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4)화 (4/89)

4화 너 이렇게 귀여웠니?

“도, 도련님?”

안나의 놀란 목소리. 아그네스는 제대로 떼보지도 못한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온 그녀는 아이의 앞에 서 있는 제 도련님, 데온을 보고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느, 능력을 사용하시려던 건……. 아니죠……?”

데온과 아그네스를 번갈아 보는 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능력이라는 소리에 그제야 데온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날 가르치려는 건가? 안나. 언제부터 내 선생으로 고용됐지?”

함부로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가 섞인 말투.

고작 9살인 그에게서 숨이 막히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안나는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도련님.”

“알면 됐어.”

그렇게 말하는 데온의 눈은 여전히 아그네스를 향해 있었다.

아그네스 또한 머리카락 속에 숨은 눈동자로 가만히 데온을 바라봤다.

‘……고통?’

그러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붉은 눈동자에 깃든 감정 중, 제가 잘 아는 것이 끼어들어 있었다.

소년은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십몇 년간 겪었던 그 지긋지긋한 것을 그녀가 모를 수 없었다.

‘부작용 때문인가?’

게르웨르 공작은 능력자들의 몸에 쌓이는 기운을 부작용이라 말했다.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부작용이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나의 르티옴. 내가 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벌써…….”

아그네스는 지난 일을 떠올리다 오싹 소름이 돋아 어깨를 떨었다. 게르웨르 공작이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한편, 그 모습을 본 데온은 아그네스가 제게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저, 저기…….”

아, 첫인상을 좋게 남겨야 하는데.

아그네스가 더듬거리며 데온을 불렀지만, 데온이 돌아볼 리 없었다.

대신 응접실을 나가기 전, 안나에게 뭐라 입을 열었다.

* * *

“쟤 좀 씻겨. 냄새나.”

데온이 안나에게 한 말에 아그네스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아그네스는 몇 년 만에 먹는 부드러운 빵에 감동할 새도 없이, 욕실로 끌려갔다.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서, 안나는 아그네스를 빨았다.

씻겼다는 말보다는 빨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머리카락은 비누칠과 헹굼을 다섯 번은 반복해야 했고, 목욕물은 구정물이 돼버린 탓에 두 번을 더 갈아야 했으니.

아그네스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안나의 손길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으, 아…….”

“아직 안 끝났어.”

그런 뒤, 안나는 아그네스의 몸에 보습크림을 바르고 머리카락에 윤기가 나는 기름을 발랐다.

머리를 말리고 새로 꺼낸 잠옷까지 입히자, 아그네스의 몸은 새로 태어난 듯이 뽀송해졌다.

물밀 듯이 몰아쳤던 상황에 아그네스는 얼이 나가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귀여웠니?! 너?”

안나는 제 노력의 결과물에 상당히 감동해 따끈따끈해진 아그네스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그럴 만도 했다.

엉켜서 단발로 잘라버린 머리카락이 아쉽긴 했지만. 깨끗해진 아이의 모습은 신화 속의 요정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달빛처럼 빛나는 결 좋은 은발, 새하얗고 보드라운 피부, 앞머리 아래 드러난 동글동글한 은색 눈.

“여태껏 이런 외모를 숨기고 살았던 거야? 얘. 진짜 너무 예쁘다.”

거듭되는 안나의 감탄에, 아그네스는 영문을 몰라 했다.

‘왜 이러는 거지?’

더럽다, 냄새난다. 불쌍하다.

살아온 모든 생을 통틀어, 아그네스에게 따라붙는 말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과거, 게르웨르 공작가에서 비교적 깨끗했을 시절에도 제 외형에 긍정적인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가씨, 당신같이 더러운 평민을 거둬준 게르웨르 공작님께 감사하세요.” 

라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이 사람은 상냥하니까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해주는 걸 거야.’

사실은 썩 보기 좋지 않을 텐데도.

아그네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아. 내가 너무 혼자 떠들었지? 이럴 때가 아닌데. 응접실로 가자. 집사님이 널 데려오랬어.”

안나는 아그네스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로 가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오, 왔어?”

낮에 봤던 제드가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반가운 마음에 절로 맞인사가 나왔다.

“아, 안녕하…….”

“안나, 가주님께서 데려오신 꼬마는?”

금세 그 인사가 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그네스의 볼이 민망함에 발갛게 물들었다.

‘……나한테 인사한 게 아니었어.’

“아~ 같이 안 왔나~?”

제드는 아그네스를 바로 앞에 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가가 장난스레 접혀 있는 것을 보아, 농담을 하는 게 분명했지만.

제드의 허리춤도 못 오는 아그네스가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거참, 안나. 애를 숨기면 어떻게 해?”

“여기 있잖아.”

안나가 아그네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제드를 바라봤다.

‘애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경고 섞인 눈빛에 제드가 뜨끔하며 아그네스 놀리기를 관뒀다.

대신 씩 웃으며 아그네스의 머리에 얹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알지! 여기 있는 거. 이야, 정말 놀랐다니까? 굴러다니는 먼지에서 걸어 다니는 귀족 아가씨가 됐네!”

“어, 어…….”

“끄악. 제드 트레앙! 이 미친놈아!”

헝클어지는 아그네스의 머리카락에, 안나가 기겁했다.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들어놓은 머릿결인데!

안나가 제드의 손목을 잡은 그때였다.

“크흠.”

제드의 뒤에서 가만히 있던 집사가 헛기침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40대 후반의 집사는, 어린 아그네스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로드윅 가의 집사입니다. 가주님께 말씀하시길, 아가씨께서는 불릴 이름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아…….”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유일한 이름인 ‘아그네스’는 게르웨르 공작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외삼촌네 집에서는 자신을 ‘얘’, ‘너’, ‘식충이’ 따위로 부르곤 했으니.

“이름은……. 없어요.”

그래서 로드윅의 성으로 오는 길, 아그네스는 마차 안에서 블레이크 공작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이름이 없으니까.

집사는 손녀딸뻘인 아그네스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원하신다면 가주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실 겁니다.”

아그네스는 그런 집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왜 ‘원한다면’이라는 말로 제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듯한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주인이 이름을 준다면 받을 뿐이었다.

“네. 노예는 주인께서-.”

“잘 생각했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면 새로운 이름이 있는 편이 좋지!”

옆에서 듣던 제드가 다시 아그네스의 말을 자르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늘어놓았다.

“로드윅 공작가에 있는 놈들은 대부분 공작님께 이름을 하사받았지. 왜냐? 과거가 잊고 싶은 일투성이였거든.” 

“…….”

“새로운 이름은……. 그래,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기대야.”

“새로운 삶……?”

아그네스는 제드의 말을 듣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드는 그런 아그네스를 힐끔 관찰했다. 

아이의 눈동자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은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때, 너도 기대되지?”

공작님께서 주워온 아이. 

가족에게 학대받고, 기본적인 보살핌도 받지 못하다 결국 그 가족에게 노예로까지 팔리게 될 뻔한 아이였다.

그간 도련님의 놀이 상대로 온 아이들은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이 아이는 돌아갈 곳이 없으니 이곳에 머물게 되겠지.

제드는 아그네스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눈을 보며 확언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 저택에 지내게 된 이상, 오늘을 기준으로 네 삶은 달라질 거야.”

* * *

“이름을 받는다고 했다?”

“네.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하더라고요. 말씀하신 그 노예니, 뭐니 하는 것 때문인 것 같지만요.”

가주의 서재.

책상에 앉은 블레이크는 앞쪽에 선 제드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그는 제드의 입에서 나온 노예란 단어가 못마땅해 혀를 찼다.

“내가 그 아이에게 노예로 들이겠다 한 적이 있나?”

“제 기억 속에는 없습니다.”

“나도 없어.”

책상 위에는 주인 없는 이름 몇 개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아이의 이름이 없다는 걸 안 순간부터, 블레이크의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이름 후보들이었다.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씻겨놓으니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던데요.”

그 말에 블레이크는 피식 웃었다.

제드가 말하지 않아도 대략 예상이 갔다. 머리카락 너머의 외모는 범상치 않았으니.

“그래서, 보고는?”

“지독해요.”

제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조사한 아이의 성장 과정은 제 짐작보다 더 끔찍했다.

아이의 모친은 아이의 부친에게 버려진 채 길바닥에서 홀로 아이를 낳았다.

오갈 곳이 없는 그녀는 오물과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아이를 안고 제 오라비의 집을 찾았다.

“모친은 그때 정신이 반쯤 돌아서 애를 괴물 보듯 대했답니다. 그래서 탬버가 애의 양육을 담당했는데, 아, 탬버는 아이 외삼촌이에요. 낮에 애를 팔려던 인간 말종.”

“알아. 계속 얘기해 봐.”

“그런 인간이 애를 제대로 키웠겠습니까? 애 모친인 자기 여동생을 데리고 포주 노릇을 하고, 애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고 방치했대요. 그러다 애가 한 살이 되고부터 일을 시켰답니다.”

“한 살? 일이 가능한 나이가 아닌데.”

블레이크는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했으나, 사실이었다.

“거지들한테 돈을 받고 아이를 빌려줬다네요. 구걸할 때 아이가 있으면 동정심을 자극할 수 있으니깐요. 애가 대화가 가능했을 때부터는 집안일도 시켰다더군요. 아, 그 집 주변에는 몇 년째 수탉을 키우지 않는답니다.”

“무슨 소리지?”

제드는 손톱을 튕겼다. 아이의 이웃이라는 자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팔뚝을 타고 역겨움이 돋는 듯했다.

“탬버가 새벽부터 애를 패는 소리가 이웃들의 자명종 역할을 했답니다. 이틀 전에 아이 모친이 죽고 난 다음 날부터 때리는 소리가 멎었다는데, 아이를 팔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상품으로 보기 시작했다면 더 흠집을 내는 일은 피하고 싶었을 테니깐요.”

제드는 보고를 올리는 와중에도 속으로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죽여도 된다는 명령이 없었으니 숨통을 끊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평생 병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제드가 이를 가는 사이, 블레이크는 종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비관적인 사고는 가혹한 성장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게다가 가정 교육은커녕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단 말이지.’

하지만 오늘 마차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아이의 수준은 그보다 높았다.

‘그런 것을 떠나서 뭔가가 걸린다.’

석연찮은 부분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를 본 순간 느꼈다. 늘 호흡을 타고 들어와, 폐를 짓누르는 기운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막 깨어난 꿈처럼, 아른거리던 느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옅어졌다. 이제는 다시 그 느낌을 받는다 해도 그때와 같은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가족이란 인간들이 그럴 수 있죠? 사랑을 모르고 자랐으니 애가 노예니 뭐니 하는 삭막한 소리나 하죠.”

결국 분을 참지 못한 제드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블레이크는 그중 한 부분을 곱씹었다.

‘사랑을 모르는 아이라.’

그런 아이가 저택에 하나 더 있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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