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어스름 속 느긋한 산책 (3)
* * *
사람은 죽어서 시체만을 남기는 것만은 아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사람은 죽어서 그의 역사를 남긴다.
하지만 세상엔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번듯한 묘비라도 제대로 남기면 다행이고 그마저도 남기지 못해 잊히는 이들도 있다.
그가 무슨 역경을 지나왔든, 생전에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든.
기록되지 못해 잊히는 자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래.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옛 시대의 영웅이다.
떨쳐올린 깃발은 모두의 희망이 되었고 번뜩이는 검날은 모두의 횃대가 되었다.
그가 가는 곳엔 승리와 개선만이 있을 뿐.
어떤 부정함도 그의 길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다.
그 끝에 있던 것은 장엄한 전투와 비참한 패배.
영웅은 영원한 순회에게 목숨을 잃었고, 그를 기억하던 이들도 영웅을 따라 한줌 핏물로 화했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 자신 뿐.
살점과 함께 떨어져나간 위명은 가끔씩 그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
신의주 부근.
옛 영웅은 평양성에서 기관포를 쏴재끼는 조골석을 응시했다.
새까만 안개 사이를 가로지르는 마법의 시선.
그는 비명을 지르는 기관을 제압하며 마법을 거두었다.
그의 모습은 얼핏 갑주를 두른 스켈레톤에 불과하다.
모든 역사를 잃은 그에게 있어선 마냥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고.
다만 그 스켈레톤이 영원한 순회의 일인군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누구도 일인군단을 앞에 두고 그딴 평가절하는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재미있게 노는군."
본진을 뽈뽈 쏘아다니며 언데드에게서 시계를 마구 갈취하던 웃긴 녀석.
그는 조골석이 첩자인 줄은 알았지만 굳이 그를 잡아다 상관에게 일러바치지는 않았다.
뒈져서도 나름의 목적을 갖고 활발히 움직이는 꼴이 꽤 볼만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얼빠진 해골이 부러웠다.
뒈져서도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는 까닭이다.
영원한 순회에게 무기력하게 묶여있는 그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니.
&@#… ■£×#&%%…!
팔뚝에 달린 마력기관이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옛 연인의 영혼과 심장이 담긴, 인위적인 마법구동장치.
세기의 대마법사였던 그녀는 이제 일인군단의 아티팩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도 만만찮게 웃긴 놈이긴 하지.'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재앙을 위해 연인의 영혼을 착취한다.
그럴싸한 비극도 못 되는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옛 영웅은 자신의 처지를 비웃으며 검날을 바닥에 끌었다.
탁한 광검이 흙바닥을 긁으며 검은 잔영을 남긴다.
마치 그림자만을 남기고 사라진 빛처럼.
알찬 뼈대는 남았지만 정작 남은 것은 허울 뿐인 그 영웅처럼.
영원한 순회의 제4군단장.
'흩어진 재'는 사라진 불꽃을 추억한다.
***
"영웅과 영웅담이 항상 일대일로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
= 그럼요! 글자수부터 다른데요.
"그런 소리를 하자는 게 아니라, 그… 영웅담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잖아. 내려오지 않는 영웅의 비사도 많고. 영웅담이라는 게 영웅의 행보를 그대로 받아적은 실록이 아니니까 말야."
기관포로 사격연습을 하는 조골석을 보며 망토를 슥슥 매만졌다.
셀레스티는 내 생뚱맞은 소리를 태연히 받아주었다.
= 그렇기야 하죠. 세상에 완벽한 영웅이 어디 있겠어요? 그 대단하다는 인공지능도 가끔씩 실수를 저지르는데 영웅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조금 의외인데."
늘 영웅다울 것을 강조하는 셀레스티다.
영웅담은 한치의 과장도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줄 알았건만.
= 엣헴! 사실 영웅님의 말이 맞아요. 영웅담은 말 그대로 영웅의 이야기일 뿐이죠. 그게 사실이든 허구든 상관 없이 말이에요. 현실의 영웅과는 어떤 식으로든 동떨어져 있지 않겠어요?
"하긴… 애초에 영웅담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이 강한 이야기지."
옛 로마의 음유시인이 읊는 시구부터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웹소설까지.
모두 사람이 읽어주지 않으면 그 목적을 상실하는 것들이다.
= 물론 그렇게 평가절하할 건 아니에요! 영웅담은 그것 말고도 제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구요!
"무슨 역할이 있는데?"
= 영웅이 영웅담을 만들듯 영웅담도 영웅을 만들죠. 좋은 환경에 노출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영웅담을 읽고 두근거림을 배운 사람은 영웅스러운 사람이 되는 거거든요!
"그런가?"
= 그럼요! 그 영웅담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게 현실의 영웅을 만드는 건 똑같죠! 어쩌면 영웅보다 영웅담이 먼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영웅보다 영웅담이 먼저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이런 관계라는 거지?"
= 굳이 따지자면 살짝 다르기야 하죠. 영웅이 없어도 영웅담은 생기고, 영웅담이 없어도 영웅은 나오는 법이니까.
"뭔가 어렵네…"
= 에이. 학교 공부는 잘하면서.
셀레스티는 능청을 떨며 팔뚝을 슬슬 간지럽혔다.
= 그렇다고 해서 영웅님이 영웅이기를 포기해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영웅 없는 영웅담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영웅담 없는 영웅이 되는 게 나으니까!
"설마 영웅담의 악마가 옆에 있는데 영웅담 없는 영웅이 될 수 있을 리가."
나는 팔뚝을 간지럽히는 셀레스티를 붙잡아 멈추었다.
부드러운 재질이 손에 착 감긴다.
"여기 있었네."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맞이했다.
"천의린? 벌써 와 있었어?"
"그럼! 내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데. 제니스에서 어그로 끌면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어느 바보멍청이보다는 훨씬 부지런하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의린이 아니라 그녀를 끌고 온 스승이 성실한 거겠지만 굳이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그럼. 필기를 늘 말아먹는 의린 공주만큼 성실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렇지?"
"흥. 난 필요치 않은 일에 성실하지 않아!"
"이젠 정신승리의 단계로 갔구나."
당당하게 대답한 천의린이 내 곁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검은 레깅스에 하얀 탱크탑이라는 직관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손에 착용한 오픈핑거 글러브를 빼면 평소와 똑같은 차림새다.
"너는 집에 교복이랑 그것 밖에 옷이 없니? 너 그 차림새로 싸우면 많이 다칠 텐데."
"갑주를 입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신성투사에게 단단한 옷 따위 사치일 뿐이지! 그러고 보니 너 그 코트가 사라졌다? 그 이상한 컨셉은 그만두기로 한 거야?"
"아니? 저 인간한테 잠깐 빌려줬는데?"
나는 하늘의 별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는 조골석을 가리켰다.
천의린은 기관포를 쏘는 코트 차림의 해골바가지를 보고 경악해서 벌떡 일어섰다.
누구라도 처음 보면 기겁할만한 광경이다.
"뭐야… 스켈레톤?! 저 새끼 뭐야, 저거!!"
"뉴르공 학파 수석 마법사.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말야."
경계태세를 취하던 천의린이 납득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뉴르공, 그 미친 수간충 새끼들. 너 그런 애들이랑 노니? 혹시 너도 혹시 괴물로 변해서 성행위를 하고 싶다든가?"
"그럴 리가 있냐. 내 취향의 마지노선은 몬무스까지야. 걱정 마."
그것도 사실 옛날 이야기지만, 뭐.
그보다 뉴르공 학파가 그렇게 인식이 안 좋단 말야?
'그래도 말하는 스켈레톤보다 미친 수간충 마법사가 낫겠지.'
…아닌가?
몰라.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너 요즘 되게 안정적이다? 옛날엔 걸핏하면 흥분하고 그랬잖아."
"네가 옛날에 해준 말 덕에 꽤 괜찮아졌지. 감정을 무시하니까 호르몬 제어가 한층 편해지더라고."
천의린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다시 앉았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고마움이 은연 중에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에이. 딱히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어. 나 없었어도 네가 어련히 잘 익혔을 건데 뭘…"
"고, 고마워하는 거 아니거든. 멋대로 겸양떨지 마."
"안 고맙다고?"
"아니아니! 안 고맙다는 건 아니고…"
천의린이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드디어 독불장군 천의린이 남의 기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솔직하지 못한 면은 많은 것 같지만.
"옛날 천의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멍청한 맛이 있는 천의린이."
"뭐? 야! 멍청하긴 누가!"
나는 천의린의 항의를 흘려들으며 조골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조골석이 어떤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다.
나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니, 이분은 한 학파의 수석마법사라니까요!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닥치고 비켜라! 우리는 저 사악한 것의 민낯을 보고야 말 터이니!"
"아무리 교단이라지만… 으악!"
떡대 큰 신부가 공학자를 밀쳤다.
당황한듯 턱뼈를 벌리고 있던 조골석이 기관포를 들쳐메고 교인들을 마주했다.
"그, 무슨 일입니까?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혹시 뉴르공 학파의 마법사 되시오?"
"으음…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신부가 조용히 빛나는 수갑을 들어올렸다.
누가 봐도 불길해보이는 녀석이다.
"성자께서 명령하신 바가 있소. 당신이 진짜 인간인지 아닌지 알아보라는 명령이었지."
신부에게 들린 수갑을 본 천의린이 눈에 이채를 틔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