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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119화 (119/119)

〈 119화 〉 정시현 헌 칼 쓰듯 (3)

* * *

깨어나자마자 새 무기를 얻은 나는 행복해서 마냥 미소지을 뿐이었지만, 가소희는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듯 했다.

그녀는 검날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는 내게 낮고 조용하게 물었다.

"또 필요한 건 없니? 우리 평양의 잔다르크께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구해다줄게."

"더 필요한 거요? 으음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은데요. 그보다 제가 왜 평양의 잔다르크예요?"

"사람들이 다 그러던데? 네가 용감하게 일인군단을 막아선 덕에 전쟁이 승리로 끝나지 않았니."

가소희는 신난다는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착잡함에 이마를 탁 짚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북성에 모여든 모두가 내 모습을 보았을 것이 아닌가.

평양의 잔다르크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별명인 것이 틀림 없다.

"풋. 혹시 이런 관심을 싫어하는 편이니? 제니스에서 하는 짓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던데."

"그, 그걸 보셔요? 왜요?!"

"나도 아카데미 졸업생인데 제니스 정도는 볼 수 있지. 아주 멋져, 시현양."

가소희가 한쪽 입꼬리를 슥 끌어올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세상에. 내가 제니스에서 어그로 끌고 다니는 것을 다 봤다니.

이래서 커뮤니티가 무서운 거다.

"아무튼, 네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면 네가 검집을 막 부수던데. 맞니?"

"그런 난리통에 제 영상을 찍는 사람이 왜 에휴, 맞아요."

"그럼 검집이 필요하겠네. 그렇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접한 신체능력으로도 강력한 검격을 구사할 수 있게 해준 천린은 이제 내 손에 없다.

혼검기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빈자리가 크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좋아. 그럼 좋은 검집이 필요한 거지?"

고개를 끄덕인 가소희가 짐짓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날 내려다봤다.

당장 옷소매에서 멋진 검집을 꺼내 던져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시현아."

"네?"

"건강한 육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그렇다면 좋은 검집에는 무엇이 깃들까?"

"좋은 검이겠죠."

"그럼. 좋은 검을 허접한 검집에 넣어놓는 일은 검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좋은 검집에 좋은 검이 깃든다는 말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소희의 지론은 그랬다.

좋은 칼은 좋은 칼집에!

귀인을 융숭하게 대접하듯 명검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제자께선 검집을 부숴먹었지. 그게 얼마나 귀한 검집인데 아마 차원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품질이었을 거란 말이지?"

"진심이세요?"

"아니? 과장인데."

내 질문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듯 일축한 가소희.

그녀는 황당해하는 내 손에서 무라마사를 홱 빼앗아 형광등에 비춰보였다.

형광등의 작은 불빛에도, 잘 갈린 검날은 훤득한 반사광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좋은 검을 이딴 허접한 검집에 넣어서 주다니, 무녀는 정말 쪼잔하네. 그치?"

"예? 그럴 것까진"

가소희는 부정하는 내 입을 탁 틀어막고 무녀를 흘깃거렸다.

"지아비가 주장하면 지어미가 따르듯, 실 가는 곳에 바늘이 가듯! 좋은 칼에는 좋은 검집이 어울리건만 이런 약소하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허접 칼집에 칼을 담아주기가 있는 거야? 그치?"

"읍"

"그치? 맞아, 맞아. 나도 동의해. 진짜 쪼잔하다. 응! 그렇고 말고."

그러면서 가소희는 연거푸 가만히 있는 무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설마 또 무녀에게 뜯어낼 참인가?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가만히 있는 샬롯에게 관심을 보이던 무녀는 가소희를 눈치채고 얼척이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하는 것이냐?"

"칼집도 좋은 거 달라고 시위 중인데."

"이 칠지도를 인질로 무라마사를 뜯어가놓고 또다시 뭔가를 내놓으라니! 너희 사제는 양심이 있는 것이냐?"

"전 아니 읍!"

항변하는 내 입을 다시 단단히 틀어막은 가소희가 타협은 없다는듯 굳건히 말했다.

"검집."

"싫느니라!"

"하나만."

"주고 싶어도 없느니라! 세상에 좋은 칼을 욕심내는 사람은 많지만 좋은 칼집을 욕심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완강히 거부한 무녀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가소희는 시무룩하게 손에서 힘을 풀었다.

"치 기왕 퍼주는 거 많이 좀 퍼줄 것이지"

"제가 뭘 요구하든 무녀님께 뺏을 작정이셨던 거죠?"

"응."

망설임 없는 즉답.

세상에, 나중엔 보증도 서달라고 할 기세다.

"흥! 저 년은 본녀를 무슨 도라에몽으로 아는 것이다. 뭔가 해달라 하면 다 해주는 도라에몽!"

"네가 너무 유능한 탓이야."

"또 내 탓을 하느냐? 에휴, 내가 어쩌다 저런 걸 친구라고 두었는지"

그렇게 말한 무녀가 아닌 척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다는듯 품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네년은 이 귀한 걸 막 집어던지고 다니면 어쩌자는 것이냐?"

그녀가 꺼낸 것은 내가 던져버린 푸른 갈기였다.

아무래도 자동으로 회수되는 편리한 옵션 따위 없다보니 전장 한가운데에 방치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앗, 감사합니다."

"그럼. 그래야지. 예의바른 너는 네 스승처럼 싸가지 없게 크지 말거라."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잘 들은 게 맞노라, 이 싹바가지 없는 분홍대가리야."

"칫."

무녀는 내게 푸른 갈기를 바로 건네는 대신, 푸른 갈기의 뒷면에 무언가를 새겨넣은 뒤 무라마사의 허접한 검집에 얹어 내게 주었다.

푸른 갈기는 자석처럼 검집에 딱 붙어 작은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혹시 장식으로 만들어준 건가 싶어 푸른 갈기를 붙였다 뗐다 해보고 있자니, 무녀가 작게 설명을 덧붙였다.

"초전자가속발도라고 아느냐?"

"초전자가 뭐라고요?"

"이 안에 든 전력이 허용하는 한 발도술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회로를 추가했느니라. 또 원하면 어디에나 탈착 가능하도록 바꾸었지. 이 정도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무녀는 다시 아닌 척 내게서 물러나 고개를 홱 돌렸다.

딱히 가소희의 부탁 때문에 해준 것은 아니라는 듯한 태도다.

"어머, 그렇게 도와줄 거였으면서"

"흥! 네년의 부탁 때문에 해준 것이 아니다. 친구 알기를 도라에몽으로 아는 년을 무엇이 좋다고 도와주겠느냐?"

"에이, 그러지 말구! 내가 그동안 너 도와준 게 얼만데! 허구한 날 일본으로 불러다 자기 귀찮은 일 짬처리 때리면서. 내가 무슨 도와줘요 번개맨이니?"

"알겠으니까 쌤쌤 때리는 것이다! 아주 입만 살아가지고."

둘은 또 시답잖은 것으로 투닥거렸다.

친구 알기를 도라에몽으로 아니, 번개맨으로 아니 하지만 아무래도 진짜 친한 친구인 건 맞는 모양인가보다.

나는 검집에 붙어 옅게 반짝이는 푸른 갈기를 내려다보았다.

허접한 검집이 순식간에 멋지게 변해버렸다.

"감사합니다, 무녀님."

"인사는 됐느니라. 그보다 네년은 어디서 그렇게 좋은 것들만 주워 먹었느냐? 방금 살펴보니 그것도 정령왕의 힘이 깃든 정도가 아니라 정령왕이 직접 만든 것에 가깝던데."

"그 저도 길 가다 주운 거라 잘 모르겠어요."

"흥. 말하기 싫다 이것이냐. 내가 이 브로치의 과거를 보았을 땐 네년이 아주 당당하게 설산 위의 비석을 들춰내고 이것을 낼름 가져갔는데 말이지."

설마 푸른 갈기에 깃든 과거를 본 건가.

세상에. 나는 푸른 갈기를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고 다녔는데 말이지.

그렇다면 푸른 갈기를 얻은 이후의 내 행적을 올올히 다 들켰다는 것과 진배 없는 소리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남의 사생활을 막 들춰볼 정도로 얍삽하진 않느니라. 네년이 그 사이비와 밀회를 가졌던 것은 봤지만."

"뭐, 뭐라고!?"

"뭘 그리 놀라느냐? 젊은 남녀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으슥한 골목길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 소리를 정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무녀는 그렇게 내뱉고는 또 몸을 낼름 돌려 이쪽을 등져버렸다.

아까는 예의바른 아이라면서 이제는 왜 이렇게 엿을 먹이는 것인가.

나는 정말 억울하다.

"시, 시현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그 미친 새끼를 만나!! 빨리 아니라고 말해!!!"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니!! 빨리 사실대로 말해!!!"

가소희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등을 돌리고 킥킥 웃은 무녀는 가소희를 붙잡아 말리며 사실을 알렸다.

"장난이다. 그런 신분과 나이의 차이를 뛰어넘은 연애는 사실이 아니니라. 만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아니, 만났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니까! 우리 제자가 뭔가 해코지라도 당했으면 어떡해!"

"그런 일은 일절 없었노라. 돈과 아티팩트는 받았지만 말이다."

나는 혼란스러움에 눈동자를 흔들었다.

아니, 그 얘기를 왜 여기서 꺼내는가.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하르미아한테 말한 건 에이, 아니겠지.'

그랬다간 많이 혼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피해다니라 했는데 그걸 기어코 찾아가서 만나냐고.

나는 적의 의중을 떠보려 했을 뿐인데 말이다.

"무슨 얘기했어? 응? 뭘 했는데?"

"그건 내가 차차 설명해주는 것이다. 별로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고."

무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얼굴에 비장함을 한껏 깔았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그 사이비는 너를 칠흑여제의 계약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맞느냐?"

"네"

"그리고 네게 뜬금없이 차원을 넘을 수 있는 아티팩트를 쥐여주었고."

"그렇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았느냐?"

나는 그 말에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박하민이 말하기로는, 그 수레바퀴는 내게 보이는 호의이자 도발.

그가 날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칠흑여제가 갖는 위상이 어떤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칠흑여제가 로엠으로의 복귀를 노리고 있고 그 칠흑여제가 허접한 계약자로 하여금 자기가 알 수 없는 수작을 부리고 있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그럼 그 수레바퀴는 '멍석을 깔아줄 테니 수작을 부리려면 대놓고 부려라'의 의미에 가깝지."

그렇게 종합한 무녀는 짐짓 비장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너. 마계 아카데미에 다녀볼 생각은 없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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