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2)화 (2/89)

2화 함께 갈 거냐고요?

고귀한 외모의 남자였다.

검은색 머리카락,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는 붉은 눈.

몸에 걸친 모든 것이 값비싸 보였다. 그저 서 있을 뿐인 자태에서는 기품이 흘러나왔다.

‘귀족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신분이 높아 보이는 귀족.

순간 아그네스는 자신의 상황마저 잊은 채 그에게 홀려 멍하니 귀족을 바라봤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팔을 붙들렸다.

귀족의 수행원이었다.

갈색 머리의 젊은 수행원은, 엉덩방아를 찧은 아그네스를 일으킨 뒤 귀족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잠깐 아그네스에게 닿았던 귀족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무관심한 그 눈빛에, 아그네스는 잠시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귀족이 수행원에게 답했다.

“괜찮다. 이 골목은 여전히 어수선하군.”

“가주님께서 직접 나오신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요. 도련님께서 이번에도 데려온 아이를 쫓아내셨으니.”

“제드.”

“이크, 죄송합니다. 입방정을 떨었네요.”

제드라 이름 불린 수행원은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태평한 그들의 모습에 아그네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려 귀족과 부딪혔다.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화를 나눌 거라면, 차라리 팔을 놔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수행원이 가볍게 잡은 듯한 팔은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 않았다.

“놔주세요……!”

아그네스의 울먹거리는 소리에, 두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냄새나고 더러운 아이. 얼굴은 제멋대로 자라 엉킨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먼지 같네.’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다 아직 쌀쌀한 초봄에 입기에는 얇은 옷차림, 앙상한 팔다리, 상처투성이인 맨발.

‘빈민가의 아이인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꼬마군.’

아이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야 하는 사람처럼 제 팔을 빼겠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수상쩍은 모습에 수행원이 귀족에게 말을 건넸다.

“가주님, 소매치기당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소지품은 다 있다.”

“그래요? 그럼 이 꼬마가 왜 이러는…….”

“이봐, 갈색 머리 양반.”

그때였다.

기어코 아그네스를 따라잡은 탬버가 씩씩거리며 일정 거리를 두고 근처에 멈춰 섰다.

바로 앞에 서지 않은 것은, 수행원의 옆에 있는 귀족에게 시비를 거는 꼴이 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탬버는 사색이 된 아그네스를 노려봤다.

“그 아이, 이리 넘기쇼.”

“아는 사람?”

수행원인 제드가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아그네스는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얘는 그쪽을 모른다는데?”

“댁이 무슨 상관-!”

탬버는 언성을 높이다 멈칫했다.

힐끔 귀족의 눈치를 살피니, 귀족은 무심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탬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 나라의 지체 높으신 귀족 나으리들은 평민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로 도둑질을 하든, 사고팔든, 죽이든.

저 귀족의 모습을 보아하니 다른 귀족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자신은 저 수행원에게서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애를 돌려받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제길. 100데르겔밖에 안 하는 애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 악질 노예상이 아이가 없어진 걸 알고 위약금을 100배나 물어내라 절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탬버는 남몰래 이를 으득 갈고는, 수행원에게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댁이 무슨 상관이쇼! 하여튼 그 애는 이미 값을 받고 팔기로 했으니 당신이 끼어들 일은 아니라고!”

“팔아?”

움찔.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었다.

귀족의 붉은 눈동자가 탬버에게 닿았다. 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등골이 서늘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귀족이 끼어들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에, 탬버는 양 입술이 붙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

귀족은 오들오들 떠는 아그네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몇 살이지?”

“…….”

“꼬마, 가주님이 물으시잖아.”

“저, 저요?”

아그네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귀족이 제게 말을 걸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고민조차 하지 못하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일곱 살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있군.”

귀족이 중얼거렸다.

비쩍 곯았길래 많아봤자 여섯 살 정도 되는가 했더니.

‘이렇게 작으면 데온도 성질을 부리지 못하겠지.’

귀족의 붉은 눈이 생각에 잠겼다.

“일곱 살이면 도련님과 두 살 차이네요? 지금 돌아가면 해가 지기 전에는 저택에 돌아갈 수 있을 테고요.” 

귀족이 생각하는 바를 읽어낸 제드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귀족은 아그네스를 향해 툭, 말을 내뱉었다.

“나와 함께 갈 거냐.”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아그네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질문의 의도를 몰라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귀족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내가 데려가 주지.”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아그네스의 눈이 깜빡였다.

‘데려가 준다고? 나를?’

보이지는 않지만, 탬버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대로 귀족을 따라가면, 적어도 노예상에 팔려 가는 일은 면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이 귀족은…….’

아그네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금 뇌리에 깊숙이 새겨진 금안을 떠올리던 아그네스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이 귀족은 게르웨르 공작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냐.”

다시 돌아온 물음에 아그네스는 귀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를 아프게 하실 거예요?”

“무슨 소리지?”

“제가 싫다고 해도……. 아프게 하실 거예요?”

보이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 하더라도 아그네스에게는 희망이 필요했다. 

이 귀족을 따라간 제 미래가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는 희망.

“…….”

한편, 그런 아그네스의 속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움찔거리는 탬버에게 향했다.

특히 제드는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나가 아동학대범은 상대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애를 팔아먹으려 한 것도 모자라서 때리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팔다리도 성한 양반이. 저 조그만 애를 때릴 힘으로 생산성 있게 일이나 하지.

한심함에 혀를 차는 제드의 뒤로, 귀족과 아그네스의 대화가 이어졌다.

“싫다고 하면 아프게 하지 않는다.”

“……정말요?”

“맹세하지.”

“……그러면 따라갈래요.”

“좋다.”

귀족은 아그네스의 더러운 몰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아그네스를 안아 들고는 몸을 돌렸다.

“이, 이보십시오! 귀족 나으리!”

끝내 조급함을 참지 못한 탬버가 소리쳤다.

귀족보다 100데르겔의 100배 되는 빚이 무서워졌기 때문이었다. 

두 눈 뜨고 빚더미에 앉을 수는 없지.

귀족은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드.”

“넵. 해결하고 뒤쫓아 가겠습니다.”

제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탬버에게 다가갔다.

아그네스를 안은 귀족은 근처에 세워둔 마차를 향해 걸었고, 거리엔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탬버의 비명이 들렸다.

아그네스는 부디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길 바라며, 가슴을 졸인 채 귀족의 품 안에서 딱딱히 굳어 있었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

귀족은 맞은편에 앉은 어린아이를 바라봤다.

공중에 뜬 두 발, 꼿꼿이 세운 허리, 잔뜩 움츠린 어깨, 접착제로 붙이기라도 한 마냥 허벅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두 손.

“누가 보면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귀족의 말에 아그네스가 더욱 바짝 얼었다.

심기를 거스를까 봐 숨 쉬는 것도 조심하고 있었는데, 저런 소리를 들으니 호흡조차 할 수 없었다.

“…….”

덥수룩한 머리칼 아래, 보이지 않는 아그네스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했다.

귀족은 그런 아그네스를 힐끔 보더니 아이의 양 볼을 한 손으로 잡아 눌렀다.

“흐압.”

붕어처럼 변한 입술 사이로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이상한 소리를 냈다는 생각에 좀 전과 다른 이유로 아그네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귀족의 손에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한 볼이 착 달라붙었다.

‘왜 이러는 거지…….’

아그네스는 귀족의 눈치를 살폈다.

귀족이 볼을 놔주지 않았다. 무표정하니 귀족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저어기…….”

당황한 아그네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귀족을 부르자, 그제야 손이 떨어졌다.

귀족은 잠시 제 손을 바라보다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공작님이라고 부르거라.”

저기, 라 부른 게 문제가 되니 호칭을 정정해준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아그네스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역시 공작이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귀족의 심장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듯한 뒤엉킨 기운. 

상반신의 반 정도를 가릴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정화하지 못한 듯 탁하고 어두웠다.

그 기운이 제게 보인다는 건, 남자의 정체가 능력자라는 소리였다.

능력자가 태어나는 가문은 4곳밖에 없었다.

“세르디야, 로드윅, 히베츠만 중에 어디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아그네스의 말에, 귀족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

흥미였다.

기본적인 가정 교육도 못 받은 것 같은 모습인데, 공작이라는 말에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가문의 이름을 줄줄 말한다?

왜 게르웨르를 말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음침한 작자의 성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데 똑똑하군. 로드윅이다. 블레이크 로드윅.”

일부러 풀네임을 덧붙인 것은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공작 가문을 꿰고 있다면 제 이름도 알고 있겠지.

로크샤 제국 전역에 살인귀로 유명한 이름을. 어떻게 나올까.

‘울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시끄러운 건 질색이었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가문의 이름을 한 번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별것 없는 반응에 아쉬움이 들려던 찰나, 아이가 제게 물었다.

“……공작님, 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이번에는 공작님이란 호칭을 제대로 사용했다.

‘질문 허락을 구할 줄도 알고.’

배움이 빠른 건지, 아니면 보이는 것과 달리 교육을 받은 아이인 건지. 

얼굴에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블레이크가 아이에게 느끼는 흥미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가 질문해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희 외삼촌은 어떻게 됐나요……?”

“아까 그자가 외삼촌인가?”

“……네.”

블레이크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 혈육인지는 몰랐다.

아동학대범에 인신매매범도 외삼촌이라고 걱정해주는 모양이군.

“네 외삼촌은-.”

블레이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드를 보냈으니 그 쓰레기는 몇 달을 병상에서 누워지내게 될 터였다.

지금쯤이면 피해보상과 입막음에 적당한 돈을 받고 다시는 아이를 찾지 않는다는 각서에 지장을 찍고 있겠지.

‘뭐라 말해줄까.’

블레이크는 아이를 바라봤다.

“네 앞에 다시 나타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줬지.”

“……죽었나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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