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17화 (117/119)

〈 117화 〉 정시현 헌 칼 쓰듯 (1)

* * *

김동규의 멋진 활약으로 창공군단이 정리되었다.

시종일관 수세에 몰려 있던 헌터들은 제공권을 되찾자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언데드들을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벽해군단 또한 사대길드의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퇴각했고, 기갑군단 또한 패창의 활약으로 대부분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슬슬 죽어주면 안 되겠니?"

뼈로 엮인 매머드가 크게 울부짖었다.

기갑군단장은 아직 죽어줄 생각이 없는듯했다.

"이제 슬슬 지겨운데. 진짜."

웬만한 아파트 단지는 통으로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매머드.

여성 평균보다 약간 큰 신장을 가졌을 뿐인 가소희와 기갑군단장 간의 부피 차이는 대략 흰개미와 코끼리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당랑거철이라는 말도 이 상황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

그럼에도 싸움의 승패는 가소희에게 한참이나 기울어져 있었다.

"돌진 원툴인 주제에 야. 네가 뒤지기 싫으면 어쩔 건데. 어? 다시 돌진이라도 해보게?"

짜증이 듬뿍 묻어난 도발.

기갑군단장은 그 도발에 넘어가 가소희를 밟아죽이기 위해 거구를 앞으로 맹렬히 부딪혀왔다.

"하란다고 진짜 하네. 학습능력 없는 놈"

화편검무 제오식, 윤무?가 매머드에게 맞서 달려들었다.

종횡무진으로 크고 둥글게 도는 혼검기가 주변에 뿌려진 꽃잎과 반응하며 수십, 수백배로 증폭된다.

복숭아향이 불경한 불법개조 매머드를 멀리 밀쳐내었다.

윤무는 그 이름답게 연속으로 시전할수록 그 위력이 강해지는 초식.

이미 윤무를 82번 정도 시전한 가소희의 윤무는 거대한 산 하나가 부딪히는 충격량마저 이겨낼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윤무는 너무 얕은 게 단점이야.'

윤무의 검격은 개조된 뼈 매머드의 두꺼운 뼈를 잘라낼 정도로 길지 않다.

거대괴수를 상대하기엔 결정력이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듯이 가소희도 그런 상대를 마무리하기 위한 필살기 하나 쯤은 가지고 있다.

기계문어를 단칼에 잘라내버린 태소식마저 뛰어넘는 위력을 가진 필살기.

가소희는 간섭하기과 꼽주기를 좋아하는 주하연이 오기 전에 놈을 끝장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월왕구천을 감싸고 도는 혼검기가 한층 강해진다.

처음의 돌진을 막아내느라 여기저기가 다치고 깨진 가소희는 눈썹에서 굳은 피를 소매로 슥 긁어내고는, 공중으로 아주 크게 뛰어올랐다.

매머드의 키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그녀와 기갑군단장이 싸우던 전장에는 이미 복사꽃의 꽃잎이 한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연속된 검무는 기갑군단장이 으깬 대지 위에 때 아닌 봄을 가져왔고.

가소희의 검은 그 봄을 검에 담아 가을로 떨어트리려 할 뿐이었다.

화편검무花??? 제칠식?七?.

낙화花.

월왕구천이 하늘 위에 춤추고.

무릉의 꽃잎은 모조리 적을 향해 그 날을 세운다.

뿌려둔 복사꽃은 절명의 다발.

어느새 그 분홍빛 세상에 포위당한 매머드는 그 거구를 모조리 낙화의 타점으로 내줄 수 밖에 없었다.

화아

파스스

일제히 한 곳을 겨눈 꽃잎들이 일시에 한 점으로 쇄도한다.

윤무로는 닿지 않았던 놈의 뼈 깊숙히까지.

낙화의 꽃잎은 그 누구도 쉽사리 뚫지 못했던 뼈의 갑주를 손쉽게 찢어발겼다.

꽃으로 난도질당한 기갑군단장은 곧 작은 뼈의 파편으로 화해 무너져내렸다.

날카롭게, 그리고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잘려나간 뼈 파편은 마치 워터파크의 파도처럼 땅 위로 마구 쓸려나왔다.

가소희는 그 위에 파뭍히듯 착지하며 검을 가볍게 갈무리했다.

"어휴, 하도 휘둘렀더니 간만에 팔이 아프네."

늙어서 그런가, 같은 시시한 생각을 한 가소희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괴성을 지르며 무너지는 뼈의 거병이 보인다.

드디어 종전이다.

***

어둠 속을 헤맨다.

홀로 남은 영웅, 자기파괴의 연속.

친구의 유해를 무언가에게 먹여야 했던 그 슬픔?

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 당신은 소중해요.

당연하지. 나만큼 소중한 게 뭐가 있다고.

나와 견주려면 차원 하나 정도는 가져오라지.

­ 그렇죠. 그렇게 소중한 당신을 부수려고 하지 마세요.

뭘 부숴?

­ 그냥, 제발요.

무언가와의짧은 문답이 끝났다.

나는 어둠 속에서 쫒겨났다.

***

"아야."

깨어나자마자 낮고 작위적인 신음을 흘렸다.

예의 그 무표정으로 내 볼을 잡아당기는 샬롯이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샬롯은 손을 떼고 옆 의자에 단정히 앉았다.

나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보았다.

"병원이네."

"실망입니다. 되게 재미없는 반응이군요."

진심으로 실망한 눈빛을 보내오는 샬롯.

나는 얼척이 없어서 물었다.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데?"

"여, 여긴 어디지? 혹시 이세계인가?"

"내가 넌 줄 아냐."

설악산에 갔을 때 기절에서 깨어난 샬롯이 보였던 반응이다.

이 씹덕 양키는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아나보다.

내 가는 눈초리를 받은 샬롯은 스리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읽고 있던 책으로 내 시선을 가려버렸다.

나는 거꾸로 들린 그 책을 홱 잡아 들추고는 그녀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우리가 이겼어?"

"네."

"지금 며칠이야?"

"날짜를 안 외우고 다니는 타입이긴 합니다만, 당신이 쓰러지고 이틀 째인 건 압니다."

"칠성 중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은 소식이다.

북성까지 밀린 상황이라 전황이 걱정되었는데 어떻게 잘 이겨낸 모양이다.

"대신 참전한 A급 헌터의 40%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는군요."

"으음 아카데미에는?"

"죽은 학생은 없습니다. 아마 당신이 제일 많이 다친 사람일 걸요."

나는 아직 멍한 머리를 굴려 생각해보았다.

고위 헌터 다수가 사상을 당하고 아카데미 학생은 건재하다, 라.

극정 아카데미의 용병집단화가 꽤 가속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는 왜 여깄어?"

"당신이 걱정돼서 밤새 간호했다고 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응."

"저를 너무 잘 아시는군요. 감동했습니다."

샬롯이 물의 정령으로 가짜눈물을 만들어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걱정돼서 여기 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제자야아아아!!!"

누군가 병실의 문을 요란하게 박차고 모습을 드러냈다.

두루마기를 걸친 가소희였다.

"깨어났구나!! 이 스승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응?"

쪼르르 달려온 가소희가 내 머리에 양손을 얹고 마구 비볐다.

나는 가만히 앉아 쓰담쓰담을 받았다.

"아주 자기 집 개새끼 다루는 것마냥 하는구나."

어느새 나타난 무녀가 문지방에 기대고 팔짱을 꼈다.

가소희는 그제서야 비로소 손을 떼며 뾰족하게 응수했다.

"지금 죽었다 살아난 우리 제자한테 개새끼라고 한 거야?"

"죽었다 살아나긴 무슨! 옆에 있던 번쩍번쩍 꼬맹이는 진짜 죽었다 살아났는데 어딜 과다출혈 정도로 주름을 잡는 것이냐?"

"흥. 그럼 그 친구 병문안이나 가지 여길 왜 왔니?"

"병문안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한테 가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다쳤을 때 가는 것이 아니냐? 그 꼬맹이는 내가 살리긴 했으나 본녀와 일면식도 없으니 내가 병문안을 갈 이유도 없거니와 내가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도리어 그쪽에서 나를 찾아와 감사인사를 전하는 것이 이치에 맞니라."

뭔가 논리적으로 반박한 무녀.

가소희는 무녀를 째릿거리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하여간 밉상이야! 남의 병문안 와서 아픈 것 가지고 엄살을 떠느니 하면 그거야 말로 이치에 맞는 말이니? 송시열 선생께선 비례물시????(예가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말야. 시현아! 저 미친 무당은 지금부터 상대도 하지 말렴. 알았지?"

"나 참. 본녀가 잘못했으니 용서해주는 것이다. 됐느냐?"

"흥."

건성이나마 사과한 무녀는 가소희의 반대편에 털썩 앉았다.

샬롯은 익숙한 인물구성에 식은땀을 삐질거렸다.

"스승님 병문안 때 생각나네요."

"응? 그러고 보니 인원이 똑같긴 하네."

"샬롯은 스승님이 부른 거예요? 간호해달라고?"

"응. 시급 줄 테니까 깨어나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했어."

"."

설마 부탁도 아니고 고용을 해버렸을 줄이야.

샬롯은 부끄러운지 의자를 빙글 돌리고 이쪽을 등졌다.

"왜 그런 곳에 돈을 아니, 그보다 되게 빨리 달려오셨네요? 어디 근처에 계셨어요?"

"응. 서울대병원이 헌터협회랑 가까우니까. 내가 직접 현장에 나설 일이 많이 없기도 하고. 협회 애들도 눈치란 게 있어서 나한테 직접 나서 달란 말은 잘 안 하거든."

"나 힘들다고 주변에 눈치 주는 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흠흠! 눈치 준 적 없어. 진짜라니까?"

하긴. 존재 자체가 눈치 보이는 거물이니까.

가소희는 아무래도 좋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백한 가짜뉴스는 얼른 집어치자고. 그보다 시현아. 나는 네가 해낼 줄 알고 있었단다."

"뭘 뭘 해내요?"

내 물음에 가소희가 내게 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혼검기 말야. 위기의 순간에 발흥한 그 힘! 후후, 가끔은 내가 정말 대단한 선생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니까."

"가르친 것도 없지 않느냐? 그건 네가 대단한 게 아니라 저 꼬마가 대단한 것이지."

"너 자꾸 내 제자 앞에서 태클 걸래?"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어보였다.

가소희가 가르친 게 없다니?

내가 혼검기를 어떻게 깨쳤는지 생각하면 저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언사다.

"다 스승님 덕분이죠, 뭘. 제게 얼마나 많은 걸 가르쳐주셨는데요."

"그치? 역시 무녀 따위가 뭘 알겠어."

"치"

나는 볼을 부풀린 무녀를 뒤로하고 말을 이었다.

"근데 혼검기를 쓰다가 검이 부서졌어요. 원래 간당간당하던 녀석이긴 했지만 완전히 가루가 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응? 당연하지. 웬만한 물건은 혼검기를 절대 못 버텨."

가소희는 병실 한구석에 가득 쌓인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과일 바구니가 뭐 저렇게 많아?

혹시 다 내 건가?

"마력보다 훨씬 거친 스피릿을 꽉꽉 압축했는데 칼에 무리가 안 가면 그게 이상한 거지."

가소희의 손아귀에서 사과가 분홍색으로 빛나더니, 순식간에 가루로 흩어져 사라졌다.

안에서부터 파괴된 것이다.

"나도 월왕구천을 구하기 전까지는 엄청 부숴먹었지."

"그럼 월왕구천 정도가 아니면 혼검기를 제대로 못 쓴다는 뜻인가요?"

그건 상당히 곤란하다.

기껏 혼검기를 배웠는데 칼이 부서질까봐 쓰지도 못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한 번 해볼래?"

가소희가 소매에서 월왕구천을 뽑아 내게 건네줬다.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보랏빛 혼검기를 일으켰다.

그녀의 것과 비교하자면 아직 많이 미숙했다.

"너는 아직 내 혼검기보다 약하니까 월왕구천급의 검까지 가지 않아도 될 거야. 웬만한 명검은 네 힘을 버티겠지."

"박물관에 있는 전어도 정도면 될까요?"

"아니? 당연히 그 정도론 턱도 없고. 청강검 정도면 되려나?"

"."

아니 씨발.

조자룡이 유선을 구할 때 쓰던 그 검?

사람은 안 보이고 번뜩이는 빛과 장수의 머리가 댕겅댕겅 잘려나가는 것만 보였다는, 철마저 흙처럼 베어버린다는 그 검?

그 정도 칼을 내가 대체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부식되지 않고 수천 년을 버텼다는 월왕구천이나 조조의 양대보검이나 구하기 어려운 건 똑같은데.'

이러다간 조자룡 헌 창 쓰듯 고만고만한 검 몇 개 구해다가 일회용 비슷하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시현 헌 칼 쓰듯 한다는 말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려나.

연개소문처럼 칼을 다섯 개씩 차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떫은 표정을 짓자 가소희가 소매에 손을 넣으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런데 제자야. 내가 그 정도 칼을 안 갖고 있으리란 생각을 한 건 아니지?"

"예?"

"우리 제자한테 줄 명검은 얼마든지 있지. 대부분 쓰다 망가진 거긴 하지만."

그건 그 미친 대장장이한테 맡기면 될 거야~

그렇게 말을 이은 가소희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뽑아들었다.

소매가 부푸는 게 꽤나 크면서도 이색적인 검이다.

"자! 이거면 충분할 걸!"

나는 그녀가 꺼낸 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물론, 무녀는 나보다 더 크게 경악했다.

"그, 그게 왜 네년한테 있는 것이냐아아아!!!!!!"

가소희가 생각 없이 꺼낸 검.

다름 아닌 칠지도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