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마법소녀와 일각수 (10)
* * *
"술 마셨냐? 누가 누구 보고 일반인이라는 거야? 우리 비헌터 각성자께서는 이 상황에 대해 진술이나 해보시지?"
가소희는 섬뜩한 빛을 흘리는 총구를 노려보며 응수했다.
월왕구천의 검극이 까딱까딱 움직인다.
"으으음~ 글쎄요오오. 그냥 나쁜 놈들 좀 죽이는 게 뭐가 문제죠오오?"
"혹시 정신병 있니?"
"헤에 그런가봐요. 그만, 너무, 짜증이 나서어 히."
지금의 주하연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그녀가 말 끝을 작위적으로 길게 늘린다는 것은 어지간히 화가 난 상태라는 뜻.
여차하면 앞뒤 안 재고 달려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요오, 당신이니까 묻는 건데, 사람은 피떡이 되면 죽지 않나요오?"
"그러시겠지. 그게 왜?"
"왜, 가 아니에요 지그음, 이 놈들이이, 살아 있잖아요 총을 맞고도 살아 있잖아아아!!!! 예에!??"
콰득!
주하연이 바닥에서 꿈틀대는 다리 한 짝을 밟아 으깼다.
그럼에도, 발목 아래는 멈추지 않고 필사적으로 땅을 밀어내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헤헤. 그러니까 저느은, 얘들 좀 마저 죽이고 갈게요오."
"멍청아. 얘들은 여기에 영혼이 묶여 있어. 의미 없는 짓이야."
"그럼 육체를 완~전! 불태워서 날려버리면 되지 않겠나요오? 그보다 제가 하겠다는데 왜 이리 토를 다시죠? 언제부터내가하는일에너따위가태클을걸게되어있지??"
"쯧, 알아서 해라."
굳이 충돌해야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탓인지 가소희는 한 발짝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곳에 영혼이 묶인 사람들이 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불안정한 주하연을 건드려서까지 알아야 할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비등하게 대치하던 신수가 쓰러진 지금으로서는 주하연은 쉬이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판단을 한 가소희가 굿을 하든 떡을 치든 상관 않겠다는 의사를 취하며 몸을 돌리자, 주하연은 목을 모로 돌려 우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아~ 맞다. 거기 쬐꼬만 학생도 놓구 가시는 거죠?"
가소희를 따라 물러나려던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주하연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
만일 나 혼자 남겨지면 그녀에게 반으로 갈라져 시/현이 되는 것은 실로 시간문제였다.
"그건 안 돼. 망나니 같은 년아."
가소희는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바닥에서 조골석을 주워들었다.
뼈다귀는 깊게 충격을 받은 건지 달각대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하연은 모가지만 움직여 깊게 고개를 수그리더니, 곧 어깨를 떨며 웃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양보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하, 하하. 이 년이고 저 년이고 다들 날 개무시한단 말이지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듦과 동시에, 기관단총의 총구가 기이하게 백열하기 시작했다.
응집되는 마력의 양이 심상치 않다.
'무슨!'
총구에 맺힌 백마력이 작살의 형상을 이루었다.
순간, 코 끝에 복사꽃이 스쳤다
까앙—!!
"안 된다고 했지. 씨발련아."
콰과광—!!!!
혼검기에 둘러싸인 월왕구천의 검날이 눈앞에 멈춰 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만 움직여 내게 날아온 탄환을 쳐낸 가소희.
월왕구천에 맞고 빗나간 탄환은 뒤늦게 천장을 터트리며 파편을 흩뿌렸다.
여름철 장마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시멘트 조각과 금속 쪼가리.
주하연이 그 속에서 마법봉을 잡아 비틀었다.
"달라고 했잖아요. 그 수상한 친구."
"넌 어렸을 때 도덕 안 배웠냐? 하나 뿐인 제자를 사지로 내몰아 죽이는 스승이 어디 있어?"
"도덕도 안 배웠다라 하흐, 그 도덕 선생이란 놈도 절 개무시하곤 했죠 나를 늘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어. 그토록 도와달라 했건만."
뿌득, 뿌득
그녀의 손아귀 속에서 부러질듯 휘어지는 마법봉.
급속히 냉각되는 분위기 속에서 마법봉에 몇 번 힘을 주던 손가락이 별안간 턱 놓이자, 억세게 휘어 있던 마법봉이 긴 장봉으로, 채찍으로 변하며 가소희에게 쇄도했다.
길게 늘어나며 천장과 벽, 바닥을 공평하게 쓸어 부수는 채찍.
무검희는 자연스레 발길을 내디디며 한 바퀴 스르르 돌았다.
그녀의 곁에 꽃이 피었다.
내 것과는 다른 진짜 개화?花가 백색 채찍을 자비 없이 쳐냈다.
채찍은 혼검기의 모양을 따라 휘영청 곡선을 그리며 힘을 위로 흘려보냈다.
분홍빛 검기가 걸레짝이 된 천장을 마저 무너트렸다.
"넘기라고 했어, 무검희! 내 마법봉이 그쪽으로 자꾸 향하잖아—!!"
허공을 가른 채찍의 끝이 두근거리며 이쪽을 가리켰다.
이것저것 주워 먹은 것 좀 많기로서니 정말 너무한 일이다.
"먼저 올라가.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거 사망 플래그인 거 아시죠?"
"실없는 소리 하기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농담을 건넨 뒤 조골석을 넘겨 받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는 게 아닌데.
마침내 광증에 빠진 마법소녀가 발끝에서 백마력을 터트려 가소희에게 달려들었다.
가소희는 검을 빙글 돌리며 다른 초식으로 화답했다.
극적으로 회전하는 검이 허공에 꽃잎을 적셔 주하연의 돌진을 가로막았다.
지하감옥 전체를 장악한 복숭앗빛이 살의를 가지고 주하연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그 틈에 빠르게 부적을 적어내며 구멍을 노려봤다.
'올라가려면 칫. 약?으로 한 층씩 올라가는 게 최선인가?'
나는 날 수 없다.
가소희처럼 벽을 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하연처럼 압도적인 도약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느리지만 한 층씩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첫 번째 부적을 밟고 뛰어 올라 다 부서져가는 위층으로 올라왔다.
같은 방법으로 다시 다음 층으로 뛰어 올랐고, 또 다음 층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다섯 층 정도를 올랐을 무렵, 아래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도망쳐, 이 악마의 주구——!!!!!!"
추상같은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주하연이 나타났다.
마력 사출을 통해 순식간에 다섯층을 몸으로 부수고 나타난 것이다.
"야, 이"
"주우우욱—어어어어—라아아아아——!!!!!!!"
무리하게 가소희의 방해를 뚫고 온 건지 팔 두 짝이 사라져 있는 주하연이 오른발 뒤꿈치에서 백마력을 사출했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서 돌며 정수리에 발차기를 내리찍었다.
칠흑여제의 사랑이 뒤늦게 발동되었지만, 이 정도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좆됐다.'
꽁꽁 묶여 머리 위로 떨어지는 떨어지는 도끼날을 보는 기분이다.
맞으면 무조건 황천길 보장인 주하연의 발차기를 보며 시간의 가속을 느끼고 있을 때 즈음.
정신적인 클락업에 영향 받지 않은 투명한 손길이 슬쩍 가슴께를 스치고 사라졌다.
내 손에는 어느새 '푸른 갈기'가 쥐여져 있었다.
"!"
손길은 이내 지직대다 사라졌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브로치를 이마 위에 대고 번개를 일으켰다.
형상하는 것은 원형 방패.
응집된 정령왕의 푸른 번개가 창백한 음률을 흘리며 폭사했다.
물론 내 몸을 감싼 건 번개 뿐만이 아니었다.
[태양을 집어삼킨 뱀, 아포피스(ALL%)]
[남은 동력: 0%]
환상을 통해 구현된 칠흑여제의 권능 또한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아아아아아아!!!!!!"
이어지는 주하연의 악바리와 함께 가속이 끝났다.
그녀의 마력사출 발차기는 예정대로 내 머리 위를 노리고 떨어졌지만, 흘러나오는 어둠과 푸르게 빛나는 번개가 그 궤적을 가로막았다.
원시적인 공격에 신화적인 방어.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은 내가 바닥을 뚫고 도로 떨어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아아악!!!"
콰과과광!!!
머리가 터지는 건 면했지만 4번 타자의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처럼 볼품 없이 튕겨져나갔다.
기껏 다섯 층을 올라왔건만 도로 지하감옥 바닥에 처박혔다.
분홍색 꽃잎과 붉은 살점들이 나를 반겼다.
대놓고 힘을 써버렸네요. 이젠 진짜 싸움을 피할 수 없겠는데요.
= 으, 그런 거 신경쓰게 생겼어? 이렇게 된 거 지금 당장 영웅담을 울려야 해요! 이길 수 없는 적에게서 탈출하는 것도 영웅담의 일환이니 보정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쿨럭. 영웅담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금속 바닥을 뚫고 땅에 콱 처박힌 나는 피를 토하며 그리 읊조렸다.
애초에 지금은 영웅담을 울릴 상황이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등에 망토를 두르고 휘날려야 영웅담을 울릴 수 있건만, 전신이 골절을 비롯한 피해를 입은 지금으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시현아! 시현아!!"
주하연에 비해 기동성이 낮은 가소희가 뒤늦게 내게 도착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달려와 허겁지겁 날 들어 확인하더니, 곧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휴우, 이 멍청이! 그냥 내 뒤에 얌전히 있으라고 할 걸"
"케흑. 위, 위에"
날 껴안은 가소희의 위로 주하연이 날아든다.
마법봉을 왼팔 의수로 변신시킨 그녀는 예의 백마력 사출을 통해 속력을 증대시키며 주먹을 뒤로 당겼다.
가소희는 그에 맞춰 날 멀리 집어던지고는 월왕구천을 움직여 뻗어온 주먹을 흘려냈다.
"악! 아윽"
= 으, 진짜 어떻게 해요!? 뭐 안 부러진 데가 없잖아!!!
제가 그나마 많이 받아낸 거예요. 저딴 게 마법소녀라니, 정말 암울한 세상이군요.
= 으아, 진짜 어떡해!! 어떡해어떡해어떡해!!!!
셀레스티가 불안감에 난리를 피웠다.
파트너라 자칭한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정말 미안한가보다.
'이를 어쩐다 지키는 건 노리는 것보다 어려울 텐데.'
가소희와 주하연의 실력이 대등하다는 가정 하에, 불리한 건 가소희다.
팔 두 짝이 먼저 잘려나간 건 주하연이 되었지만 가소희는 부담하고 있는 게 너무 많으니.
나를 지키는 동시에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침염??으로 공간을 지탱하고 있다.
마력사출의 괴물인 주하연을 저지하는 동시에 뒤로는 기관단총 러브 앤 피스를 상대하고 있으니 여간 불리한 게 아니다.
'너무 불리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칠성에게도 주효한 변수가 될 수 있는 푸른 갈기는 이미 써버렸다.
몸이 개판인 지금은 발도술을 쓸 수도 없고, 주하연이 맞아줄 리도 없다.
칠성에게 일천한 장송곡 따위 전혀 통하지 않을 게 자명하거니와 부적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냥 가만히 죽은 척이라도 해야 되나.'
"끄으, 내, 내 인생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아이고오"
그때, 내 손에 어떻게든 붙어 있던 조골석이 덜덜거리며 일어났다.
오른팔과 목뼈, 머리만 어떻게든 붙어 있는 형국이었지만 어쨌든 살기는 살았다.
"여, 역시 죽은 놈 주제에 산 사람이랑 엮이는 게 아니었어 내 수십 년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크흑흑"
"죽은 척?"
"흑 뭐, 뭐요?"
무언가를 퍼뜩 떠올린 나는 서둘러 조골석의 상태를 살폈다.
재수 좋게도 팔이 붙어 있으니 어떻게든 움직이고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골석 씨. 당장 해줘야 할 일이 있는데요."
"싫어요! 싫습니다! 안 할 거예요! 저 그냥 여기서 살게요!!!"
"그래요? 지금 실랑이할 기운이 있으신가보죠?"
떨리는 손으로 부적이 든 홀스터를 짚자, 셀레스티가 눈치 좋게 부적을 꺼내 해골 앞에 팔랑거렸다.
조골석의 턱 뼈가 사정 없이 떨린다.
"뭐, 뭐, 뭘 원하십니까?"
"후우. 그러니까"
나는 조골석에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속삭였다.
해골바가지는 부적의 공포에 젖어 고개를 딸그락거리며 내 말을 경청했다.
"알겠어요?"
"예, 예에!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적은 치우세요!"
셀레스티가 멋대로 내 손가락에 대고 움직여 만든 조악한 부적.
빼뚤하게 화火라 그려진 부적이 보라색으로 활활거렸다.
"좋아요. 그럼 가세요."
나는 조골석을 대충 곁으로 굴렸다.
정말 내 말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해보니까, 내 가장 큰 무기는 이거 같아."
= 뭔데요?
"보면 알아. 너도 눈치껏 행동해. 알았지?"
나는 팔을 겨우 움직여 셀레스티를 어깨 위로 올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야!!! 퓨어하트!!!"
검무를 추는 가소희를 주먹으로 쳐 날린 주하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흉흉한 시선이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금 외쳤다.
"나는!!!! 사실!!!! 마법소녀다!!!!"
나의 가장 큰 무기.
되도 않는 사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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