데요!!!"
길을 가다가 예능 촬영 현장을 습격해 예쁜 탤런트만 홀랑 빼먹은 스피넬.
대충 유명인 불러다가 농담 따먹기를 하다 추격전을 벌이는 류의 예능이었던지라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예나를 잡아먹는 것은 쉬웠다.
"어? 저거 예나 아냐?"
"뭐!? 어디? 헉, 진짜잖아?"
스피넬은 일부러 머리칼을 넘기며 길을 가던 남성들에게 웃어보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손짓이었지만 예쁜 얼굴은 그 허우적에 가까운 손짓과는 관계 없이 지나가던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다.
"예, 예나 씨가 나한테 웃어주셨어!"
"아니야, 새끼야! 나한테 한 거거든!"
제스처 하나만으로 십년 지기 우정에 균열을 만든 스피넬.
그녀는 모종의 고양감을 느끼며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었다.
"눈빛 보내기 게임하는 기분이네요!!!"
부탁 들었을 때만 해도 죽상이더니 갑자기 왜 이래?
"몰라서 물어요!?? 간만에 뭔가 때려부수는 작업이잖아요?? 설마 그런 화끈한 부탁도 하실 줄 알았다니!!!"
힘차게 웃는 그녀의 몸 속에서 생체 피스톤이 마구 뛰어논다.
비로소 다가온 파괴의 순간.
스피넬은 아가페 총본부가 있는 빌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 자!!! 시민 여러분!!!"
빌딩 앞에 선 청동 조각상 위에 훌쩍 올라선 스피넬.
시민들은 유명 연예인이 조각상에 올라선 것을 보고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뭐하는 거지?"
"영화라도 찍나?"
웅성웅성.
엉덩이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기도하는 조각상의 머리 위에 선 미녀 탤런트.
누구라도 휴대폰 카메라를 켜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것이다.
스피넬은 그녀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관심을 느끼며 근육을 뿌득거렸다.
그녀는 목청을 크게 열고 서울 전체에 울릴 정도로 외쳤다.
역사서에 길이 남을 사건의 시작이었다.
"서쪽 로엠의 적법한 지배자아아아─!!!!! 저거노트 가문 만세에에에에에──!!!!!!!!"
콰광─!!!
장엄한 함성과 함께 빌딩에 횡으로 그어진 발차기.
레깅스가 탄탄히 싸맨 그녀의 다리는 이윽고 극적으로 늘어나 거대한 채찍처럼 빌딩에 부딪혔다.
한순간에 밑동이 완파된 빌딩은 현실을 부정하듯 기우뚱거리다가 바닥을 향해 붕괴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박하미이이이이이이인──!!!!!!!!"
우월의 수장이자 최초의 재앙급 융합체.
"스, 아니지. 이 예나가 상대해주마아아아아아앗───!!!!!!!!!!!"
스피넬이 강남에 테러를 저질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