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진흙 속에 피어나는 (3)
* * *
내성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민 포탑과 그 옆에 선 두 소녀.
나와 샬롯은 포탑에 기대 앉아 공중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평소답지 않게 온몸을 감싸쥐고 쪼그려 앉아 있던 샬롯이 무심하게 말을 건네왔다.
눈망울은 평소같이 똘망똘망한데 어째선지 눈가에는 짙은 다크써클이 내려와 있는게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또 이상한 농담하려고 그러지."
"아뇨. 제 꿈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게 남의 꿈 얘기인 거 알아?"
샬롯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이었죠."
"좋은 꿈 아냐? 근데 안색이 왜 그래?"
"기분 나쁜 꿈이었습니다. 듣기 싫으신 거 같으니까 간략하게만 말씀드릴게요. 제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유명한 카페에 들어갔는데"
"근데?"
"카페에서 착취당하던 정령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더군요."
"."
샬롯은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거기에다 대고 면박을 주기에도 뭣해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렇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꾼 거야?"
"글쎄요. 총기에 정령을 갈아넣는다는 게 참 기막혀서 그런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소희의 병문안 때 들었던 이야기가 많이 충격적이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령이 혁명을 일으킨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꿀 리가 없으니까.
'공산주의 정령 그럼 죄다 빨간 불의 정령이 되는 건가?'
조그마한 불의 정령이 원두 그라인더를 들고 카페에서 난동을 피우는 장면을 상상했다.
생각 외로 귀여운 것 같다.
'우리 빨간머리 수연이한테 줄 선물이 하나 떠오르는걸.'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으십니까?"
"인간세상에 정령왕을 다시 모셔오는 복벽주의 운동은 없었니?"
"비꼬시긴"
샬롯은 무릎을 껴안으며 몸을 오소소 떨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심히 불길하군요. 끔찍한 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봅니다."
"제발. 직감 좋은 인간이 그런 소릴 하면 빗나간 적이 없단 말야."
"무슨 일이 생기면 제 탓으로 돌릴 심산이십니까? 무슨 사람이 그렇습니까?"
샬롯이 반박하는 순간, 크게 꽈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의 천막이 터져나갔다.
스승과 갈라서고 아카데미 학생구역으로 이주해온 천의린이 묵고 있던 천막이다.
"너 때문이야."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나와 샬롯은 지체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천막의 프레임은 부서지다 말았는지, 천막이 마구 찢겨 있기는 했으나 완전히 폭삭 주저앉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날카롭게 찢겨나간 천막을 걷고 안에 들어갔다.
조명이 나간 천막 아래, 아슬히 빛을 밝히고 있는 천의린의 손이 눈에 띄었다.
"으윽"
천의린은 왠지 모르게 빛나는 손으로 눈을 감싸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뭔가 그녀의 눈가에 박혀 있었다.
족히 30cm는 될듯한 굵은 뼈다.
"어? 야, 야!! 무슨 일이야!! 괜찮아??"
"씨발 야!!!! 너 나한테 뭘 준 거야!!!!"
천의린이 샬롯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샬롯이 화들짝 놀라 헛숨을 들이키자 그제서야 뭔가 아닌 것을 깨달은 천의린이 손가락을 다시 오른쪽으로 돌렸다.
"저 미국인 말고 너, 너!!! 채유하!!!"
나는 고개를 돌려 천의린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뼛조각이 스친 건지 뺨에 상처가 난 채유하가 당황스레 뺨을 매만졌다.
"아니, 그게 저 등딱지 안에 뭔가 수상한 게 보여서 가져온 건데"
"그딴 말에 속을 줄 알아, 이 씨발련아!!!"
"으 보이는 게 약해보여서 너한테 가져온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진짜 미안해."
깨진 마력조각이 채유하의 발 아래에 굴렀다.
예상치 못하고 급하게 실드를 펼쳤다가 무언가에 의해 깨진 것이다.
샬롯이 눈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천의린을 진정시키는 사이, 나는 중앙에 깨진 등껍질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뼈는 단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탈출한 것이다.
"유하야. 이 안에서 뭔가 보였어?"
"그게 약한 사기가 안에 들어있는 걸 확인했거든 아무래도 숨어있는 언데드 같아서 의린이한테 가져온 건데"
모든 마력의 사랑을 받는 그녀라면 무언가 보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기척을 죽이는 솜씨가 너무 뛰어난 탓에 안에 있는 것의 자세한 정체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천의린에게 다가가 눈에 박힌 뼛조각을 쥐고 힘껏 뽑아내었다.
격통에 억누린 신음을 흘린 천의린이 나를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 손가락으로 눈을 푹 쑤셨다.
그녀가 손을 떼자, 그곳엔 새로운 눈이 서서히 재구성되고 있었다.
"씨, 발 기분 끝내주네"
"지저스"
"뭘 봐, 자연금발년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샬롯이 무서운 광경에 몸을 떨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천의린에게서 뽑아낸 뼈를 땅에 툭 던져놓았다.
잠시 부들대던 뼈는 별안간 둥실 뜨더니 하늘로 콱 솟구쳐 올랐다.
삽시간에 천막을 뚫고 날아가려는 뼈를 붙잡아 방향을 가늠했다.
인력의 방향은 내성의 중심지.
일인군단은 주거구역에 있다.
***
일인군단은 온몸에서 솟구치는 고통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설마 그 젊은 여자의 신성력이 그 정도일 줄이야.
자신의 신성저항까지 깨트리고 침투한 신성력에 경악해 둘을 한번에 끝내지도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실책이다.
"."
하지만 일인군단은 그까짓 공격에 한 번 당했다고 쓰러질 만큼 약하지 않다.
심지어 그는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해 본래 목표하던 적의 심층부까지 들어오는데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하늘에 대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곧, 마법구현기계가 비명을 지르며, 허연 연기를 퍽하고 내뿜었다.
마법의 신호탄이 평양성 위를 밝힌다.
"끝났군."
옛 영웅의 신호탄이 떠오르자.
하늘과 강에 시체들이 마주 떠올랐다.
***
신호가 떨어졌다.
하늘에 창공군단의 주력이 날아오른다.
"나는 것은 기어다니는 것을 잡아먹고 살지."
썩은 날개를 가진 용인이 시퍼런 혀를 늘어트렸다.
"죽어서도 예외가 아니야."
사룡이 떠오른다.
와이번 같은 허접한 짝퉁이 아니다.
로엠에서 건너온, 다페르헤이드의 생태파괴자.
악마의 일종인 용이다.
"날아올라라ㅡ!!!!"
양 날개의 크기만 해도 이미 평양성 전체와 견준다.
그 모습은 가히 생자의 종말.
벌써부터 절망하는 산 자들이 눈에 아른거린 군단장은 사룡 위에서 한껏 시시덕거렸다.
"아~흐하하하하하!!!! 다 죽여ㅡ!!!!"
사룡은 두 날개를 펼치고 평양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돌진해왔다.
하르미아가 만든 기마병들이 바이크를 부딪히며 저항했지만, 그깟 쬐끄만 바이크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하하하하!!!!"
창공군단의 군단장은 이런 상황을 즐겼다.
가만히 서있으나 도망치나 어차피 뒈지는 것들이 꼴에 막아보겠답시고 결연히 달려드는 꼴이, 그 최후가 참으로 우습고 볼만한 것이기에.
평양성이 꽤 커 그런 이들을 한 번에 눈에 담을 수 없음을 아쉬워한 군단장.
그녀는 정면에서 곧바로 날아오는 마법소녀를 보고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하하하! 네까짓게막아볼테냐?? 아흐하하하하하!!!"
마법소녀는 말없이 마법봉을 끌어당겼다.
마법봉은 장도리와 비슷한 워해머로 변했다.
"죽기 싫으면"
주하연이 허파에 숨을 꽉 채우고는, 한 번에 내뱉었다.
"비켜어어어어ㅡ!!!!!!!!!!"
백마력이 한데 모인다.
눈을 멀게할 정도로 맹목적이고 강력한 빛.
유성처럼 날아든 주하연의 일격이 사룡의 머리에 꽂혀들어갔다.
거대한 운동량을 가진 둘이 맞부딪히며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한다.
꼬리를 남기고 날아든 반딧불이와 성채만한 사룡이 부딪힌 결과는.
믿을 수 없게도, 반딧불이가 용을 저만치 날려버리는 것으로 승부가 났다.
"아그악!"
콰드드드득
사룡과 함께 땅 깊숙히 메다꽂힌 군단장.
그 충격파 속에서 혼절할 뻔한 그녀는 심히 당황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본 것은 태양.
옛날 소년만화의 주인공처럼, 주하연이 태양을 꽉 붙들어 들고 하늘에 서있다.
하르미아가 만든 초원의 태양을 힘으로 뜯어낸 주하연.
짧은 치마를 팔락거리며, 주하연이 사룡에게 태양을 냅다 집어던졌다.
"죽어어어어어어ㅡ!!!!!!"
광기가 억눌린 증오.
마법소녀가 품기에는 터무니 없는 감정이다.
군단장은 급히 사룡을 일으켜세웠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 않은 사룡은 재빠르게 태양에 맞서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래. 용이라면 빠질 수 없는 그것.
브레스다.
시체용의 아가미 비늘이 펄럭이며, 깊은 시독을 품은 브레스가 하늘로 쏘아진다.
주하연의 태양 원기옥에 맞선 애시드 브레스.
사룡이 뱉어낸 시독은 억눌린 분수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평양성을 괴롭혔다.
"으아악!!"
"개씹! 실드가 못 버틴다! 포탑은 버려!!"
애시드 브레스가 비처럼 내린다.
하늘에 수놓인 실드가 시독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평양성은 때아닌 산성비 피하기 게임판이 되었다.
"저 개년이 또 생각 없는 짓을!"
기갑군단과 맞서 싸우던 가소희가 하늘에 내리는 시독을 검막으로 베어넘겼다.
하르미아의 환상도 무한한 게 아닌 만큼, 시야확보를 위해 띄워놓은 태양을 마음대로 집어던진 건 말 그대로 트롤행위에 가까운 짓이다.
'이렇게 시독이 내리는데 박동규는 어디서 뭘하는 거야!'
한창 벽해군단과 맞서 싸우는 박동규를 원망한 가소희가 다시금 월왕구천을 빙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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