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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02화 (102/119)

〈 102화 〉 어스름 속 느긋한 산책 (2)

* * *

언데드는 쉬지 않는다.

지성이 없어 본능에 충실하고 몸은 부숴도 부숴도 결코 멈추는 법이 없으니.

이에 착안한 몇몇 네크로맨서는 이 언데드를 인력시장에 내놓을 생각을 했다.

근로계약서도, 식사도, 임금도, 심지어는 사대보험도 필요 없는 미친 노동력!

웬만한 D급 헌터보다 센 힘과 밤낮없이 일할 수 있는 지구력은 덤이다.

그렇게 인력 사업을 시작한 네크로맨서들은 곧 떼돈을 벌어들였다.

언데드는 전국의 모든 고용주가 바라 마지않는 요소를 모두 갖춘 이상적인 일꾼이었으니.

오랜 침체에 있던 건축업 분야가 간만에 활기를 띨 정도로 언데드 일꾼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

각성자라는 요소 외에 특출난 능력이 없어 공공근로 격으로 용역헌터를 뛰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그 일자리를 모두 잃고 말았다.

그들은 난데 없이 굴러들어온 시체들에게 일자리를 뺏긴 것에 분노했고, 헌터협회나 건축회사 곳곳을 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사회의 밑바닥 취급을 받던 그들에게 돌아온 건 냉대와 무시 뿐.

언데드에 의해 쓸모를 잃은 용역헌터들은 이에 격분해 한 빌딩의 건설현장을 습격, 현장에서 일하던 언데드를 싸그리 파괴해버린다.

일명 '워킹데드(Working Dead) 러다이트 운동'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후로 언데드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노동력으로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역으로 언데드의 무시무시한 효용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특별한 자원 없이 굴릴 수 있는 반영구적인 인력이란 그런 거다.

때문에 영원한 순회의 군단은 요새가 없으면 심히 상대하기 어렵다.

그들은 단순히 언데드가 모여다니는 패거리가 아닌, 말 그대로 군단이니.

벌떼, 혹은 개미떼처럼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유기적 군단.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진군을 멈추지 않고 겁에 질려 도망치지도 않는다.

'군단'이면서 '군체'라는 말이 어울리는 녀석들이다.

"그래서 성벽은 크게 믿을 게 못됩니다. 은을 발라놓긴 했지만 놈들이 그게 두려워서 성벽을 오르지 못할 놈들도 아니니까요. 아니면 평양성을 아예 해체하는 것도 녀석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로브의 옷자락을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마도공학자가 성수 스프링쿨러의 철판을 들어냈다.

파란색 마력석이 불안하게 떨며 급수관에 진동을 가하고 있었다.

붕괴하는 청마석의 진동으로 성수의 공명을 끌어내는 설계라나 뭐라나.

"그럼 공성전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아닌가요?"

"꼭 그렇지만도 않죠. 성벽이야 지키면 되는 거니까요. 평지에 전선을 세우는 것보다는 든든한 성벽이 있는 쪽이 수천 배는 낫습니다. 무엇보다 위에서 아래로 화력을 투사하는게 쉬워지니까요."

청마석에 마법막대를 갖다 대 상태를 확인한 공학자는 손을 들어 성벽을 주욱 훑었다.

성수 스프링쿨러부터 지옥불 대공포까지.

생각 외로 꽤 다양한 무기가 성벽을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다 배치해놓은 건가? 하긴, 몇 가지만 배치했다가 싹 카운터 당하는 것보단 나을지도.'

나는 아카데미 학생의 신분으로 성벽의 무기를 견학하고 있었다.

원래 성초은이 만든 흑백마력융합포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생각 외로 재미있는 게 많다.

뭐가 잘 먹힐지 모르니까 일단 다 끌고 와보자는 생각이었나보다.

"관리하는데 애 좀 먹으시겠네요? 이리도 많아서야 원."

"전 늘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아, 저기 흑백융합기관포가 있습니다."

공학자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푸른색 도료로 멋들어지게 칠해진 기관포가 있었다.

"저건 꽤 특이한 친구더군요. 이제껏 없던 새로운 타입의 무기입니다."

"구체적인 원리를 이해하시나요?"

"사실 자세한 원리는 모릅니다. 그 뭐시냐, 이번에 발표된 대발견을 응용한 무기라는 것만 알죠. 마력학보단 마도공학 쪽에 익숙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기관포의 사용법과 기계적 구동원리는 아는듯 능숙하게 기관포를 해체하는 공학자.

그 안에는 흑마력과 백마력이 담긴 압축용기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흑마력과 백마력을 합쳐 무질서한 순수마력으로 떨어트리고 그걸 포탄으로 쓰는 거군요.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강력한 양극화에너지로 총열과 냉각기를 돌리고 초열화약을 터트리는"

"오? 이것만 보고 이해하시는 겁니까?"

"네? 아,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강 대꾸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면 미국의 정령착취를 이용한 소총과 맞먹는 수준의 화력을 낼 수 있을 터였다.

저번에 설악에서 봤던 아비늑대를 쉽게 저지할 수 있을 정도?

이쪽은 기관포고 그쪽은 소총이라는 게 너무 크지만

'그거야 차츰 개선하면 될 일이지. 신자원이 발견되면 관련 지식을 넌지시 풀어봐야겠어.'

사실 미래에 있을 지식을 푸는 것은 내게 있어 무척 꺼림칙한 일이다.

괴물에게 맞설 기술이 발전하는 건 좋지만 우월에도 미친 트랜스휴머니즘 분파가 있는지라 섣불리 풀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당장 저번에 가소희를 습격한 녀석도 사이보그 기계촉수였잖은가.

기관포의 구조를 보고 쓸데 없는 감상에 빠진 나를 대단한 사람마냥 올려다보던 공학자가 기관포를 재조립했다.

"아무튼, 이 녀석은 적합테스트에서 꽤 높은 점수를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파괴력과 효율로는 만점을 받을 수도 있었다더군요. 그런데 몇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흑마력과 백마력을 수급하기 어렵다, 이런 거죠?"

"네, 뭐. 구하기도 쉽지 않은 흑마력과 백마력을 사용한다는 문제가 있죠. 하지만 그걸 씹어먹을 정도로 큰 결함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새삼 궁금해져서는 기관포를 쳐다봤다.

찬찬히 뜯어보다보니 문제가 하나 보였다.

"반동이 심하군요? 다른 기관포보다 작은데도 고정포대로 쓰는 걸 보면."

"대단하군요. 혹시 관련 학과에 다니십니까?"

"저 전투계인데요."

"예?"

당황한 공학자를 뒤로 하고 허리를 숙여 기관포 윗부분에 돋은 손잡이를 잡아봤다.

고정포대로 쓸 때는 잡을 일이 없는 손잡이다.

'들고 쓰는 거였구만. 무겁고 반동이 심해서 땅에 꽂아놨지만.'

물론 기관총도 아니고 기관포이니만큼 일반인이 들고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중량감을 보아하니 헌터가 들고 쓰는 용도로 만든 기관포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이걸 들고 쏠 수 있을 정도의 헌터라면 그냥 앞으로 나가 주먹을 휘두르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 그냥 땅에 박아 놓은 것이다.

전투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성초은의 사소한 실책이었다.

"이것 좀 풀어주시겠어요? 한 번 들어보게요."

"아, 알겠습니다."

공학자는 로브를 걷어부치고 연장을 뚝딱뚝딱 놀려 기관포를 포대에서 분리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기관포를 들어보았다.

"으 으윽!"

손잡이를 잡고 역도를 하듯 용을 쓰자 기관포가 포대에서 들려나왔다.

공학자는 아연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 진짜 전투계셨군요"

"으이익!!"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온 힘을 다한 끝에 기관포를 들고 사격자세까지 취하는데 성공했다.

허리춤에 감싸안듯이 오른팔을 감고 왼팔로 윗 손잡이를 잡아 지탱하는 모습.

어깨에 메는 끈이 없는지라 도저히 사격을 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2m짜리 기관포를 든 161cm 미소녀라 푸흐흐.

"푸하!"

나는 결국 기관포를 내던지듯 땅에 내려놓았다.

도저히 내 힘으론 쓸 수 없는 녀석이다.

주술을 사용해 힘을 끌어올리면 억지로 쓸 순 있겠지만 인대고 근육이고 다 박살나고 말겠지.

"엄청 무겁네요 그 여자는 뭐 이런 걸 만들었담."

"흠흠. 그래도 포탑처럼 굴려도 굉장한 위력을 자랑하는 친구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아깝다.

이걸 들고 전장을 누빌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 히아아아아ㅡ!!!

별 수 없이 아쉬움에 입을 다신 그때, 하얀색 잔영이 곁을 스쳤다.

도플러 효과와 함깨 길게 남아 사라진 울음소리는 분명 일각수의 것이었다.

"아하이구, 맙소사! 으각!"

사라지는 잔영과 함께 허연 뼈다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관성으로 바닥을 좌악 긁으며 떨어진 조골석은 예의 그 엄살을 피우려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퍼뜩 일어섰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그는 날 발견하고 빠르게 쏟아냈다.

"아이구! 주술사님! 오랜만입니다! 저 옷 좀 주십시오!!"

"화려하게 오셨네요. 근데 왜 옷이 필요해요?"

"저도 문명인 아닙니까! 저도 옷 안 입으면 부끄러움을 느낀다구요!! 이 반대편까지 비춰보이는 공허한 몸을 타인에게 낱낱이 보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공학자가 난데 없이 떨어져 주접을 떠는 스켈레톤을 보고 헛숨을 삼켰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무시하기도 뭣해서 내 코트를 벗어 던져줬다.

코트에 걸린 암기가 쩔럭였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주술사님!"

"우리 스승님께는 먼저 갔다 오셨어요?"

"물론입죠! 높으신 분들께 그동안 본 걸 싹 사뢰고 오는 길입니다!"

2주 전, 조골석은 유니콘을 타고 영원한 순회의 진영을 염탐하러 떠났다.

하도 안 돌아오길래 죽었나 싶었는데 전쟁이 5일 남은 지금에서야 돌아온 것이다.

"그, 그 괴물은?"

"케흠! 안녕하십니까. 뉴르공 학파의 수석마법사, 조골석입니다."

"아아, 뉴르공 학파! 잠시 실례했군요. 이토록 완벽한 변신술이라니! 뉴르공 학파의 마법사를 실물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조골석의 철저히 준비된 사칭에 공학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뉴르공 학파는 괴물로 둔갑하는 마법을 다루는 괴짜학파로 유명한 곳이다.

"근데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주술사 님?"

"저야 뭐. 성벽에 무기 좀 보고 다녔죠. 혹시 관심 있으세요?"

"오오! 무기라! 왠지 모르게 끌리는군요! 혹시 바닥에 이건 뭡니까?"

조골석이 바닥에 놓인 흑백융합기관포를 가리켰다.

"엄청 센 기관포요. 원래 들고 다니는 건데 너무 무겁고 반동이 심해서요."

"이런. 실패작이군요. 하지만 엄청 세다니, 뭔가 끓어오르는데요! 하나, 둘! 우얏차!"

말릴 새도 없이 조골석이 기관포를 들어올렸다.

워낙 골격이 장대하다보니 나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드는 모습이었다.

"오오! 근력이 강한 마법사시네요?"

"뭐야. 안 무거워요?"

"나름 묵직하긴 합니다. 그리고 뭔가 그리운 기분도 들고요."

전생에 군인이었던 영향이 남아있는 걸까.

그는 능숙하게 기관포를 들고 여러 동작을 취해보였다.

거대한 화기를 든 검은 코트의 해골이라니, 뭔가 멋진 건 나 뿐일까.

"쏴봐도 되겠습니까?"

"흐음. 뉴르공 학파의 수석마법사니 시범사격 정도는 괜찮겠죠. 성 밖으로 쏘셔야 합니다."

허락을 받은 조골석이 능숙하게 기관포를 조작하더니 성벽 너머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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