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1)화 (1/89)

1화 다시 시작할 수 있는거야?

‘신이 있어?’

19살의 아그네스는 눈물을 흘렸다.

갈라지고 피가 터진 입가에 소금기가 맺힌 눈물이 닿자 쓰라렸다.

쓰라린 것뿐인가.

이미 살갗이 터지고 근육이 찢긴 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그네스. 내 ‘르티옴’.”

지하로 내려온 게르웨르 공작이 아그네스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속 아그네스는 자연스레 몸을 움츠렸다.

지독한 피 냄새.

또 능력을 사용하고 온 모양이었다.

기억 저편. 한때는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저 목소리도, 이제는 그저 아그네스에게 고통을 알리는 발단에 불과했다.

10년 전, 아그네스는 떨이 상품으로 노예 시장 바닥을 굴렀다.

더럽다는 이유로,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짐승 취급을 받던 어린아이를 게르웨르 공작이 주웠다.

“너는 나를 위해 태어난 것이다.”

아그네스는 어둡던 제 삶에 구원이 내려왔다 여겼다.

제 엄마나 외삼촌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해충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태어난 것에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곰팡이와 벌레가 없는 깨끗한 방이 생겼고, 딱딱하지 않은 빵이 식사로 주어졌다.

아그네스는 행복했다.

딱 반년 동안은.

“아파, 아파요…….”

“정화해라!”

겨울이 시작되던 아그네스의 9살 생일. 공작은 그녀에게 힘의 정화를 명령했다.

속이 뒤틀리는 이상한 감각. 생살이 갈리고 근육이 꿈틀거리는 끔찍한 감각.

다정한 공작은 아그네스가 정화를 거부하던 순간부터 변했다.

괴로운 고통 속에서 아그네스는 탈출을 감행했다.

몇 번의 탈출, 그리고 몇 번의 포획.

다시 잡혀 올 때마다 아그네스가 머무는 곳은 점점 좁아졌다.

저택에서 방으로, 방에서 감옥으로, 감옥에서 우리로…….

제한된 공간 속에서 근육은 점차 제 기능을 잃어갔다. 3년 전부터 아그네스는 우리 속에 쓰러져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그네스의 좁디좁은 세상. 그곳의 방문자는 게르웨르 공작과 눈과 귀가 먼 하녀뿐이었다.

“오늘은 힘을 많이 썼어. 겨우 살아남았지. 개 같은 로드윅. 놈만 아니었어도…….”

게르웨르 공작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고는 우리의 쇠창살 사이에 고정된 아그네스의 손을 잡았다.

‘싫어.’

아그네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를 아프게 하지 마.’

하지만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정화를 거부할 체력마저 없었다.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아그네스의 몸이 다가올 상황을 예감하고 잘게 떨렸다.

“정화해.”

“아, 아……!”

곪은 상처를 칼로 쑤시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붙잡힌 손을 타고 게르웨르 공작의 탁한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해?’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야?’

‘아프고 싶지 않아.’

아그네스는 언제나처럼 절망했다. 

누구도 이 고통에서 그녀를 구원해주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될 거다.”

게르웨르 공작은 어느 날부터 아그네스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직감했다. 제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대로 게르웨르 공작이 오지 않으면, 제 삶에도 짧은 평화가 찾아올까.

하지만 찰나의 안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단을 밟는 낯선 이들의 발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정말 이걸 가져가겠다고?”

우리에 갇힌 아그네스를 발견한 하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같이 온 하인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 다가왔다. 그런 뒤 다급한 손놀림으로 우리의 잠금장치에 열쇠들을 하나씩 맞췄다.

“값나가는 건 다른 놈들이 가져갔어. 게르웨르 공작가가 전쟁에서 지고, 가문 일원들이 다 죽은 마당에. 퇴직금은 알아서 챙겨야지.”

“그 더러운 게 어떻게 돈이 되는데?”

“어떻게 돈이 되냐고?”

아그네스는 희미한 숨을 쉬었다. 눈꺼풀을 달싹이는 그녀의 눈에 철창 너머 하인의 모습이 담겼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이건 ‘르티옴’이라고! 공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로드윅, 히베츠만, 세르디야. 어느 쪽에 가져가도 억만금을 줄걸!”

소리치는 하인의 목소리에는 탐욕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싫어.’

천이 물린 아그네스의 입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공작들에게 가면 아플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네 공작 가문의 능력자들은 르티옴을 필요로 했다.

능력을 사용할수록 그들의 몸에 쌓이는, 저주와도 같은 기운을 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화는 아그네스를 다시 끔찍한 고통 속에 집어넣을 게 분명했다.

벗어나야 해.

‘어떻게?’

그 사이, 맞는 열쇠를 찾은 하인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그네스의 손을 고정한 장치를 풀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아그네스의 팔을 잡아챘다.

“이리 와!”

상처투성이에 여윈 몸이 더러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쿨럭.

우리를 막 나가려던 순간, 기침 소리와 함께 아그네스의 몸이 들썩였다.

하인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왜, 왜 이래?”

붉게 물든 아그네스의 낡은 상의.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손에서 입을 막고 있던 천 뭉치가 굴러떨어졌다.

“피를 토했어.”

촛대를 든 하녀의 손이 떨렸다.

“뭐?”

“갑자기 입에서 피를 쏟았다고! 곧 죽을 사람처럼……!”

속까지 곪은 몸의 한계가 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아그네스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냉기를 실은 바람이 불었다. 하녀와 하인은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얼어붙어 다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그네스는 가쁜 숨을 쉬며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냉기를 다루는 능력.

다른 공작 가문의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

“아아, 아그네스. 이제 능력자는 나와 그 가주가 된 어린놈들밖에 남지 않았단다.”

대를 이은 세 명의 공작 중, 이런 능력을 사용하는 공작은 분명히…….

‘아.’

아그네스는 생각을 멈췄다.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뚜벅. 뚜벅.

계단을 내려오는 세 명의 남자.

눈을 사로잡을 정도의 미남들이었으나, 아그네스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보는 건 무겁고 끈적거리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세 개의 거대한 덩어리뿐이었으니.

세 공작이 동시에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의 얼굴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져 버린 저주의 기운.

끈적하게 뒤엉킨 기운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 꿈틀거렸다.

‘……당신들을 정화하라고 내게 온 거구나.’

아그네스는 피 묻은 입가를 비틀었다.

그들에게 잡히기 전에 제 생이 끝나서 짓는 승리의 미소인지, 아니면 이렇게 끝나는 제 생이 비참해서 짓는 실소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내려온 공작이 뭐라 말하며 아그네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인가, 귀에 들리는 이명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감기는 눈꺼풀은 점점 들어 올리는 게 힘겨웠다. 아그네스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빌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만 고통받게 해줘.

* * *

아그네스는 잠자는 것을 좋아했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은 고통뿐이니 차라리 잠에 빠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어라……?’

잠에서 깬 아그네스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낡고 냄새나지만,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것도 침대 위에서.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아.’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시작해야 할 지옥이었다.

몸이 아프지 않다니. 언제 느껴본 지도 기억나지 않는 낯선 감각이었다.

주변 풍경도 평소와는 달랐다.

군데군데가 썩은 나무 천장, 곰팡이가 핀 벽지.

코에 닿는 퀴퀴한 냄새는 불쾌했지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마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다락방의 풍경 같은.

‘다락방?’

아그네스는 몸을 일으켜 바닥에 섰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은 앙상하고 작은 발. 그리고 작은 손.

때가 잔뜩 탄 원피스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지 종아리 아래와 팔뚝이 훤히 드러났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은 엉망으로 엉키고 석탄과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 거대한 회색 털 뭉치라 해도 좋았다.

이 모습은…….

“얘!”

짜증 섞인 여인의 목소리에 아그네스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문에 기대 인상을 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아그네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보라색 머리카락, 치켜 올라간 눈매, 입가의 점.

외삼촌의 애인이자, 어릴 적 같은 집에 살았던 노라였다.

‘꿈인가?’

그렇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꿔 본 적이 없는데.

노라는 멍한 얼굴의 아그네스를 향해 손바닥을 흔들었다.

“네 엄마가 죽었다고 정신을 놓고 다니니? 오늘 아침도 안 차리고. 덕분에 내가 냄새나는 여기까지 올라왔잖니.”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 어제 너희 엄마가 죽었단다.”

벌써 몇 번을 해준 말이었다. 노라는 같은 질문을 계속하는 취객을 상대하듯, 귀찮다는 티를 내며 대꾸했다.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아그네스가 허공을 향해 멍하니 중얼거렸다.

“엄마가…….”

그 모습을 본 노라가 혀를 찼다.

어미는 미쳤어도 애는 멀쩡한 줄 알았더니. 어미의 죽음으로 미쳐가는가. 결국 제 어미를 닮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아그네스는 덤덤했다.

“벌레 같은 것! 끔찍해! 너 같은 걸 내가……!”

엄마란 말을 들어도 기억나는 것은 단편적인 것뿐이었다.

절 향해 내리치던 매서운 손바닥, 언성을 높이며 목에 세운 핏대, 바늘처럼 꽂히던 모진 말들.

그녀에게 쌀 한 톨만 한 애정을 갈구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은 세월과 함께 무뎌진 지 오래였다.

아그네스는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는 대신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보았다.

‘엄마가 어제 돌아가셨으면 나는 일곱 살이야.’

이 상황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었지만,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었다. 구속구가 제 몸에 채워지지도 않았다.

몇 년 만에 되찾은 자유는 이토록 생생했다.

‘설령 꿈이라도 좋아.’

게르웨르 공작가의 차가운 바닥에서 얼마나 수없이 과거를 되짚어봤던가.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어렸을 적의 학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이 제 삶에 자리 잡게 된 건가.

수천, 수만 번을 생각했다. 아그네스의 결론은 일곱 살.

“아이를 팔려고. 100데르겔? 그건 이틀 치 술값도 안 되잖아. ……쳇, 어쩔 수 없지. 그거라도 주쇼.”

엄마가 죽고, 외삼촌이 자신을 노예상에 판 날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다락방에 있는 지금. 자신은 아직 팔리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아그네스의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꿈속이라도 좋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오히려 꿈속이라면, 이런 자신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남들처럼 웃으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을.

‘그러려면…….’

과거를 바꿔야 했다.

때마침 아그네스를 기다리다 못한 노라가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얘! 내일 탬버 씨를 따라서 시장에 간다며? 가기 전에 내 심부름 좀 해주렴.”

“시장…….”

“왜 그래? 시장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정신이 돈 거니? 이래서 제값도 못 받을…….”

노라는 제 말실수에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아그네스의 귀에 ‘제값’이란 단어가 똑똑히 들린 후였다.

내일이었구나. 자신이 팔리는 날이.

‘내일…….’

아그네스는 작은 손바닥에 맺힌 땀을 때가 탄 치마에 문질렀다.

* * *

“헉, 헉.”

아그네스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달렸다.

조금 전, 노예 상인과 대화하던 탬버가 한눈을 판 틈을 타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망할 계집!”

그녀의 외삼촌, 탬버가 뒤늦게 성질을 내며 아그네스를 쫓았다.

아그네스 달리고, 또 달렸다.

노예상이 있던 뒷골목을 벗어나자 평범한 시장의 풍경이 펼쳐졌다.

낮의 시장은 사람이 꽤 있었다. 아그네스는 인파 속을 필사적으로 헤쳐 나갔다. 

다행히 어린아이인 아그네스는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성인인 탬버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달리기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잡히면 안 돼.’

노예상에 들어간 후의 미래는 선택지도 없을 정도로 빤했다.

귀족들은 잘 꾸며진 예쁜 아이를 좋아했으니까. 더럽고 냄새나는 자신은 이번에도 팔리지 못할 터였다.

그러다 언젠가는 게르웨르 공작을 만나겠지.

‘내가 르티옴인 걸 숨겨도 공작은 날 알아볼 거고.’

게르웨르 공작의 금안이 기억 속에 선했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공작의 능력.

게르웨르 공작은 그 능력으로 자신이 르티옴인 것을 알아낼 것이다.

‘절대 잡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런 아그네스의 각오와 달리, 인파가 줄기 시작했다. 

수십 명에서 열 몇 명. 그 수에서 또 몇 명. 그러다 한두 명…….

뒤쪽에서 들리는, 악에 받친 탬버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제발……!’

잡히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문 채 힘껏 내달리던 아그네스는 누군가의 다리에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아그네스는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아…….”

태양을 등진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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