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어스름 속 느긋한 산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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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력과 개인의 신앙은 과학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신성력은 일단 이름만 신성력이지 실제로 종교적인 힘을 지닌 것은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신성력이 지니는 재창조와 치유의 특성 때문인지, 신성력 사용자는 신앙의 비율이 꽤나 높다.
정확히 말하면 신성력을 타고난 자가 종교에 귀의하는 비율이 높다고 해야겠지.
'교단'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종교단체다.
부상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거나, 때로는 제각기 성금을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종교단체.
온갖 종교를 아우르는 범종교단체답게 파벌싸움이 무척 심하긴 하나 외양으로만 보면 꽤 괜찮은 단체기는 하다.
덕분에 교단의 사회적 영향력은 꽤 큰 편이다.
"제, 제가 왜 그런 검사를 받아야 합니까? 제 마법이 무언가 죄가 되는 겁니까??"
"가소희 헌터의 요청으로 언데드 군단에 잠입했다고 하셨지."
"그렇습니다만"
"용감한 일을 하신 분께는 실례이오나, 성자께서는 당신을 크게 의심하고 계신다오. 혹시 우리가 보낸 첩자가 말하는 언데드로 바뀌어 돌아온 것이 아닌가, 그런 것 말이오. "
하지만 교단의 심대한 문제는 따로 있다.
그 중추가 성자 박하민이라는 것.
교단 내에서 아가페의 길드장과 교단의 대주교를 겸임하고 있는 박하민의 입지는 거의 옛 교황에 필적한다.
말하자면 박하민의 극성 빠돌이 팬덤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박하민의 빠돌이 신부는 당당하게 빛나는 수갑을 들이밀었다.
조골석은 그저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아, 아니! 뭐 그딴 말도 안 되는 그럼 그 성자란 인간은 그 무서운 아가 가소희 헌터를 의심한다는 소리입니까? 제가 바뀌었으면 그분께서 먼저 알아채셨겠죠!"
"허나 무검희는 아직 20대에 불과하지 않소? 그런 사고를 알아채지 못한다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한국 칠성이나 되어서 사람을 못 알아보면 그건 칠성이 아니라 칠푼이다.
그냥 되도 않는 핑계일 뿐이다.
"그대가 진정 결백하다면 순순히 수갑을 받으시오. 수갑을 찼을 때 이것이 자동으로 잠긴다면 그대는 괴물인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진정으로 결백한 것이오."
"아, 아니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다짜고짜 수갑을 채워버리는 법이 대체"
"이제 슬슬 지치는군. 성자께서 2 더하기 2가 5라면 그런 것이오!!! 그대가 무엇인데 감히 토를 다는 것인가!!!"
주변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변했다.
이곳에 모인 교인들은 모두 고만고만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이 일제히 쏘아내는 시선은 도저히 쉬이 넘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니.
진짜 언데드인 조골석은 새어나오는 신성력에 몸을 떠는 수 밖엔 없었다.
잠자코 상황을 보고 있던 나는 심각성을 느끼고 교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런 나보다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너희쥐좆만한 신성력 가지고 꺼드럭거리지 마."
어느새 신부의 뒤를 점한 천의린이었다.
"무슨!"
"그 수갑, 네가 먼저 차보는 건 어때?"
천의린이 강력한 신성력을 방출해 주변을 압도했다.
해봤자 C급 헌터 수준인 녀석들의 신성력은 천의린의 강력한 신성력에 맥도 못 추리고 사라졌다.
신부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조그만 소녀의 기세에 압도당한듯 침을 꿀꺽 삼켰다.
"수갑을 먼저 차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알기로는 그거 자동으로 잠기는 타입의 수갑일 텐데. 그보다 요즘 안 그런 류의 수갑이 어디 있냐? 수갑이 차면 잠겨야지, 그럼 차도 열려 있어야 하나?"
천의린은 신부의 손에서 수갑을 빼앗아 그의 손목에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갑은 아주 굳건하게 잠겨버렸다.
그녀는 필기 성적이 낮긴 해도 일단 헌터 잡는 헌터인 인퀴지터를 지망하는 만큼 기본적인 수갑에 대한 지식은 아주 빠삭하다.
"너네가 저 마법사를 어떻게 하려고 했든 간에이건 정정당당한 방식이 아닌 것 같은데, 좆같은 새끼야?"
천의린이 주먹을 쥐자,그녀의 손에 째릿한 빛이 서렸다.
정정당당을 모토로 삼는 천의린 앞에서 개짓거리를 하려다 들킨 신부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잠깐! 우리는 교단에서 왔소! 그대도 신성력 사용자가 아니오! 지금 우리를 공격할 셈이오!"
"난 무신론자야, 이 씨발놈아!!!"
무신론자 신성투사가 신부의 명치에 별부수기를 날렸다.
신부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갔다.
"신부님!!!"
"무, 무슨 짓을!"
모여든 교인이 경악으로 술렁이자 천의린이 신성력을 풀며 크게 외쳤다.
"너네도 다 꺼져!!! 너넨 저 비열한 새끼가 그 지랄을 한 걸 보고도 신부님 소리가 나오냐?!!"
간만에 짜증이 난 천의린이 미간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나는 그녀의 등을 툭툭 쳐서 말리고는 조골석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오오, 주술사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뉴르공 학파의 마법사라고 하면 별일 없을 거라면서요!"
"그런 민감한 얘기는 좀 조용히 하면 안 돼요? 의린아! 마음 쓸 것 없어! 그냥 냅두고 가자!"
내 목소리에 천의린이 숨을 고르고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이게 분노조절이 잘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하여간 교단 저 새끼들 어휴. 마법사 아저씨! 괜찮아요?"
"저 말입니까? 네! 물론이죠! 멋진 아가씨 덕에 저는 아주 멀쩡합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만약 또 쟤들이 지랄하면 이거라도 보여주세요. 그래도 이 양반이 이름값이 있는지라 함부로는 못할 걸요."
천의린이 레깅스 주머니에서 구겨진 명함을 꺼내 조골석에게 건네줬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광광권?光?이라는 이명이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이곳에도 와 있을, 천의린의 스승이다.
"그 인간이 교단의 높으신 분이라는데 저는 잘 몰라요. 그 사람이 와서 그거 어디서 났냐고 하면 느그 제자 천의린이 줬다고 하세요. 아시겠죠?"
"아하,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멋진 아가씨! 나중에 돈 생기면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하지요!"
"됐어요. 해골성애자 마법사랑 밥먹기는 싫어서."
천의린은 쿨하게 내뱉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은 부덕한 신부를 부축하는 교인들의 뒷모습에 박혀 있었다.
"네 스승님이 교단에 계시다고?"
"어. 그런데 오해하지마. 난 교단이 싫어."
"왜? 원래부터 싫어했어?"
"별 이유 없어. 스승이란 놈이 나한테 자꾸 교단 가입을 권유하거든."
"아."
천의린은 종교의 문제로 스승과 수없는 마찰을 겪고 있다.
루트에 따라서는 사제관계가 파국을 맞을 정도로 극적인 갈등.
기왕이면 둘의 관계가 좋았으면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서 그냥 두기로 했다.
"으음 그것만 빼면 어때? 좋은 분이셔?"
"몰라. 나쁜 인간은 아닌데 그놈의 성자 타령은 좀 안 하면 좋겠어."
지금의 관계도 썩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하여간 이래서 박하민이 문제다.
이 사건도 그렇고 도움되는 곳이 어째 단 한 곳도 없어.
'그러고 보니 박하민아무래도 칠성회의 때 마찰이 있던 것 같은데.'
같은 칠성이라도 모두 친한 관계에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하르미아는 칠흑여제를 죽인 검성을 매우 꺼려하고, 가소희는 뭐든지 제멋대로 정의잣대를 내세우는 주하연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주하연이 마법소녀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가소희에게 이를 가는 것은 당연하고 말이다.
그 중에서도, 속이 새까만 박하민은 친한 관계 따위 없어 칠성 모두에게 의심을 사고 있는 녀석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칠성회의에서 가소희가 조골석의 증언을 이용해 박하민에게 무언가 불리한 것을 요구한 모양이고, 이에 불만을 품은 박하민은 애꿎은 조골석을 언데드로 몰아 무언가 반격을 하려던 것 같다.
그 상황에 나와 천의린이 없었다면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 되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스승님이나 이모님이 오면 물어봐야겠다.'
어딜 어른의 일에 끼어드냐고 할 분들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다.
특히 가소희라면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하소연하면서 술술 불지 않을까.
"아, 맞아 나 이제 가야 되네. 저녁 때 됐다고 스승 놈한테 문자 왔거든."
천의린이 휴대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스승한테 스승 놈이라니. 스승이 무슨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앞으로는 우리 예쁜 스승님에게 더욱 더 예우를 갖춰야겠다.
소희 언니 최고!
"나 이제 갈게. 마법사님도 안녕히 계세요."
"네? 저 여기 안 있을 건데요?"
"골석 씨"
"에흐. 농담입니다, 농담! 안녕히 가십쇼!"
천의린이 천막지구가 있는 내성 쪽으로 걸어 사라졌다.
시간은 아직 7시 언저리.
어스름은 지지 않았다.
***
"교단에서 재밌는 짓을 하던데요, 스승님."
천막 앞 모닥불.
천의린이 그녀의 스승, 광광권 진경식을 노려봤다.
"그럼.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아가페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손을 걷어붙이고 최전선에 자원하다니, 정말 재미있지 않니. 이 참에 너도 우리와 함께하면 좋을 텐데."
"제가 그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란 건 아시잖아요?"
천의린은 진심으로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그녀의 스승은 늘 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개무시하고 좋은 부분을 비추려 애쓴다.
그 부정적인 이야기에 자신이 끼어있든 아니든 간에.
스승을 오랫동안 뵈어온 천의린은 그게 일종의 집착증과 비슷한 건 아닐까 늘 고민했다.
"최전선에 파견된 교단 소속 헌터들은 죄다 당신 관할 아래 놓여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그 일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흐흠~ 글쎄. 그분은 오늘도 신실하시더구나."
천의린이 놀리는듯이 내뱉는 말에 이를 갈았다.
말인 즉 오늘 박하민과 만난 일이 있다는 뜻.
이곳의 교단을 책임지는 진경식이 명령을 받고 신부 놈을 보낸 것이 틀림 없다.
"그딴 비열하고 추잡한 수를 아무 의심도 없이 수행했다고요? 그 마법사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시고요?"
"글쎄.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실눈에 안경을 낀 비리비리한 남성.
나약한 체구로도 강력하고 패도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새벽울림의 전승자이지만 겉모습으로만 보면 아주 간사해보이는 진경식이었다.
'개새끼가 실실 쪼개기는!'
천의린이 쇠젓가락을 휘었다.
사제관계의 파국이 앞당겨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