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어스름 속 느긋한 산책 (5)
* * *
한적한 곳에서 총이나 더 쏴보겠다는 조골석을 보내고 성벽을 계속 따라 걸었다.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니, 해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수평선 너머로 햇무리를 던져놓고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사실은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곧 첫번째 재앙과의 대전쟁이라니.
수많은 사람이 죽고 셀 수 없을 정도의 후유증을 남기겠지.
나름 아슬한 평화를 유지하던 사회도 헌터가 부족해지면서 혼란기에 접어들 거다.
"뭐 어쩌겠어. 할일을 하는 거지."
= 그럼요!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해야죠! 그런데 갑자기 무슨 할일이요?
"전쟁 말야. 거기서 내 할일을 해야하지 않겠어?"
= 아, 전쟁 말이죠. 적을 수없이 쓰러트리는 것도 영웅담의 일환이죠! 그런데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저는 숭고하게 희생하는 호구 같은 영웅보다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극복하고 어떻게든 살아돌아오는 영웅을 훨씬 좋아하니까요! 대표적으로 삼국지의 조운이 있죠!
"내가 조운 같은 사내는 아니지 않니?"
= 그쵸. 영웅님은 조운도 아니고 사내도 아니긴 하지만은! 아무튼 생명보전이 제일의 할일이라는 것을 알아두세요!
설사 평양성을 주축으로 한 대동강 방어선이 깨지더라도 요새도시 서울이 남아있다.
어떻게든 영원한 순회는 격퇴될 것이며, 한반도에는 여전히 인류가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무정부상태직행 테크를 탄다.
서울이 아무리 단단하기로서니 영원한 순회 앞에서는 잘 만든 레고에 불과하니.
평양성이 뚫리면 인구 2500만의 서울이 완파되고 나서야 전쟁이 끝날 것이며, 국력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한국은 그대로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우리들이 얼마나 잘 싸워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인군단의 침투와 평양성 수비군이 관건이다.
영원한 순회의 별동대 역할을 하는 일인군단의 평양성 침입을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
침투한 일인군단을 평양성 수비군이 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둘이 대동강 방어선의 큰 변수로 작용할 터이다.
문제는 내성의 방어를 맡는 병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아카데미생과 기타 낮은 급수의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다.
그들을 앞으로 내모는 것은 전선의 심대한 결함을 불러오고 아까운 인명만 해칠 뿐이기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나, 일인군단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원작에서 나타난 일인군단의 침투 루트를 모조리 막고 소수정예 길드들을 내성에 남기는 것으로 최대한의 대비를 해놓긴 했으나 그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아카데미 학생들을 꼬라박아 막아야 한다는 거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막아야 한다는 거다.
쓰러트리는 건 바라지도 않고 어떻게든 칠성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게 될 지 안 될 지는 사실 잘 모르겠고.
뭘 걱정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마음 쓰지는 마세요. 당신은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드릴 테니까.
"아니… 뭘 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러면 내가 많이 슬플 것 같은데."
어머나? 후후, 로맨틱하셔라…
= 얼씨구…
내가 죽으면 칠흑여제의 사랑이 대신 깨져 흩어진다.
게임상에서야 그저 두번째 기회를 주는 능력이지만 이제 와서 칠흑여제를 그렇게 보내버리기엔 정을 너무 붙여버렸다.
이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칠흑여제의 사랑이 깨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셀레스티도 마찬가지고.'
그 둘 뿐만이 아니다.
가소희도, 하르미아도.
또 극정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 친구들도.
단 하나라도 죽게 두고 싶지 않다.
'…집중해야지.'
가만히 서서 성을 감싸흐르는 대동강을 덧없이 쳐다보던 그때, 돌연 주변에 어둠이 내리앉으며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암막커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말이다.
"흐익…?"
나는 깜짝 놀라 헛숨을 삼켰으나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드물게도, 칠흑여제는 이 상황에 오히려 아련한 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내가 드디어 죽을 때가 다 됐나?
흠흠! 시현아! 누구~게?
어둠 사이에서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서야 이 사건의 범인을 알아차렸다.
"이모님?"
주변을 둘러싼 암막이 흔들리며 딩동댕, 하는 실로폰 소리를 내었다.
"후후! 딩동댕~"
어둠이 흩어지며 시야가 밝아진다.
어느새 내 눈을 가리고 환상을 보여주고 있던 하르미아가 등 뒤에 서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가소희는 그 뒤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을 빼꼼 내보이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이모님!"
"응! 오랜만이네. 그동안 소희가 막 괴롭히진 않았고?"
"에이, 선배님.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그냥 걱정되니까 물어보는 거지. 딸아이를 혼자 등교시킨 엄마의 심정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자기 딸도 아니면서…"
하르미아는 개의치 않고 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손길이다.
"괴롭히기는요. 이래저래 신세 많이 지고 있는 걸요."
"후후. 누구 딸인지 말도 예쁘게 하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선배 딸인 줄 알겠어요."
"뭐, 혈연관계인데 뭐 어때. 내 피가 이분지 일 정도 섞여 있을 걸?"
"팔분지 일 아니에요?"
"그거야 가계도를 보기 나름이지. 그보다 소희야, 선배 하는 말에 자꾸 토 달래?"
가소희는 삐친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르미아는 장난이었다는듯 그녀의 머리를 콩 쳐준 뒤 손가락을 놀려 주변의 공간을 휘었다.
"뭐어. 그래,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그녀의 손짓에 따라 세차게 흐르던 대동강이 점점 위로 꺾이며 중력을 거스르는 역폭포가 된다.
사라져가는 햇무리는 저희들끼리 엮여 금환일식을 만들고, 여기저기 들려오는 포탑의 땅땅 망치소리는 교묘하게 엮여 오케스트라의 악곡으로 변한다.
내 곁에는 어느새 멋진 황금색 탁자가 놓여 있었다.
하르미아의 집무실에 있는 그것이다.
주변이 변하는 광경을 조용히 감상하던 가소희가 푹신한 침대를 마음대로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언제 봐도 멋지네요. 그런데 그 이상한 책상은 왜 소환하셨나요?"
"수수하니 좋지 않니?"
"앉아서 일하기는 좋겠네요."
회색의 바퀴 달린 돌돌이 의자에 앉은 하르미아가 탁자 앞으로 바퀴를 굴렸다.
위로 솟구쳐 오르는 대동강을 보던 나는 근처의 금빛 의자를 끌어 앉았다.
새삼 생각하지만 하르미아는 뭔가 번쩍이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다.
뭐 이리 금빛 밖에 없어.
"여기 너희 같은 애들만 오는 게 아니라서. 황금을 덕지덕지 발라놔야 다른 애들이 쫄거든."
"이모님… 되게느와르 보스 같네요."
"우리 언니는 이런 것 없이 늘 상대를 반 죽여 놓고 대화를 시작했어. 이 정도면 양반이야, 조카님."
지는…
칠흑여제가 조용히 툴툴거렸다.
"아무튼. 뭐라도 마실래? 역시 홍차겠지?"
"선배님은 홍차에 물 타서 주시잖아요. 제가 내올 테니 그건 참아주세요."
"묽게 마셔야 맛있지 않니? 그리고 네 건 오래 걸리잖니."
"에이, 그런 말은 하지 마시고. 우리 시현이를 부른 이유가 따로 있잖아요? 그 얘기부터 조금 하죠, 뭘."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듯, 가소희가 옷깃에서 다기를 재빠르게 내려놨다.
하르미아는 그 속도에 살짝 침울해하며 내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칠성회의를 한 건 알고 있지?"
"네. 알죠."
"으응. 그런데 그 일이 언급이 됐거든. 그 마법소녀랑 너랑 있던 일이."
주하연이 내게 악마의 주구니 뭐니 하면서 달려든 일이다.
그녀의 눈치를 보니 칠성 회의에 있어 중대한 일이라 언급된 게 아니라 그냥 감정싸움 도중 언급된 것 같다.
힘도 세고 재력도 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뭐 이리 싸운다냐.
"제 얘기가 어떻게 됐는데요?"
"아니, 뭐. 네가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고 별 중요한 내용도 아니니까 말은 않겠는데… 아무튼 박하민이 널 직접 만나보고 싶다 그러더라고. 왠진 모르겠는데."
"걔가 절 왜 만나요?"
"그러게. 주하연 말대로 진짜 악마의 주구일 수도 있고 이 상황에서 칠성끼리 오해를 안고 싸울 수도 없는 일이니까 자기가 직접 해결하겠다, 이런 마인드던데. 아무튼 그건 내가 소희랑 함께 정중히 거절했어."
"내 조카한테 개수작 부리면 건물 잔해에서 기어나온 아가페 전원을 십자가에 박아 동해에 던져버리겠어, 라고 말하셨죠 아마?"
"소희야. 쓸데 없는 말 말라니까. 그러는 너는 아예 칼부터 뽑아서 주하연이랑…"
"아, 아이! 알겠어요! 죄송해요!"
뭔진 몰라도 범상치 않은 대화가 오갔음에 틀림 없다.
저게 정말 한국 최강들이 맞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조골석이 성자에게 잡혀갈 뻔했어요."
"뭐? 그 뼈돌이가?"
나는 조골석에게 있었던 일을 낱낱히 고했다.
천의린이 그들을 쫓아낸 것까지 말이다.
가소희는 그 이야기에 기분이 확 나빠졌는지 눈썹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그 개새끼가 대놓고 증인을 건드려? 아주 막 나가는구나?"
"이름이 뼈돌이라서 골석이었니? 누구 집 개 같은 이름이긴 한데… 아무튼 시현이 너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우리가 하지 말랬다고 안 할 놈이 아니라서. 신성력 쓰는 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알았지?"
나는 박하민의 의도를 생각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물론 나도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년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
칠성회의가 끝난 뒤.
박하민은 으슥한 어딘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정말 아무도 몰랐습니까? 악마계약자가 새로 생겼는데 그걸 모르고 있는게 말이나 되나요?"
글쎄, 우리도 모른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겠냐!
저희도 몰라요. 적어도 서쪽 로엠에는 없는 걸요.
혹시 남쪽 로엠이 아닌가?
"지옥에서 무협지 찍는 놈들이 악마계약에 관심이 있을 리가."
박하민은 나무막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하르미아와 가소희라는 두 개의 원이 감싸돌고 있는 삼각형.
그 삼각형에는 '정시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조뼛국인지 뭔지 하는 놈은 못 잡았다고 했나. 쯧. 그 비실한 놈은 잘라버리던가 해야지.'
성자는 몸을 일으켰다.
감히 허락도 없이 악마와 계약을 맺은 악마계약자를 만나기 위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