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마법소녀와 일각수 (3)
* * *
평양성에 도착했다.
일행의 자비 없는 속도에 맞춰 죽어라 뛴지라 다리가 다 후들거린다.
선발대의 평균 헌터 랭크는 A.
그들은 약간 서두르는 정도로 구보를 한 것이겠지만 내겐 전혀 아니었다.
"에헥, 헤엑, 에흐으억"
"애가 왜 이렇게 몸이 약하지? 보약이라도 지어줄까?"
"아니 헤엑 콜록, 콜록! 케헥"
"어머. 다 죽어가네. 업고 올 걸 그랬나?"
땅에 대자로 누워 숨을 몰아쉬는 내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가소희.
그녀는 땀은 커녕 숨소리도 내지 않을 만큼 멀쩡한 모양새였다.
온갖 부적을 붙이고 죽어라 뛰던 나와 달리 무검희가 뛰는 모습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호, 혼자 헤엑. 무협지를 찍고 계시던데"
"그 정도는 너도 화편검무의 스텝을 열심히 익히면 할 수 있을 걸."
"퍽도 그렇겠네요"
암만 검무의 스텝을 잘 밟을 수 있다 해도 풀잎을 밟고 달릴 수는 없다.
그 유명한 초상비의 경지가 아닌가?
혹시 등평도수나 능공허도가 가능한 건 아닐지 심히 의심되는 고수였다.
나는 이윽고 숨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서 평양성을 올려다 봤다.
누워 있음에도 성벽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찔러 오는 걸 견딜 수가 없던 까닭이다.
10층짜리 건물의 높이와 맞먹는 드높은 성벽.
세월이 지나 더러워지고 벗겨진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태양 아래 훤뜩한 은빛 벽돌.
누렇게 바스라지는 퇴마부가 붙은 부서진 성문.
그리고 문의 파편 사이로 얼핏 비추는 백골의 사막.
평양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덤이자 송장의 연회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들어갔어. 걔들이야 뭐, 알아서 거점 잡고 텐트나 치고 있겠지. 우린 북성으로 곧장 갈 거야."
"북성? 그 산성 말이에요?"
"어. 그쪽이 평양성에서 방어력이 제일 높은 곳이니까 확실히 답사하고 청소해둘 필요가 있거든."
기묘하게도, 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합쳐진 구조다.
평상시 생활은 평지에서 하다가 전시가 되면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는 식.
북한의 마지막 인간이 최후를 맞은 곳이 아닌가 싶다.
"어때, 움직이기 힘드니? 업어줄까?"
"괜찮아요. 잠시 지쳤을 뿐인데 뭘."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싫음 말고— 같은 태도를 보인 가소희가 대뜸 내 허리를 낚아채 공중에 휘리릭 돌렸다.
전조 없이 그녀의 손 위에서 돌던 월왕구천의 기분을 느낀 나는 졸지에 가소희의 어깨 위에 짐짝처럼 올려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황스러움에 유일한 버팀목인 그녀의 머리를 꼭 껴안고 있자니 가소희가 제자리에서 스텝 몇 번을 밟으며 바닥에 구두를 따각거렸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다.
"자, 잠깐! 놔주세요!! 안 업어주셔도 된다니깐!!"
"업히는 게 싫다며? 그럼 들쳐메야지."
"그게 무슨 개논리"
"우리 선발대야. 시간 없어. 자고로 임무는 시간이 생명이야! 별동대원 입장에서 네가 헥헥거리면서 늦게 쫓아오는 건 도저히 못 봐주겠거든!"
불량 대원 주제에 임무 운운한 무검희가 날 들고 몸을 한껏 굽혔다.
땅을 짓밟아 으깨듯 발을 비비던 그녀는 순식간에 몸을 펴고 짓쳐올랐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아파트 높이의 성벽을 올라온 가소희.
날 들고 있어 무게가 근 두 배로 늘어났음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우아아아아아아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멀어지는 땅바닥이 보인다.
인간은 날 수 없다더니, 아주 시뻘건 구라였다.
"자아, 북성이 이쪽이구나?"
쾅!!!
방금의 도약으로 성벽의 벽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땅을 박찬 건데 대포알 정도의 위력이 나온 것이다.
"히야아아아악!??"
나는 믿을 수 없는 가속도를 경험한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번의 굉음과 폭풍이 스쳐지나가더니 가소희가 날 또 휘리릭 돌려 땅에 꽂듯이 세워 놓았다.
"다 왔어."
나는 그제서야 눈을 비스르르 뜨고 땅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엎어지진 말고. 여기 아직 성벽 위니까."
"힉!? 왜 여기에 내려주신 거예요!!"
"우리 제자는 태워줘도 꽁알꽁알 말이 많네. 높은 곳이어야 정찰이 잘 되지."
성벽의 두께는 약 1.2m.
높이는 아파트 10층 정도.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는다면 그건 결단코 거짓말이다.
앉아서 넋을 놓아버린 내 머리를 스읏스읏해준 가소희가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 봐. 돼지새끼의 궁궐이야. 이름이 영수궁???? 이야, 직접 보는 건 한국에서 우리가 처음이지?"
"그, 그렇네요"
나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땅을 내려다 봤다.
서양식 건물에 빨간 기와가 올려진 작은 궁궐.
독재자의 임시 거처이자 지하벙커로 쓰이던 영수궁이다.
'저 아래는 하도 깊어서 지하던전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뭐, 스승님이 있으니까'
저 깊숙한 아래로 숨어든 이들도 모두 언데드가 된지 오래다.
하긴, 재앙이라는 게 땅 파고 숨으면 살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존재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재앙을 대하는 방법은 맞서 싸워 이기는 것 뿐!
적당히 타협하면 저 모양 저 꼴이 나고야 마는 것이다.
치이익
가소희가 땅 밑으로 내려가려던 그때, 그녀의 통신기가 소리를 흘렸다.
음, 아아! 소희 씨? 듣고 있어요? 급보입니다만.
"어. 왜?"
강남에 재앙이 나타났어요.
가소희의 움직임이 뚝 굳었다.
***
무너지는 아가페의 총본산.
한국에서 가장 비싼 빌딩의 위치를 갖고 있던 성신 빌딩이 번개 맞은 바벨탑마냥 장엄하게 쓰러졌다.
곁의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기우뚱거린 것은 물론이다.
"어?? 안 나와?? 나와라아아아앗—— 박하미이이이이이인——!!!!!"
스피넬은 무너진 건물에서 박하민이 나오지 않자, 곁에 선 빌딩을 무너트리기 위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도약은 신성한 힘을 담은 흉악한 손길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성스러운 힘을 담은 불경한 손톱에 맞은 스피넬은 다시금 아스팔트 도로를 부수고 땅에 떨어졌다.
"그 쯤 해두시지요."
한창 계약악마들에게서 보상을 뜯어내던 박하민이 손톱을 까득거렸다.
대악마를 찢어발긴 손길, 마사무르드가 그의 오른손을 덮고 길게 울었다.
"서, 성자다!"
"성자고 지랄이고 도망쳐!!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거야!!"
시민의 비명과 안도, 건물의 붕괴음.
그 모두를 덮는 마사무르드의 종소리를 닮은 울음소리.
그 속에서 스피넬이 다시금 벌떡 일어섰다.
"나왔구나, 이 개자식——!!!!!"
"누가 누구 보고 개자식이라는 겁니까?"
"닥쳐라!!!!! 네가 우리 저거노트 가문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박하민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한창 박하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저거노트의 가주는 기함해서는 부정했다.
아, 아니다! 나는 저 년을 모른다!
"하하. 계약에 불만이 있으시면 말씀을 하셨어야죠."
아니다, 아니야!! 저거노트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데 결코 아니야!!
박하민은 자비로이 웃으며 통신선을 끊어버렸다.
사실이야 어떻든 앞에 저거노트의 이름을 대며 아가페 총본부를 무너트린 씨발년이 있는 이상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저게 대체 얼마짜린진 아십니까? 저기서 죽어나간 아가페의 사람들은?"
"뭐어!?? 차면 부서지는 모래성 같은 건물에 값을 매긴다고?? 그 안에 살고 있던 개미새끼한테도?? 이야, 요즘 세상 돈 벌기 쉽네!!! 건물주나 좀 먹어볼까??"
그렇게 비아냥거린 스피넬이 땅 속 깊이 박혀 있던 발을 비틀었다.
그러자 발에서 변형되어 땅 속으로 침투했던 뿌리가 잔해 속에서 폭발하듯 자라나며 살아남은 사제들을 모조리 뜯어 죽여버렸다.
탈출에 성공한 몇몇 사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줌 핏물이 되어 생을 마감한 것이다.
"장난이 심하십니다."
성자가 마사무르드에 신성력을 더 욱여넣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스피넬의 힘은 척 보기에도 성자를 완전히 압도했으니.
악마들에게서 빌린 권능을 한 번에 해방하면 엇비슷하게 싸울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그의 성자 인생이 끝나는 건 자명했다.
'하르미아가 올 때까지만 어떻게 해봐야겠군.'
한편, 스피넬과 오팔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펄이 오기 전까진 도망쳐라.
"아 네~ 누굴 자살희망자로 보시나?? 내 알아 할게요!!! 오기 전에 죽이고 갈 테니까!!!"
그녀는 땅 밑을 자신의 뿌리로 채우며 몸을 변이시켰다.
***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내가 가야 되나?"
아뇨, 녀석은 환상파수꾼을 보자마자 욕설을 뱉으며 도망쳤다고 해요. 도망치는 속도 하나는 빠르더군요. 환상파수꾼의 추적을 피해 인천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추측하기로는 황해를 넘어 대륙으로 도망칠 것처럼 보여요.
"쯧. 그럼 난 임무 속행해야 되나?"
네. 그러라고 드린 연락이에요. 어차피 달리기는 잘 못하시잖아요?
가소희가 달리기를 못한다고?
그럼 다른 칠성은 대체 얼마나 빠르다는 거지?
"하아, 강남 일단 알았어. 우린 예정대로 움직일게."
피해 수습에 헌터협회의 자원을 차출할까요?
"아이씨. 몰라. 다음 전쟁에 피해 안 갈 만큼 해. 알았지?
떠넘기시긴 알았어요. 그럼 이만.
"어야."
뚝.
가소희는 미간을 짚고 탄식을 뱉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 한복판에 재앙이 나타나다니, 헌터협회의 책임론을 피해갈 수는 없으리라.
"이래서 내가 책임지는 자리를 싫어한다니까 아무튼 들어가자, 시현아."
"앗 네에."
가소희와 나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