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어스름 속 느긋한 산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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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순회의 군단은 총 여섯 개.
각 군단은 영원한 순회와 다섯 군단장이 직접 이끌며, 그 군단들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방어선을 무너트리는데 특화된 기갑군단부터 신출귀몰하게 상대의 심장부를 후려치는 일인군단까지.
나름 현대전의 교리를 갖춘 무리들이기 때문에 보통의 전술로는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공군의 역할을 하는 창공군단과 해군의 역할을 하는 벽해군단, 그리고 만능별동대의 역할을 하는 일인군단.
대언데드 결전요새인 평양성과 자연해자인 대동강을 끼고 있으니 기갑군단과 대륙군단의 공세는 어찌어찌 막아낼 수 있겠으나 저 셋이 전선에 변수를 만들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구축된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대륙군단의 물량에 한반도가 짓밟히는 것은 순식간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맡을 군단을 정했지. 나와 검성은 수가 가장 많은 대륙군단과 친위군단을 맡기로 했고, 소희와 패창은 그 파괴력을 살려 기갑군단을 막기로 했지."
"다른 칠성들은 어떤가요?"
"마법소녀는 창공군단, 동규는 벽해군단을 맡기로 했어. 사이비는 평양성에 대기하면서 성력결계를 펼쳐 일인군단을 상대하겠다 했고."
"성자가 자기 할일을 잘 해줄까요?"
밀크티 홍차를 홀짝인 하르미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적어도 이 나라가 망하게 두진 않겠지. 해외에 기반이 있는 놈도 아니고"
하르미아는 그리 생각하는듯 했지만 가소희의 의견은 다른 것 같았다.
"박하민의 기반은 해외가 아니라 로엠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저번 빌딩테러 때 아가페 중진 대부분이 사상을 당했는데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로엠으로 튀지 않을까요. 대놓고 설렁설렁은 못해도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울 것 같진 않은데요."
"그건 모르는 소리야. 대악마의 딸로서 말하는 건데, 악마계약자는 다페르헤이드에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발하는 거야. 악마계약자는 뜯어먹을 거 뜯어먹는 그런 가축 같은 개념으로 계약자를 두는 것만이 아니라 타 차원에 자신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매개체를 갖고 싶어서 계약자를 두는 거야. 그걸 그 녀석이 모르진 않을걸?"
글쎄.
하르미아의 말은 일견 타당해보이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지 않다.
박하민은 성자라는 사실, 그 자체로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니.
'우리가 악마의 힘을 빌리듯 놈들이 인간의 힘을 빌리는 것도 가능하니까.'
악마계약하면 무언가 악마가 힘을 주고 인간이 대가를 치르는 형태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꼭 그런 류의 계약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이 힘을 주고 악마가 대가를 치르는 형태의 역계약도 가능하고 서로에게 힘을 공유하는 평등조약도 가능하다.
박하민의 경우에는 강력한 악마 다수와 평등한 계약을 한 케이스다.
권능이나 마기를 비롯한 힘을 빌리면서 자신의 신성력을 내주기도 하는 그런 관계.
악마끼리의 싸움에서 박하민이 제공하는 강력한 신성력은 판을 뒤집는 조커의 역할을 해주니 그런 관계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전쟁이 끝나면 박하민 카르텔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겠지.
박하민과 계약한 악마들이 합심하여 만든 악마계약자의 비밀결사도 곧 등장할 터.
두 번째 재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놈들을 완전히 와해시켜야 하는데 이것도 참 골아픈 일이다.
나는 하르미아에게 박하민에 대한 사감을 함뿍 담아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성자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수비군을 그냥 고기방패로 던져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놈이잖아요?"
"그치? 우리 시현 제자도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차라리 열의 가득한 미친 마법소녀한테 평양성을 맡기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사이비 친구가 하늘에 뜬 놈들을 잘 잡는 것도 아니잖니. 게다가 신성결계까지 안정적으로 펼치려면 성으로 보호받는 쪽이 훨씬 안전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 마력펑펑 마법소녀보다는 성력빵빵 성자가 수성에 훨씬 더 유리하지 않겠니?"
"아니, 뭐. 그렇기야 한데요"
하르미아는 힘없이 한숨을 쉬며 찻잔을 내려놨다.
"나도 그 녀석한테 수성을 맡기기는 싫어. 그 난리통에 시현이를 잡아다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수성을 맡고 싶다니까. 그런데 그럴 수는 없잖니. 그건 소희 너도 마찬가지고."
환상을 다루는 하르미아와 공간장악력이 뛰어난 가소희가 전선방어에 나서지 않으면 대동강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터.
신뢰관계를 떠나 이번엔 박하민에게 수성을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다.
하르미아의 눈치를 본 가소희가 몸을 기울여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하아 시현아. 차라리 스승님 옆에 있을래? 이 스승님이 언데드 빌딩코끼리 스탬피드를 단칼에 뼛가루로 만드는 걸 직관하는 거야. 어때?"
"푸흐흐. 계백도 출전할 때 자기 일가족을 베고 나갔다는데 어째 스승님은 반대로 하시네요?"
"계백은 가족을 지킬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거고. 나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걸?"
"됐어요. 저 신경쓰다 눈먼 칼 맞고 죽을 일 있어요."
나는 어깨를 슬쩍 밀어올려 가소희의 머리를 떼어냈다.
그녀도 진심은 아니었는지 곧 배시시 웃으며 허리를 곧게 하고 앉았다.
하르미아는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환상파수꾼, 검성, 무검희, 패창은 지상을 맡고 퓨어하트는 공중을, 애시드라 티어즈는 강을 맡을 거고 성자는 수성을 맡는다는 걸로."
"으. 게임에서도 못해본 한국 칠성 올스타를 이런 대전쟁에서 체험하게 되다니"
"응? 한국 칠성 올스타 같은 게임도 있니?"
"그럼요. 한국이나 일본 쪽에 가면 격투계 게임이나 분재수집형 게임에 꽤 많아요. 죄다 제 검무를 검법과 마법으로 써갈겨 놓은 게임이라 문제긴 하지만요."
"푸흐흐. 그건 네가 정보통제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니니?"
"암만 그래도 주술인 걸 누구도 못 알아채면 어째요"
나는 두 칠성의 시시껄렁한 농담을 곰곰히 듣다가 물었다.
"그런데 무녀는요?"
"아, 무녀는"
질문을 들은 하르미아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공간 전체에 잊을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훗! 햣! 햣! 이 몸을 불렀느냐!
"어머, 히라 씨. 함부로 남의 결계를 깨고 남을 놀라게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요?"
자, 잠깐! 화내지 않는 것이다! 길 가다가 너무 강력한 결계가 있길래 궁금해서 그만 열심히 만져버린 것이다! 그대도 길 가다가 자기가 모르는 환상이 길바닥에 떡하니 놓여 있으면 궁금해서라도 열심히 뜯어보지 않겠느냐!
무녀가 변명했지만 하르미아는 자비가 없었다.
하르미아가 허공에 손아귀를 집어넣고 주욱 당기자 볼따구를 잡힌 무녀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볼을 꼬집힌 채 울상을 짓고 으으대는 것이 마치 철부지 초딩같은 꼴이다.
"으우우! 아푸니르으!"
"앞으로 그럴 건가요, 안 그럴 건가요?"
"아, 아 그르는 거시다아! 나, 나조오"
"에휴."
지킬지 안 지킬지 모를 약속을 받아낸 하르미아가 무녀의 볼을 놔주었다.
보기에는 웃긴 모습이지만 볼을 꼬집는데 들어간 악력은 실로 톤 단위에 육박하리라.
"흥!폭력훈타 같으니! 이 몸이 조금 잘났기로서니 볼을 막 꼬집는 게 당키나 한 것이냐!"
"한두 번 이랬으면 말도 않죠. 뵐 때마다 열심히 환상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시니."
의외로 하르미아와 무녀는 면식이 있는 건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무녀가 하르미아의 환상세계를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쌓은 면식이긴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대단하지 않느냐! 나는 한국 최강의 환상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훗햣햣!"
"선배님한테 들었는데 이거조금만 뒤틀어도 팡팡 울면서 내보내달라고 소리지른다며?"
"다, 닥치는 것이다, 분홍대가리!!! 애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 쓰겠느냐!!!"
"미안. 네가 우쭐대는 걸 보니까 입이 가려워서."
무녀가 얼굴을 화악 붉히고 볼을 부풀렸다.
아직은 주거침입 초짜인듯하다.
"아무튼 무녀님은 이번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맡으셨는데요?"
"흠흠! 나는 소방관이니라!"
"소방관?"
내가 아는 소방관이라면 불 끄는 소방관 밖에 없는데.
평양성이 잘 타는 성도 아니고 아유하 씩이나 되는 소방관이 굳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냥 비유적 의미야. 위급한 전선으로 달려가서 급한 불을 꺼주는 역할이라 소방관이라 부르는 거거든."
"아, 그런"
확실히 만능주술사인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역할이긴 하다.
"그럼 그 활동범위는 평양성 내부도 포함인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만일 평양성이 위험하면 내가 짠하고 나타나 불을 꺼주는 것이다! 물론 전쟁이란 게 그때그때 다르니 더 위급한 곳이 있거나, 그러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렇다면야 한결 마음이 놓인다.
다재다능하기 짝이 없는 무녀는 일인군단에게 압도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전력이니까.
가소희는 조금 더 편안한 표정이 된 나를 보며 무녀에게 찻잔을 밀어줬다.
"근데 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걸? 평양성에 위기가 생기더라도 그게 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있고 하니까 뭐든 해결해주리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그래도 어떻게 버티기만 하면 무녀님이 짠 나타나서 도와준다는 보장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가? 뭐, 모든 건 사이비 놈이 하기에 달려 있지 않겠어. 그 놈이 잘해주면 굳이 아유하가 달려가줄 필요도 없겠지."
사이비 놈이 하기에 달려 있다, 라.
글쎄? 내가 있고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있는데 과연 그럴까.
'믿는 구석이 하나 늘었는데 그 새끼한테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지.'
우선 놈을 만나서 의중을 떠본 뒤에 행동방침을 정하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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