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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10화 (110/119)

〈 110화 〉 진흙 속에 피어나는 (2)

* * *

전쟁사에 있어서 '성'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진지 오래다.

투석기나 충차 따위보다 훨씬 강력하고 간편한 대포가 전장에 등장하면서 성의 굳건함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괴물과 각성자가 나타난 현대에 와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여전히 성은 잘 쌓아올린 돌무더기 정도의 내구도를 가졌을 뿐이나, 이는 마법의 보조가 있다면 충분히 덮을 수 있는 단점이다.

벽에 내구강화 마법진을 바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것 뿐이라면 성은 여전히 단단한 쓰레기일 뿐이다.

현대의 성이 하는 주역할은 보호가 아니니.

오늘날에 성이 제공하는 이점은 세 가지다.

첫째로, 성은 높이의 우위를 제공한다.

높은 쪽이 낮은 쪽을 보다 잘 살필 수 있다는 것은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

군세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전쟁에서 적의 움직임을 꿰뚫어보는 것이 얼마나 큰 이점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둘째로, 성은 구역화의 역할을 한다.

비록 종잇장 돌벽이라 할지라도 성벽은 외부와 내부를 단호히 나누는 구조물이다.

덕분에 수비군의 안정감을 크게 올릴 수 있고 아군과 적군의 영역이 딱딱 정해져 있으므로 전선배치 등 괜한 곳에 마음 쓸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마지막으로, 성은 그 자체로 뛰어난 고정포대다.

높은 곳을 차지한 고화력 병기들이 성벽 안에 옹기종기 들어앉아 적을 겨누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고정포대.

그래. 옛날의 그 금강불괴의 요새 같은 이미지보다는 하나의 흉악한 공격진지에 가까운 것이다.

"계속 요격해라!!!"

수석 마법사의 말에 따라 포탑이 불을 뿜는다.

성 위로 날아들던 언데드 와이번 편대가 포탑의 공격에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

방금 저 놈들은 성 안으로 자폭좀비떼를 투하하는 위험한 놈들.

포탑이 제 일을 잘 해주지 않았다면 기백 명이 죽었을 위험한 순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의 숫자가 너무 많은데제공권을 빼앗기면 어떻게 해야 하죠?"

"포탑을 보호하면서 다른 포탑이 있는 쪽으로 이동할 거야. 화력병기와 마법사들을 모아 좁은 곳이나마 제공권을 되찾는 거지."

나와 샬롯은 그런 포탑 옆에 서 있다.

샬롯은 내 대답에 다시금 의문을 표했다.

"그게 저희 임무인 건 압니다만 그럼 평양성 일부의 제공권은 완전히 내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성벽의 일부도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할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포탑을 위시한 평양성의 화력병기는 상공의 적 뿐만 아니라 성에 접근하려는 지상의 적도 크게 견제를 하고 있으니.

그런 화력병기가 뒤로 빠지면 성벽이 함락되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연신 울려오는 포성을 아득히 들으면서 대답했다.

"평양성은 사중성이야. 외성에서 중성으로, 중성에서 내성으로, 내성에서 북성으로 퇴각을 세 번 할 수 있으니 포 코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마?"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성벽을 버리다니"

"위에서 날아오는 시체폭탄 맞으면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성벽이 모든 것을 받아주는 시대가 아니다.

아무리 신성결계를 펼친다고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격에는 취약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가능하면 저희가 포탑을 들고 도망쳐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음 합니다."

"나도."

나는 엄숙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수비를 맡는 곳은 내성이니, 우리가 물러나면 도망칠 곳은 좁디 좁은 북성 뿐이다.

"난 도망마저 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길 바라."

"그건 심히불길한 말이군요. 부정탑니다."

험난하기 짝이 없는 태평양 항로를 넘어 한국까지 온 샬롯.

이역만리에서 죽을 생각은 없는듯 손 안에서 오돌대는 정령을 꼭 껴안았다.

'일인군단이 내성을 노려오면 북성으로 후퇴할 수가 없을 텐데.'

침입 방법은 다양하기 짝이 없지만, 일인군단은 내성에 입성하자마자 주거구역의 빌라들을 박살내며 북성으로 통하는 길을 모조리 막아버린다.

어느 정도 힘이 있다면 잔해를 뚫고 갈 수는 있겠지만 당연히 포탑까지 챙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타의적 배수진이 형성되는 것이다.

'더럽지만 그렇게 도망쳐서도 안 되게 설계해놨지.'

도망치면 내성의 모두가 짤없이 죽는다.

적어도 무녀가 올 때까지는 직접 나서서 버텨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만든 토템이 아니었던가.

"너네 나라엔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지?"

"있죠. 정확히 말하면 미국만의 관용구는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엔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비슷한 격언이 있더군요."

그게 격언이라고 할 정도인가.

'아무튼 내 침묵토템이 빛을 발할 시간이야.'

나는 등에 매인 침묵토템에서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

일인군단.

흔한 언데드 하나로 위장한 그는 파괴된 부벽루에서 성으로 잠입할 길을 찾고 있었다.

'좋지 않다. 당초 생각했던 공중은 견제가 심하고, 땅 밑도 누군가가 경보마법을 걸어놔서 힘들어. 심지어 투석기로 발사된 시체마저 신성력으로 확인작업을 하게 시키다니 이래서야 어렵겠군.'

물샐 틈도, 바늘로 찌를 틈도 없다.

얼핏 보기엔 한없이 허약해보이는 은빛 성이지만 꽤 대비가 되어 있는 성이었다.

하지만 침입 및 사보타주가 특기인 그에게는 그 마저도 뚫을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일인군단은 그 길로 벽해군단의 군단장을 찾아갔다.

"크크크, 죽은 거북을 빌리고 싶다고?"

"."

"알았다. 못할 것도 없지 저기에 많으니 아무거나 가져가라."

썩은 상어의 모습을 한 벽해군단장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포탄으로 쓰여야 할 새끼거북의 부패한 시체가 가득했다.

'짜기는.'

크면 클수록 좋지만 그는 벽해군단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당장 내준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따름.

그는 새끼거북의 속을 긁어내고 대동강의 상류로 이동했다.

세차게 흐르는 대동강의 물.

이미 수원지에 성물을 한가득 놓아둔 것인지 대동강 전체는 성수 비슷하게 변해 있었지만, 새끼거북의 껍질 속에 뼈를 낱낱히 흩어 넣은 그에게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

군단을 태운 등껍질이 대동강을 통해 흘러들어간다.

물론 물밑에도 감시의 시선이 철저한지라 일인군단은 무척 신중하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일인군단은 수일에 걸쳐 움직였다.

강물에 밀려 떼굴떼굴 밑바닥을 구를 때도 있었고, 바위 사이에 끼어 근 하루간 꿈쩍 않은 적도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성공적으로 평양성의 하수도를 거슬러 올라올 수 있었다.

등껍질 안에서 뼈를 달각거려 땅바닥 위로 올라온 일인군단.

여기가 어디인지는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샴풋물이 가득한 곳으로 헤엄쳐왔기에 목욕탕 쯤이 아닐까 생각하던 그였다.

"어? 이런 곳에 왜거북이 있지?"

"."

당황한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그는 조용히 보존해왔던 새끼거북의 눈을 구멍으로 내밀었다.

순진무구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체를 해주자, 여성은 조심히 등딱지를 들어올렸다.

하는 것을 보니 경계를 푼 게 아닐까 싶다.

"음 귀, 귀엽네. 일단 방 안에 넣어둘까."

일인군단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멍청한 여자가 잠에 들거나 자리를 비운 사이 등딱지를 벗고 파괴활동을 시작할 심산이었다.

여성은 등딱지를 조심히 들고 방으로 움직였다.

살금살금하는 게 새끼거북이 아주 마음에 든 게 틀림 없다.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샤워실에서 자기 방으로 가는 것 치고는 너무 오래 걷고 있다.

뭔가 흙바닥을 밟는 소리도 나고 말이다.

'숙소와 샤워실이 멀어서 그런 거겠지.'

죽은 거북이란 걸 들킬 수는 있겠지만 안에 언데드가 들어있으리란 상상은 못 할 터.

일인군단이 기세를 숨기는 실력은 그만큼 상당하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니, 천막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린아."

"왜, 채유하."

"이것 좀 격파해볼래?"

'뭐?'

일인군단은 당황해서 순간 등껍질을 부수고 나와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로 따지면 저들은 약 18세 언저리의 여성들에 불과하다.

이 등껍질을 격파한다 해서 자신이 상처 입을 일은 없으니, 저들이 몸을 등껍질을 부순 순간 주변을 확인하고 뼛조각을 날려 비명 지를 새도 없이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뭐냐, 그건? 럭키박스 같은 거야?"

"그건 아니고 네가 아는 가장 센 기술로 격파해줬으면 해. 들을 수도 있으니까 빨리!"

"뭘 들어? 이거 죽은 거 아냐? 이 자라 새끼 눈이 흐리멍덩한데."

그러면서도 진짜 격파준비를 하는 것인지 옅게 우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일인군단은 온 신경을 집중하고 둘을 죽여버릴 때를 기다렸다.

"마침 그 광신도 새끼 때문에 기분 좆같았는데 잘 됐네."

일인군단의 예민한 청력에 근육을 당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의린이 주먹에 별부수기의 성광을 담았다.

"하아아아ㅡ!!!!"

일인군단이 구멍 사이로 새는 빛을 보았다.

별부수기의 빛이 무방비한 일인군단에게 들이닥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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