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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15화 (115/119)

〈 115화 〉 진흙 속에 피어나는 (7)

* * *

역경 없는 영웅담이 무슨 재미란 말인가.

무릇 영웅이라면 이 정도 고난은 웃으면서 넘길 줄 알아야 한다.

"아하하 으, 으악!!!"

잿빛 검격이 내 이마를 스쳐지나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같이 허접한 영웅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역경이다.

= 집중해요!

흑안개가 투기장의 빛을 모조리 가리웠다.

최소한의 적외선마저 흡수하는 칠흑 속에 작두처럼 내리치는 검격들

나를 응원하는 셀레스티의 목소리마저 흐릿해지자 마음 속에서 작은 두려움이 싹튼다.

'보이지 않잖아.'

먼저 시각을 빼앗겼다.

'셀레스티? 씹, 내 목소리도 사라졌어.'

검격의 움직임을 들을 청각도 빼앗겼으며,

'검격이 젠장! 놓쳤 아니야, 사라졌어?'

최소한의 풍압을 느낄 촉각마저 사라졌다.

영원한 순회.

그 끔찍한 재앙이 가진 본연의 힘은 죽음이나 소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흐림'에 가깝다.

시체를 일으키는 건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그렇게 생성한 언데드를 제뜻대로 다루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육신에는 영혼이 거주하고, 영혼은 떠나갈 때 그 흔적을 남긴다.

아무리 영혼 없는 언데드라 한들 그것을 움직이는 건 그 몸에 남은 영혼의 흔적.

똑같아 보이는 언데드라 하더라도 그 속까지 몰개성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순회는 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 언데드들을 수억 단위로, 그것도 제 수족처럼 자유롭게 부린다.

비록 군단장의 지휘력을 빌렸다곤 하나 통상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숫자.

일반적인 네크로맨서가 한 번에 열을 부리는 게 한계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영원한 순회가 그리 많은 언데드를 다루는 비결은 생각 외로 간단하다.

그의 힘으로 언데드의 개성을 흐려버리면 그 수가 몇이든 제멋대로 부릴 수가 있는 것이다.

'놈의 본질은 흐림 젠장! 검이 깨진 걸 그렇게 활용할 줄이야!'

영웅담의 힘이 직감적인 경고를 보내온다.

나는 다 부서져가는 송곳니 학살자를 들어 검격 하나를 어찌어찌 막아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영웅담의 직감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

직감에 의존해서도 검격을 다 피할 수는 없던지라 몸 곳곳을 베이고 있다.

행동에 보정을 주는 영웅담의 권능연동까지 사용했는데도 말이다.

[느껴지는 통각을 집계 중!]

[검격의 위치 매핑 중 17% 완료.]

[통각 완전소실까지: 5.06초.]

[하르미아 시스템의 동력이 부족합니다! 예비동력으로 전환하지만, 영웅담과의 권능연동은 더이상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르미아 시스템이 통각을 이용해 검격의 위치를 연산하려 했지만 통각마저 점점 지워지며 무위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권능연동마저 꺼져버렸으니.

이제 믿을 건 영웅담의 빛이 보내오는 직감 뿐이다.

'광검이 이만큼 많은 흑안개를 내뿜고 있는 이상 놈은 오래공격할 수 없어.'

하지만 나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

셀레스티가 부여하는 영웅담의 힘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하르미아 시스템과 영웅담이 있다면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난관이지만, 감각을 흐리는 재앙의 힘이 변수가 된 것이다.

"으윽!"

왼팔에 찌릿한 직감이 돈다.

그냥 피하기에는 늦었으니 황동혼구에 저장된 포?를 터트려 몸을 통째로 비트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 결과, 무리하게 연속적인 운영을 한 황동혼구는 아주 박살이 나고 말았다.

'무섭다.'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수는 하나하나 줄어가는데.

보이기는 커녕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적의 공격은 끊이지를 않으니.

영웅담이 보내오는 직감은 고맙기보단 이제 슬슬 두려웠다.

정수리에 섬짓, 허리에 섬뜩, 견갑골부터 대퇴골까지 훤득.

느낄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 떨고 있다.

식은땀에 젖은 채로 두려워 뛰고 있다.

그럼에도.

­ 앞으로 세 보만.

살다보면 믿는 구석이 하나 정도는 있는 것이 아닌가.

­ 못 피하신 건 제가 막았어요. 이제 앞으로 두 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칠흑 속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는 친구가 하나 있지 않은가.

­ 저를 믿으세요. 앞으로 한 보.

귀가 아니라 심장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칠흑여제는 나 대신 길을 찾아주었다.

­ 이제 위로 살짝 고개를 들고.

한치 앞도 알 수 없지만.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이 돌아온다.

돌아왔다.

­ 지금.

발도.

먹먹한 손등 위로, 익숙한 바람이 꿈처럼 스친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하늘을 가른다.

빠르게 뽑힌 검이 빛을 발한다.

아직은 느낄 수 없다.

"죽어어어어어!!!!!"

그렇지만.

나의 칼이 완전히 휘둘러지면서

날쌘 바람이 돌아오고.

쇠의 울음이 돌아오고.

칼의 새빛이 돌아오니.

그야말로 천지개벽.

잃은 세상이 일순간에 돌아온 천지개벽.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단하군."

일인군단은 검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나의 발도술은 놈의 대검에 막혔으나.

방금의 강공은 광검의 봉인을 모조리 깨부숴버린 것이 틀림 없었다.

광검이 해골의 손에서 빛난다.

사악한 흑안개가 투기장에서 완전히 말소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온몸이 깊숙히 패인 칼집 투성이였다.

영웅담의 힘이 급소를 예술적으로 잘 비껴내준 모양이지만 이 정도면 당장 쓰러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원래라면 이미 죽었어야 한다.

이미 피가 상당량 소실되었으니까.

'영웅담이 꺼지면 죽겠구나.'

춥다.

부상을 자각하고 나니 서있는 것조차 힘들다.

영웅담의 희미한 빛은 곧 나의 생명을 뜻하는 것이리라.

"정시현!!!"

흑안개 속에서 수세를 펼치던 천의린이 힘겹게 다가왔다.

이미 시간을 끌리며 생명력을 상당히 소모했는지 움직임이 무척 불편하다.

"내가 곧!"

"늦었다."

벅차게 다리를 절던 천의린이 잿빛 폭발에 휩싸인다.

마침내 마법구현기계의 침묵을 풀어낸 일인군단이 왼팔을 겨누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아!!"

없는 신성력을 쥐어짜 가드를 펼친 천의린.

허나 그 빛은 이전과 달리 위태하기 짝이 없다.

"영웅이 아니라는 말은 취소하지. 그대들은 실로 영웅스러웠다."

이빨을 깨문 천의린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놈에게 달려든다.

일인군단은 그에 맞서 마법진을 펼칠 뿐이었다.

"한순간만 한순간만 빨랐다면 여기서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형언할 수 없는 초차원의 이합집산.

이해하기 힘든 마법진이 스치고, 재의 불기둥이 폭사했다.

지친 신성투사는 그에 휩쓸려 사라졌다.

천의린의 생사를 뜻하는 투기장이 일순간에 깨져나갔다.

"천!!"

"웃기지 않나. 이리도 쉬웠는데 말이다."

투기장이 사라지자 주변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미 내성을 버리고 북성으로 피신한 상태.

재수 없게도, 내 등 뒤에는 북성의 성문이 있었다.

"영웅의 패배로 딱 좋은 소재로군."

옛 영웅은 내게 마법진의 기수를 돌렸다.

나는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영웅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 요새의 성문이 뚫리다니."

안 된다.

막아야 한다.

피해서는 안 된다.

"내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마법을 되찾은 일인군단이 작게 말했다.

"이런 상황을 체스용어로 '포크'라고 부르더군."

놈의 손바닥 위에서 도형들이 춤춘다.

한순간에 천의린을 없애버린 파멸적인 마법.

그것이 나와 성문을 향해 사출되려 하고 있었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르미아 시스템의 동력은 바닥난지 오래이므로 칠흑여제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

푸른 갈기는 이미 써버린 지 오래고, 발도술 따위로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턱이 없다.

영웅담은 쥐꼬리만큼 남았으나 별 의미는 없다.

부적술도, 토템술도, 정령술도, 장송곡도, 죽은 척도, 암기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나는 간절하다.

이대로 성이 함락되게 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간절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신기하지.'

머릿속에서 아득한 목소리가 흐른다.

우리 멋진 스승님의 목소리다.

'이게 인간이 천사나 악마와 다른 점이야. 사람의 간절함은 모두 심장에서 나오거든.'

'간절함이 심장에서 나온다…'

분명히 저 북성의 지하궁전에서 나눴던 이야기다.

사람은 심장을 부수면 언데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였지.

'천사에게 날개가 있고 악마에게 뿔이 있다면 인간에겐 심장이 있어. 무언가 되고자 하는 소망과 가능성이 한 가슴 가득한 보따리…'

가소희의 말에 따라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토록 피가 빠져나갔건만, 내 심장은 아직 거세게 울리고 있다.

쥐어짤 피 대신 의지를, 흘려버린 피 대신 오기를.

'그래. 어쩌면 뇌보다 중요한 기관일 수 있겠네.'

심장.

머리는 낙담했지만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생을 향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아하."

나는 부서져가는 검을 꽉 쥐었다.

지금이라면 될지도 모른다.

혼이 심장을 따라 고동치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다리에 힘을 푼다.

난자당한 왼손이 검집을 살포시 쓰다듬는다.

이전에 무녀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인장을 매만져 풍신의 바람을 해방했다.

"흠…!"

천린의 인장이 밝게 빛나며 폭풍이 몰아친다.

일인군단은 순간 조준점을 잃고 발사를 주저했다.

나 또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 남은 수는 아직 하나 더 있다.

코트 깊은 곳에 고이 숨겨놓았던, 여분의 하르미아 시스템을 꺼냈다.

하르미아가 처음에 주려고 했다가 말았던 것.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주라고 던져주던 것.

하르미아 시스템, 그랜드루트 버전이 내 손 위에 있다.

"미안."

하르미아에게 하는 작은 사과.

손아귀에 힘을 주어 시스템을 부숴버렸다.

그러자, 환상의 파편이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거대한 시스템을 부순만큼 그 충전량도 어마어마했다.

[하르미아 시스템 과충전!]

[남은 동력: 357%]

[시스템이 버틸 수 없습니다! 초과 동력을 배출합니다!]

초과 동력이 모두 배출되기 전에 권능연동을 실행했다.

선택하는 것은 영웅담.

하지만 이번에는 승리의 공식이 아닌… '위풍당당'을 구현했다.

[위풍당당(­327%)]

[남은 동력: 30%]

위풍당당은 별것 아닌 능력이다.

어느 때에도 영웅의 품격을 잃지 않게 해주는 권능.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능력이다.

'영웅은 폭풍에도 허둥대지 않아.'

검집, 천린이 자신을 부숴가면서까지 만들어낸 폭풍에.

일인군단은 움찔했지만, 나는 제자리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리에 힘을 풀고 몸을 쓰러트리듯 기울일 뿐.

나는 검병을 붙잡았다.

'마치 바람에 기우는 한 송이 꽃처럼.'

쓰러지듯 몸을 기울이고.

낮게 한 바퀴 돌아.

날카롭게 올려쳐라.

그래.

피어나는 꽃처럼.

마치 개화?花하는 꽃처럼.

나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꽃대처럼.

바람에 꽃향기를 날리는 꽃잎처럼.

"피어나아아아아아ㅡ!!!!!!!!"

위태로운 검에 나의 혼이 맺힌다.

마지막 영웅담이 타오르며, 심장이 거세게 조여오며.

그렇게 만들어낸 혼검기.

나는 열화판이 아닌 '진짜' 검무를 추었고.

재조준을 마친 놈의 손에서 폭사하는 잿빛 불기둥을…

반으로 베어냈다.

"…!"

보랏빛으로 빛나는 혼검기와 잿빛으로 어두운 마법이 만나며,장엄한 폭발이 일어났다.

놈의 마법은 나를 중심으로 반으로 갈려나가, 북성을 예술적으로 피해 주변을 V자로 초토화시켰다.

내가 지켜낸 것이다.

"…그런가."

검무와 마법이 멎은 뒤.

소임을 마친 혼검기가 사그라들고, 송곳니 학살자가 쇳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시야가 흐릿하다.

일인군단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서서히 아래로 떨구었다.

마법구현기계의 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놈의 마력은 여전히 터무니 없이 많았으므로.

"미안하다."

놈은 고개를 돌리고 재차 마법을 발동했다.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너… 방금… 우리한테 늦었다고 했지…"

입꼬리를 작게 끌어올렸다.

"늦은… 건… 우리가 아니라너야…!"

익숙한 웃음소리가 하늘을 메운다.

쏜살같이 날아든 위패가 일인군단의 손아귀에 박힌다.

녹색 주박이 일인군단을 휘감았다.

"고생했느니라!"

죽은 줄만 알았던 천의린을 어깨에 들쳐메고 등장한.

"어서 북성으로 돌아가보거라!"

소방대, 히라 아유하.

무녀가 드디어 도착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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