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07화 (107/119)

〈 107화 〉 어스름 속 느긋한 산책 (7)

* * *

박하민을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가 어스륵한 주거구역 뒷골목에 거닐고 있으리란 사실을 아니까.

나는 둘 아니,셋과의 회동이 끝나자마자 주거구역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사실 주거구역이래봤자 마법으로 쌓아올린 벽돌 빌라 정도가 들어선 곳이기 때문에 뒷골목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공간이긴 했지만.

= 어우. 꽤 어둡네요. 좁고

"애초에 사람이 오래 살 걸 염두에 두고 만든 곳이 아니니까."

벽돌 빌라들은 약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빽빽히 늘어서 있었다.

제법 덩치가 큰 사람이라면 몸을 마구 구겨대며 지나가야 할 정도.

이 정도면 골목이 아니라 틈이라고 이야기해도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는 곳이다.

셀레스티는 횟가루가 떨어지는 벽을 슬쩍 훑어보다가 내게 걱정스레 물었다.

= 그런데 진짜로 만나실 거예요? 만나서 좋을 거 하등 없다고 보호자 두 분이 말하셨잖아요?

"보호자라니? 내 법적 보호자는 내 담임 선생님일 걸."

= 그야 법적으로는 고아니까 그런 거고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 나쁜 놈을 만나도 뭔가 해코지를 안 당할 자신이 있느냐고요!

­ 당신 성자에 대해 잘 모르지 않아요? 지하에 갇혀 있었다면서.

칠흑여제의 일침에 망토가 움찔했다.

= 엣헴! 사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러는 깜둥이, 넌 잘 알아?! 뭔데 아는 척이야!

­ 저도 모르죠. 제가 죽기 전에는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였을 텐데요. 그래도 그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는 알죠.

"뭔데요?"

칠흑여제는 말을 고르는듯 잠시 침묵했다.

= 다른 평가를 다 떼놓고 봐도 제가 생각하기에 성자는 엄청난 수완가일 거예요.

"수완가?"

= 네. 수완가요. 다중 악마계약은 비유하자면 중혼보다 훨씬 힘들거든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

확실히 박하민을 제외하면 다중악마계약자가 별로 없긴 하나 그 난이도에 대해 묘사된 바는 전혀 없다.

­ 다중계약이 뭐가 어려운데? 매커니즘으로 따지면 별 문제 없는데?

= 그야 그렇죠. 하지만 악마의 입장에서 성자와의 계약이 갖는 가치를 생각해보세요. 과연 다른 악마와 함부로 나눠도 될 정도의 가치인지.

나는 그 말에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계약으로 끌어낸 성자의 신성력은 대악마마저도 빈사상태에 빠트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함은 웬만한 고위악마는 빌려온 신성력 한 방으로 처치할 수 있다는 뜻.

비록 빌려온 자신마저 신성력에 구워지긴 하겠지만 그 정도의 힘이라면 다른 악마와 나누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이를 악 물고 독점하고 싶은 게 정상이지.

­ 당연히 성자와 계약한 악마는 성자가 다른 악마와 접촉하는 걸 기를 쓰고 막겠죠. 차원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교두보는 한정적인데 계약자로서는 악마가 그 교두보를 떡하니 막아버리면 별 도리가 없단 말이에요.

= 아아, 나도 그거 알아! 계약하면 외교권 박탈 비슷한 걸 할 수 있다고 학교에서 배웠어!

"그것 참 대한제국 생각나는 얘기네."

계약한 악마가 늘수록 그 방해는 점점 심화될 터.

그런데 박하민은 그 모든 방해를 뚫어내고 온갖 악마와 계약을 이루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야 실로 수완가가 맞다.

'사실 수완가가 아닌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선한 이미지로 여론을 잠식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고, 성직자 뿐인 아가페를 사대 길드로 키운 사람도 그고, 그것도 모자라 온 신성력 보유자를 모아 엮은 단체인 교단을 세운 것도 그다.

단순히 사이비 새끼, 좆같은 위선자 악마계약자 씨발창놈으로 생각할 게 아니란 말이다.

'어우,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섭네.'

요컨대 정치질의 달인이라는 뜻이 아닌가.

내 알량한 말솜씨로 그를 당해낼 수 있을 지가 문제인데.

악마 둘과 그런 대화를 하고 있자니, 어느샌가 내 그림자가 꽤 짙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은 빛이 강해졌을 때 뿐.

나는 그림자가 드리운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오. 꽤 빨리 눈치를 채시는군요. 하하!"

성법의를 입고 온화하게 웃는 청년.

성자 박하민이 허공을 딛고 서있었다.

'칠흑여제가 못 알아챈 걸 보니 은신의 권능을 썼구만.'

의도는 뻔하다.

기선제압이다.

이미 박하민이 오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나는 짐짓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성자는 내 태도를 보고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절 보고도 놀라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미 칠성은 수없이 만나봐서요. 길가다 성자를 만난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죠, 이제는."

"그런가요? 하하, 다들 저만 보면 깜짝 놀라서 말을 얼버무리곤 하는데 말이죠. 간만에 의외인 사람을 만나서 기쁘군요!"

박하민이 후광을 띄우고 청량하게 웃었다.

제 딴에는 내가 많이 놀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긴, 하르미아와 가소희와 만나고 오는 길인데다 조골석의 건도 있으니 보통이라면 패닉에 빠져야 정상이겠지만.

"무엇보다 당신은 제 예상을 훨씬 웃도는 의외의 인물이니 말입니다."

박하민은 내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수치심에 가슴을 가리며 홱 쏘아뱉었다.

"어딜 그렇게 봐요?"

"사실 부끄럽지만 그쪽의 가슴에 관심이 있어서 말입니다."

'씨벌새끼. 단어선정을 해도.'

누가 보면 가슴 이야기하는 줄 알겠다.

은연한 비열함이 묻어나오는 표정을 보아하니 노린 것이 틀림 없다.

정신을 차린 나는 외려 코웃음을 치며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쳤다.

"분당 열 장."

"뭐 이리 비쌉니까? 다른 아카데미생은 세 장 밖에 안 하더만."

"제 입이 조금 싸서. 제 상대가 성자였다는 걸 말하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은데."

"하! 당돌하시긴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쇼."

나는 빙그레 웃어보이고는 가슴골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작은 수리검을 집어던졌다.

카앙!

물론, 수리검은 성자의 이마에 아무런 상처도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여긴 그냥 토크샵이라서. 대화만 하고 나가줬으면 하는데요?"

"흐음. 다들 그렇게 시작하곤 하죠.종목 변경은 어떻습니까? 제가 첫 상대가 되어드릴 수 있다만."

"으음"

나는 잠시 주먹을 입에 대고 고민하는 척하다가, 숨겨놨던 대롱에 입을 대고 훅 불어 다트를 날렸다.

다트는 따각, 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꺾여나갔다.

"니애미."

"하하. 제 이명이 성자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법한 언행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시는 건 아니죠?"

"지금 몇 분 지났더라? 오빠 돈 많아?"

"현금은 별로 없는데 쳇. 알겠습니다."

박하민은 페이스를 가져오려는 걸 그만두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사실 퓨어하트가 회의에서 악마계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무검희의 제자라는 년이 사실 악마계약자라고, 싸우는 중에 분명히 악마의 힘이 깃든 갑주를 보았다고 하하. 성자로서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절 쫓아온 건가요?"

"하하, 쫓아오다니요. 제가 가려고 했는데 당신께서 이쪽으로 오신 거죠. 제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그런 거짓말을 하면 쓰십니까?"

얼씨구.

박하민은 내 얼척 없는 표정을 보고 만족한듯 입꼬리를 올렸다.

"뭐, 아무튼. 그 악마계약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당신을 찾으려고 한 겁니다. 제 감시를 뚫고 악마계약을 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 얼굴이라도 봐두고 여의치 않으면 조치를 취하자, 사실은 이런 마인드였거든요."

"."

"하하!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이제 와서 당신을 죽인다든지, 납치한다든지 그런 건 없을 테니까."

내가 정말 그 의외의 케이스가 아니었다면 납치감금은 기본이었을 터다.

가소희와 하르미아를 움직이는 카드로 쓰이지 않았을까?

박하민은 그런 나를 보며 짐짓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칠흑여제와 프라임워커의 계약자인 것을 진작에 알아냈다면그런 생각을 할 뿐입니다."

그가 내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본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다.

다름이 아니라 가슴 속에 박힌 칠흑여제를 본 것이다.

"칠흑여제와 프라임워커는 모두 한국에 마지막 행적을 남겼죠. 그렇다면 제 눈을 피하고 계약을 하신 것도 납득이 갑니다. 로엠을 통하지 않고 이곳에서 직접 관계를 맺은 거니까요."

"운이 좋았죠."

"제게는 아닙니다. 너무 늦게 찾은 탓에 당신이 이미 하르미아와 가소희에게 붙어버린 뒤니까 말이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편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박하민의 눈에는 진심으로 아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일찍 찾았다 해도 내가 그의 편이 될 일이 없었겠지만 착각을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프라임워커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찌보면 칠흑여제의 계약자가 나타났다는 것보다 훨씬 큰일이거든요."

"프라임워커의 인장 때문인가요?"

"아시는군요. 당장에 저걸 잡아서 인장을 되찾아오라는 소리가 아주 우렁우렁하거든요. 하하. 당신이 칠흑여제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이상 그럴 생각은 제게 추호도 없습니다만은"

셀레스티가 몸을 오소소 떨었다.

박하민과 계약한 악마 중에는 십이가문의 악마들이 많을 테니 셀레스티를 공격해 프라임워커의 인장을 얻어오길 바라는 녀석들도 많을 터였다.

실제로 박하민도 칠흑여제만 아니면 그리 하겠노라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나는 반쯤 의구심을 섞어 물었다.

"칠흑여제가 그렇게 두려운 존재인가요?"

그는 옅게 웃은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나직히 말했다.

"칠흑여제와 환상파수꾼은 로엠의 팔분지 일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표정 그대로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죠. 그녀의 복귀는 십일가문 십대악마로 굳어진 로엠의 판국을 완전히 으깨놓을 수 있는 소식이니까요."

무언가 더 말하지 않을까 싶던 박하민은 품에서 무슨 작은 수레바퀴 비슷한 것을 꺼내 내 앞에 던졌다.

피젯 스피너 정도의 크기를 한 수레바퀴는 신성력에 싸여 살포시 땅에 내려앉았다.

"이게 뭐죠?"

"나중에 적이 되면 한 번 쯤은 봐달라고 드리는 호의이기도 하고,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도발이기도 합니다. 그 꼬맹이 같은 무녀나 하 선배에게 가면 잘 알려주겠죠. 아니면 칠흑여제한테 물어보셔도 되고."

나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정보창을 켰다.

그 안에 적힌 글은 간만에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분쟁의 혼(S)]

­ 수레바퀴는 가장 간단히 나타낸 섭리입니다. 차원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다름이 아니라, 다페르헤이드와 로엠을 왕복할 수 있는 아티팩트다.

"."

"흠, 왠지 모르게 무서운 표정이시군요."

"이런 걸 왜 내게 주는 거지?"

"별 이유가 있습니까. 제 계약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당신이 로엠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하거든요. 범차원적 아가페랄까요? 하하!"

"자기 차원에도 별 관심 없는 주제에"

놈의 의중을 통 모르겠다.

박하민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섰다.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 재앙은 직무유기할 겁니다. 제가 없어도 자기 차원에 애정이 넘치시는 시현 학생이 알아서 막으시겠죠."

"지랄이원래 그럴 생각이었잖아?"

"하하하! 농담 같습니까? 참 다행이군요. 재밌으셨다면 앞으로도 만남을 자주 가져도 될까요?"

"앞으로는 우리 스승님을 대동해야겠어."

"그럼 무검희가 없을 때를 노려야겠군요. 제가 드린 건 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박하민은 신성력에 싸여 하늘을 날아 사라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만원권이 내 이마 위로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세보니 값은 제대로 치른 듯하다.

­ 불쾌한 놈이네요.

"앞으로는 초당 다섯 장으로 올려야겠어."

= 그런 위험한 발언 함부로 하지 말아주실래요

나는 돈을 주워담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