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09화 (109/119)

〈 109화 〉 진흙 속에 피어나는 (1)

* * *

다음날 새벽 6시.

태양이 뜨지 않았다.

"놈들이다아ㅡ!!!"

초계병이 외친 한 마디.

그와 함께 평양성의 성벽이 흔들렸다.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이 일어선 시체의 거병.

그것의 눈구멍으로 추정되는 구덩이 속에서 부풀어오른 살점이 튀어올랐다.

물리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물선을 그리며 여명이 오지 못한 하늘을 한가득 뒤엎는 시체의 소나기.

조선시대 신기전으로 쏘아올린듯한 그 살점들은 평양성 곳곳에 떨어지며 끔찍한 폭발을 일으켰다.

오지 않은 여명과 여섯 시를 가리키는 손목시계 사이에서 잠시 갈피를 잃은 헌터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악을 지르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의외로 도망치는 사람은 없었다.

"신성결계 펼치세요! 빨리!"

"보급캠프에서 은 가져와!! 녹여서 흘려보낸 뒤 굳힌다!!"

은으로 뒤덮인 성벽이 시독??으로 녹아가며 빛을 잃는다.

그에 맞선 헌터들이 각기 작은 우산을 꺼내듯 하늘을 향해 실드를 들어 펼치고, 흉하게 일그러진 성벽에 은을 녹여 흘려보낸 뒤 굳히기를 반복했다.

멀리서 보이는 평양성은 마치 폭염에 녹아내리는 치즈케이크 같은 모양.

대언데드 결전요새라고 보기엔 힘든 모양새다.

우두두두두두

성을 향한 공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이번엔 땅 전체가 울려온다.

옛 지구를 찍었다는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물소의 스탬피드와 비슷한

아니, 그딴 건 견주기도 아까울 정도의 진동.

차라리 시끄럽게 꽝꽝 울려대는 클럽의 우퍼와 비교해야 할 수준의 진동이 땅 전체에서 느껴져왔다.

"어, 으아"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 성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신병이 눈앞에 보인 광경에 도로 아연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땅은 온데간데 없고파도 아, 아니야.

흐, 흙먼지도 아니야. 날벌레도 아니야.

시체의 해일이쓰나미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르으으어어아아아아아악!!!!!!!

우리들의 순회는 계속된다ㅡ!!!!!

그르윽, 하하하하하하하하!!!!!!!

사람의 웃음소리와는 다른, 썩은 성대를 긁는 웃음소리.

그들이 일심동체로 웃음짓는 소리가 시꺼먼 하늘에 메아리친다.

초고층 빌딩 높이의 시체거병은 그냥 장난감이었다는듯.

대륙에 가득 찬 시체가 작은 반도에 넘쳐 흘러온다.

생자의 자그마한 영역으로 덮쳐온다.

"무슨"

명백히 다가오는 죽음에 실색한 신병이 해일을 우러르는 그때.

하늘이 살짝, 예쁘게 일그러진다.

"어머나?"

공간을 구부리고 등장한 하르미아가 살짝 손을 휘젓는다.

"장난질은."

세상을 분홍색과 보라색으로 물들이는 단호한 파장과 함께, 현실과 환상의 간격이 와르르 무너진다.

하르미아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하, 하하하하하하하!!!!!

금방이라도 평양성을 덮칠 것 같던 해일이 10km 밖으로 쭉 밀려난다.

죽음을 준비하던 신병은 영웅처럼 나타난 하르미아를 토끼눈으로 우르르 올려다봤다.

자연스레 폼을 잡다가 뒤늦게 그를 알아챈 하르미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엣흠, 과도한 관심은 자제해주세요? 안녕!"

부끄러움을 느낀 하르미아가 환상을 찢으며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남쪽으로부터 또다른 진동이 울려왔다.

두두두두두

남쪽에서 뭉게뭉게 퍼져오르는 흙먼지.

하르미아가 만든 몽환적인 세상이 그들의 도래와 함께 서서히 변한다.

쨍하니 내리쬐는 볕, 끝없이 펼쳐진 싱글싱글한 초원.

아직까지도 어안이 벙벙하기만한 신병은 어느새 풀밭의 시원한 내음이 자신의 코에 닿는 것을 느꼈다.

­ 아이아이아~ 아아ㅡ!!

­ 아이아이아~ 아아ㅡ!!

흥겨운 환호성과 함께 나타난 그들은.

별과 바람이 가득한 들판을 달리던 유목민족의 전사들이었다.

하르미아의 환상이 불러온, 역사의 제패자들.

어린아이 하나 남기지 않는 그들이 영원한 순회의 군세를 막기 위해 시공을 넘어 이 땅에 다다랐다.

"흐음."

그곳에서 무언가 2% 부족함을 느낀 하르미아가 살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게 낫겠네."

그녀가 손가락을 경쾌히 튕기자, 그들의 말이 모조리 이륜바이크로 바뀌었다.

그도 모자라서, 이륜바이크는 바퀴를 번쩍이며 서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호버바이크다.

"흐흐흐흐! 고맙소오ㅡ!"

"아이~ 하하하!!"

사이버펑크에나 나올 법한 탈것을 타고 하늘을 나는 초원의 유목민족.

그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체의 해일에 맞서 용맹히 달려들었다.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쓸어버리자ㅡ!!"

"호이오옷~!!! 야이!!!"

평양성의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정복왕의 외침과 함께.

세상의 첫번째 재앙이 시작되었다.

***

"선배님"

월왕구천을 든 가소희가 내리쬐는 햇발을 우러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전선은 이미 박살이 나고도 남았을 거다.

"긴장되세요?"

"아니? 전혀 아니거든."

"거짓말하시기는."

나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어진 가소희를 괜히 툭툭 건드렸다.

한국 칠성이니 헌터협회의 실세니 해도 결국엔 젊은 아가씨에 불과한 그녀다.

국운을 건 대전쟁이니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리라.

"괜찮아요. 설마 칠성이라고 긴장을 안 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아주 벌벌 떠는 줄 알겠다? 딱 기분 좋은 긴장, 그 정도야. 그보다 너는 아예 손까지 벌벌 떨고 있는데, 괜찮아?"

나는 망토에 물결이 일 정도로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잡아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괘, 괜찮거든요. 진짜예요."

"응, 물론이지! 누구 제자인데."

가소희가 내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그녀의 손은 전혀 떨리지 않고, 도리어 부드럽고 굳건하다.

딱 좋은 정도의 긴장이 맞나보다.

"이 전쟁이 끝나면 네게 말할 게 있어."

"그런 말은 너무 사망플래그 아니에요?"

"요즘은 클리셰 비틀기가 유행한다면서. 그런 말을 한 네가 죽어버리는 게 오히려 클리셰라던데?"

"뭐예요, 그게."

나는 그녀의 농담에 쿡쿡 웃음을 흘렸다.

덕분에 긴장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 아아아아, 전동 안마아아~

"그 정도로 떠는 건 아니거든."

= 네? 그치만 제 몸을 막 흔들었잖아요? 주름이 생길 정도로!

"착각이야."

나는 셀레스티를 등에 옮겨 매었다.

어차피 쓸 일이 생길 테니 괜히 손에 묶어놓지 말고 등에 매달아주는 게 옳은 선택이겠지.

"언제 봐도 신기한 아티팩트라니까. 반 잘라서 나도 주지 않으련?"

= 흥! 제 몸은 당신이 아니라 검성이 와도 못 자를 걸요?

"대악마의 비늘인가 뭐시기? 난 대악마 목도 잘라봤는데, 뭘."

= 거, 거짓말!

가소희는 믿기 싫음 말고ㅡ라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솔직히 나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아요. 만날 수만 있으면 대악마 모가지도 자를 분이시죠."

"못 만나봤을 것 같다고 비꼬는 것 같은데?"

"아니, 뭐. 딱히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가소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진짜 잘라본 거 아냐?

"대악마도 참수하는 이 스승님이 쉽사리 죽을 것 같니? 그것도 영원한 순회의 따까리인 기갑군단한테?"

"누가 뭐래요. 그냥 잘 싸우고 오세요. 우리 스승님."

"응, 오냐. 내 제자야."

하얀 두루마기를 바람에 휘날려보인 가소희가 바닥을 박차고 성 밖으로 뛰어올랐다.

나는 그 연분홍빛 잔상을 눈에 담으며 태도의 검병을 쓰다듬었다.

'기갑군단을 잘 막아주셔야 할 텐데.'

해일처럼 몰려오던 대륙군단은 하르미아가 막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다른 쪽은 꽤나 걱정이 된다.

당장 검성이 막고 있어야 할 시체거병의 폭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기껏 설치한 병기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칠성의 역할이 아주 막중함에도 벌써 구멍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당장은 기다려보죠. 애초에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 걸요.

"그렇기야 하지만 시체 비를 맞는 입장에서는 되게 좆같아서 말야."

쾅!

파스스

말하기 무섭게 내 옆으로 시체폭탄이 떨어졌다.

돌바닥이 시독에 허연 연기를 뿜으며 녹아버린다.

"이것 봐, 씨발."

= 어우. 무섭네요, 이건.

심지어 이건 단순한 산성폭탄도 아니다.

온갖 치명적인 역병이 들어가 있는 생화학 병기다.

이곳에 면역력이 높은 헌터만 있기에 망정이지 민간인이 가득한 서울이었다면 한두 명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시체에 불을 붙여 시독의 확산을 막은 뒤 본진으로 돌아왔다.

일단은 꼴에 내성이라고 당장의 싸움은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다.

재수없게도 일인군단을 맞아 싸운다는 점에서 내성 수비대가 좋은 보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랜만이군요."

박하민이 엮은 신성결계 안으로 들어가니 샬롯이 나를 반겨주었다.

실로 오랜만이다.

"뭐야, 기다리고 있던 거야?"

"이럴 때는 그냥 반가워, 한 마디면 됩니다. 아는 사람 좀 기다린 게 뭐 어떻다고."

"드디어 네가 나를 친구라고 해주는구나."

"멋대로 오해하시긴"

샬롯은 가만히 앉아 활을 가다듬고 있었다.

궁수에게 있어서 활 손질이란 밥 먹고 차 마시는 일과 같은 것.

그녀의 손길은 일말의 떨림도 없었다.

"넌 긴장되지 않아?"

"긴장 말입니까? 글쎄요. 활 쏘는 사람이 긴장을 함부로 해서 씁니까. 혹시 떨리십니까?"

나는 가소희에게 했던 것처럼 허세를 부릴까 하다가 그녀의 눈을 보고 그만두었다.

"응."

"왜요?"

"여기서 지면 나만 죽는 게 아니잖아."

대동강 방어선이 뚫리더라도 서울에서는 막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때문에 모두가 죽는다.

사실상 인류의 명운을 건 싸움이 아니던가.

"당신만 죽는 건 괜찮고요?"

"그것도 안 괜찮지. 나 아니면 누가 세상을 구하겠어."

"망토를 달고 다니시더니 요즘 영웅놀이에 빠지셨나봅니다?"

"믿기 싫음 말든가."

샬롯은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망토를 쭉쭉 당기며 토라진 체를 했다.

"농담입니다. 삐치지 마십시오."

"흥."

"참"

샬롯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장하게 말했다.

"정시현 부반장님."

"예, 샬롯 스털링 반장님."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쉬운 일?

뭔가 철학적인 질문인가?

"샬롯 바보털 잡아당기기?"

"그, 그게 무슨 그거 아닙니다."

손빗질을 해서 바보털을 누른 샬롯이 아주 진지하게, 그러나 얼굴을 붉히고 입을 열었다.

"벌집 들쑤시기."

"응?"

"벌집을 들쑤시면 벌에게 쏘이지(So easy)."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얼척이 없어서 헛웃음을 짓자 샬롯은 진지한 표정 그대로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버렸다.

쏘이지보다 샬롯이 더 웃기다.

"푸흣,그게 그게 대체 무슨 드립이야?"

"긴장되신다길래."

볼이 빨개진 샬롯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한 말장난이었나보지.

"풋 흐흐 벌한테 쏘이지"

아닌 것 같다.

자기가 드립치고 자기가 웃는 거야, 지금?

'머릿속에서 저런 생각을 수시로 하는데 긴장이 될 리가 있나'

하긴, 영혼의 형태부터가 꽃밭인데 뭘 더 바랄까.

덕분에 긴장은 다 풀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